57화
“흐핳하핳ㅎ, 귀여워라.”
아,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너무 집중하다가 경박하게 웃어버렸다.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귀엽다고? 그대 지금 내가 황자라는 걸 까먹은 게 아닌가.”
“지금 말고요… 과거의 어린 황자님은 좀 귀여워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황자님의 어린 시절이면 이 외모가 어디 가진 않았을 테니 분명 아주 잘생긴 소년이셨을 텐데.”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틀린 말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와… 잘생겼다는 말에는 좀 예의가 없어도 봐주시는군요?”
순간 그와 나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고 지나갔다.
기분 좋은 그 웃음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감히 황자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하면서 예의도 차리려 하는군. 한 가지만 해.”
“흐하핳ㅎ하하.”
누가 내 웃음 버튼을 누르고 갔나 보다. 웃긴 말도 아닌데.
별것 아닌 말에 나는 연신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불이 많이 꺼져서 사위가 정말 어둑어둑했다.
적막한 옥상 위, 어둠 속에서 내 웃음은 한낮의 땡볕처럼 소란스럽게 주변을 울렸다.
그가 자꾸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사람이 있는 쪽으로 시선이 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살짝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저렇지?’
*
여자는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고저 없이 말을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웃음소리에서 소리가 확 한 톤이 올라갔다.
차분히 말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경쾌하게 웃어버린다.
그래서 나일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여자랑 웃음소리가 너무 똑같아.’
목소리만 놓고 보자면 분명 다른 이의 목소리인데.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기억 속에서만 머물던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그녀가 제 옆에 와서 웃고 있는 것처럼.
“저도 잘 기억해 놨다가 배고플 땐 저길 지나가지 말아야겠어요.”
한번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던 여자가 다시 나긋나긋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라고 계속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그 내용이 나일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대의 가문이 어디라고 했지?”
“란셀롯이요.”
“란셀롯….”
란셀롯이라, 란셀롯….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고위 귀족이 아니고서야 나일 역시 동제국의 모든 가문명을 다 외우고 있진 않았다.
동제국 내에 자리 잡은 귀족이 아니거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한미한 귀족일 것이다.
그런 귀족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지 없이 작위만 있는.
“본가는 어디에 있지?”
“동제국 남부에 있습니다.”
“….”
그 여자가 아닌데.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웃음소리에 나일은 메말라가는 입술을 깨물어 적셨다.
가문명도, 본가가 있는 곳도 다름을 확인했지만 가슴의 두방망이질이 멈추질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겼지?”
“어, 저는….”
녹색 눈동자에 밝게 물결치는 금발 머리입니다.
라는 말이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나온다면 나일은 당장 그녀를 끌어안을지도 모른다.
여자에게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며, 나일은 난간에 올려놓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녹색 눈동자에 담갈색 긴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난간 위 나일의 손이 둥글게 오므라들었다.
“왜 그러시는지.”
“아니다. 되었다.”
순간, 여자의 뒤편에서 바람이 불어닥쳤다.
흩날리는 긴 머리가 나일의 주먹 쥔 손등을 간지럽혔다.
‘지금 이 머리가 그녀의 금발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 여자가 아니야.’
그저 웃음소리가 닮은 여자일 뿐인 거다.
너무 놀랐던 마음과 실망감이 뒤섞이며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순간 비틀거리는 제 몸을 난간을 짚은 손에 의지해 버텼다.
“황자 전하!”
“황자님!”
제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여자가 급하게 자신의 몸으로 저를 받친 모양이다.
뒤에 서 있던 시종도 놀라 다가와 제 팔뚝을 잡고 그를 부축하려 들었다.
그가 시종에게 잡힌 제 팔뚝을 거칠게 빼냈다.
“놔.”
그 말에 시종이 잡았던 나일의 팔을 놓으며 한 걸음 멀어졌다.
아, 여자가 제게도 한 말이라고 오해를 한 듯싶었다.
그녀가 몸을 움찔 떨더니 제 가슴팍에서 멀어지려는 몸동작을 취했다.
여자가 도망갈세라 나일은 여자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황…!?”
여자가 얼마나 크게 놀랐으면 황자의 황까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미처 내뱉지 못한 황자 전하라는 말을 안으로 삼키나 보다.
품속의 여자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숨은 쉬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품속에서 다람쥐같이 몸을 웅크렸던 여자의 어깨가 미약하게 들썩였다.
“웃어봐.”
“웃어요?”
“응, 웃어봐.”
“이 상태로 말씀이세요?”
“응.”
꽤 난감하겠지. 갑자기 웃어보라니.
그래도 내뱉은 말을 거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운 웃음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싶었으니까.
“하… 하핫… 하하….”
웃는 꼴이 어색하기 짝이 없군.
그가 원하는 웃음소리는 얼굴에 동상 걸린 것 같은 이런 삐걱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진짜로 웃어보라니까.”
“지금 웃긴 일이 없는데 어떻게 진짜로 웃죠? 되나 그게. 그럼 황자님부터 한번 웃어보세요.”
웃긴 일.
요즘의 제겐 웃긴 일이 없는데.
나일은 뒤를 돌아 시종을 불렀다.
“이 영애를 웃겨보아라.”
*
침대 위에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어져 있던 알렉스는 몸을 뒤집었다.
- 똑똑
옆방 벽을 두드렸지만 되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아직도 안 들어왔네.
밤이슬로 샤워라도 할 생각인가.
나간 지가 언제인데 안 들어오는 거지.
- 내가 지켜줄게. 넌 내 아가씨니까.
지켜주겠다면서.
지켜주려면 적어도 옆에 있어 줘야 가능한 일 아닌가.
사람 지키는 일이 원격으로도 가능한가 보지?
이렇게 싸돌아다니면 자기가 당장 오늘 밤 죽어도 모를 것 같은데.
‘말은… 하여튼 말은 잘해요.’
알렉스는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빈 서랍 안에서 반지가 요란하게 굴렀다.
피노가 낀 목걸이와 똑같은 투명한 보석이 장식된 반지였다.
“도대체가 내 시녀는.”
말만 하면 뭐해, 실천을 해야지.
침대 위 걸터앉아 반지를 익숙한 손가락에 끼우자, 짧아져 있던 민트빛 머리카락은 쑥 길어지고 커져 있던 몸은 확 줄어들어 모두가 아는 알레나의 모습으로 그가 돌아와 있었다.
산책을 옥상으로 간다고 했었지.
그가 몸을 일으켰다.
*
“우… 웃기라 명하시면….”
나일의 품에 안긴 채로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날 웃기라 명령받은 시종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애틋하게 빛났다.
“그, 그럼 요즘 유행하는 광대의 몸짓을 흉내 내 보겠습니다.”
뭐든 어서 해보세요.
나는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날 품은 자의 까만 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안 웃으면 저 시종 큰일 나는 거 아냐?’
5월의 숙녀 행사 첫날, 제대로 경비를 서지 않았다고 팔 한쪽이 깨끗하게 잘려버린 경비병처럼.
저 시종도 나를 못 웃기면….
설마, 그건 로건 후페이가 그런 거니까.
나일이 안 보는 사이 성격이 많이 포악해진 것 같긴 했지만 그러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바나나 나무 위에 열린 바나나를 따 먹어야 하는데 자꾸 나무를 오르다 떨어지는 불쌍한 원숭이의 몸짓입니다.”
듣기만 했는데도 재미가 없는데 어쩌나.
웃으라니 웃어야 하는데 내 표정은 점점 걱정과 염려로 심각해져만 갔다.
그건 내 앞에서 날 웃길 준비를 하는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의 표정이 저렇게 죽을상이라니.
그건 바나나가 싫은 원숭이가 아닐까요.
힘들겠지만 좀 웃어보세요.
님이 웃으셔야 제가 따라서라도 웃어볼 것 아닙니까.
“우끼? 우끼이이~”
원숭이로 변신한 시종이 허공을 보며 양팔을 휘둘렀다.
아 저쯤 바나나가 달려있나 보군.
나무 위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가 좋다고 땅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나무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웃!끼이이… 웃끼끼끼이!!”
나무를 오르다 중간에 땅으로 떨어져 버린 원숭이가 매달린 바나나를 보며 목 놓아 우는 것 같았다.
되게 연기 잘하신다.
그래서 더 슬펐다. 잘하는데 재미가 없어서.
나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는 시종의 표정이 흙색으로 변해갔다.
“내 시종이 무능해 미안하군.”
“우끼이….”
“그만해라.”
이 밤에 갑자기 잘 모르는 사람을 웃겨보라는 명령을 받으면 누구나 무능해질걸요.
“아뇨. 이건 제가….”
“피기.”
안타까운 시종님을 구제하려 아무 말이나 얼버무리려는데 뒤에서 낯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알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멘데 공작가의 둘째, 알레나 멘데입니다.”
“정식 인사가 내일 준비된 것으로 아는데 예정보다 이르게 만났군. 영애.”
“예, 황자 전하.”
짧은 인사 후 모두가 말이 없었다.
한순간의 정적을 깨트린 것은 알레나였다.
“제 시녀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이 밤에 시녀를 찾으러 나온 건가.”
“지금 전하께 잡혀있는 아이는 제 시녀이자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이 넓은 궁에 아는 이라고는 제 시녀뿐인지라 그 아이가 없으니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러자 내 몸을 감싼 나일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새를 놓칠세라, 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가자.”
“….”
계속 황자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는 알레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치료제와 치료 대상의 첫 만남이니만큼 로맨틱하고 화기애애해야 맞지 않나?
둘 사이 분위기가 싸한 건지, 밤바람이 싸한 건지.
빨리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알레나가 순순히 내가 끄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황자 전하.”
그러던 그녀가 돌연 다시 돌아서 나일을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 시녀 대신 치료제인 저를 안아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황자 전하께도 이로울 테니까요.”
“….”
꺄.
자길 안아달라니!
표면상으로야 알레나가 치료제였으니까 자기를 안으라는 말은 맞는 말이긴 했다.
민망한 말이라서 그렇지.
그런데 두 분 분위기가 왜 이럴까.
내용만 들으면 당사자건 주위 사람들이건 부끄러워져 얼굴을 감쌀 만한 대사였는데.
아니 얘는 무슨 잘 지내보자는 말을 저렇게 살벌한 말투로 해.
어째 부끄러운 내용과는 다르게 그녀의 말투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흘렀다.
“그러지.”
나일에게서도 무뚝뚝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게 앞으로 우리 살 비벼가며 잘 지내보자는 사람들의 대화인가.
날 안아줘, 그래 널 안을게. 라는 말이 내 앞에서 오고 간 게 맞아?
이 분위기는 너 죽여버린다, 그래 어디 한번 죽여보든지. 가 더 어울리는 분위기야 얘들아.
말에 담겨 있는 내용과 말투의 괴리를 느끼며 나는 알레나를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