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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56)화 (56/134)

56화

가져온 짐이 얼마 없어 짐 정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은 이미 깨끗이 정리된 상태라, 원한다면 언제든 흰 시트 위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레이스 프릴이 바닥까지 늘어진 침대를 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방 공기가 조금 더웠다.

창을 열자 보랏빛이던 하늘이 어느새 검게 바뀌어 있었다.

밖 공기는 이렇게 시원한데.

- 똑똑

알레나가 있을 옆방을 두드렸다.

조금 전까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었지?

벌써 잠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기다렸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 건너가도 돼?”

“안 돼… 나 이미 잠옷으로 다 갈아입어 버려서.”

잠옷 바람을 보여주는 걸 그녀는 부끄럽게 여기는구나.

“아. 나 잠자기 전에 잠깐 밤 산책하고 오려는데 같이 나갈까 싶어서.”

“아… 미안해. 나 자려구.”

“그래? 그래 알겠어. 푹 자.”

알레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고풍스러운 화장대 위에는 단 한 가지 물건이 놓여있었다.

내가 벗어두었던 속임수 보석이 박힌 목걸이.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지금의 모습은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루 동안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돌아다녔더니 은근한 피로감이 느껴져, 방문을 잠그고 목걸이를 벗어둔 참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다시 차야겠지.

이 목걸이에 박힌 투명한 속임수 보석이 내 외모와 목소리를 바꿔, 그에게서 나를 숨기도록 도와줄 것이다.

속임수 보석을 사용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나처럼 무언가를 가리고 숨겨야 하는, 떳떳하지 못한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이겠지.

그런 주제에 하필이면 이토록 속이 다 비치도록 투명한 보석이라니. 어울리지 않는걸.

그러나 내게는 이 목걸이가 잘 어울렸다.

보석을 착용한 후, 몇 초가 흐르는 동안 외모는 자연스럽게 바뀐다. 

목걸이를 목에 걸자, 거울 속에서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피비 셀린은, 여전한 녹색 눈동자였지만 머리는 담갈색으로 바뀐 피기 란셀롯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아. 황자, 황자 전하….”

거울 속의 여자가 황자님을 불렀다.

비슷한 톤이긴 했지만 바뀌어서 분명히 다른 이의 목소리가 났다.

그에게 목소리로 들키는 일은 없겠지.

오늘은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내일은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내일도 저번에 본 모습처럼 괴팍한 상태이려나.

“나일.”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 보았다.

어차피 내가 피기 란셀롯으로 있는 동안은 그를 이름으로 부를 일은 없겠지만.

전에는 있었던가? 하긴 전에도 없었지.

그때의 나는 황자의 정체를 모른 척하느라 계속 병사님으로만 불렀으니까.

“나일.”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그를 이렇게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입천장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이름이 친숙했다.

속으로 하도 많이 불러대서 그런가.

“나가 볼까.”

거울 속의 담갈색 머리의 여자가 힘차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방에서 나와 옥상으로 나 있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옥상은, 가슴 높이 정도 올라오는 난간을 제외하고는 탁 트여있어서 개방감이 대단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결에 건물의 이끼 냄새가 묻어났다.

황궁이 높은 지대에 있어서 그런가, 확실히 공기가 시원하고 깨끗했다.

옥상을 반 바퀴쯤 걸었을까.

나는 멈춰 서서 황자궁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직 황궁이 잠들 시간은 아닌가 보다.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어, 땅거미가 내린 어스름 속에서도 건물의 실루엣이나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옥상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나전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은은한 빛을 더했다.

저거 비싸서 우리 집에 세 개밖에 없었는데.

‘저기가 식료품 보관하는 곳이라 했고….’

오티 때 배운 것들이나 점검하고 들어가야지.

내일 알레나에게도 알려 줘야 했으니까, 밤사이 까먹지 않게 한 번만 더 곱씹어볼까.

그때, 우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돌아보니 나일과 시종이었다.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어쩌지. 먼저 소리를 내야 하나.

괜찮아.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다른 외모, 다른 목소리. 그에게 들킬 일 없는.

“거기 누구지.”

“멘데 영애의 시녀입니다. 황자 전하.”

곁눈질로 나를 힐끗 확인한 시종이 대답했다.

“아, 그.”

이제 그와 나는 황자와 시녀의 관계이니까.

나는 예를 갖춰 무릎을 굽혔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늦은 시각에 뭘 하고 있던 거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일어나니 그가 내 옆에 와 있었다.

그를 내 옆에 데려다 놓은 시종은 뒷걸음질로 멀어지더니 저 멀리에 가 섰다.

나일이 제 허리께쯤 와 있는 난간에 손을 올렸다.

밤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홀린 듯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꽤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편안해 보이는 그와는 다르게 나는 곧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내 목을 졸랐던, 자기혐오로 가득 차 죽을 것 같던 표정이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 망가진 얼굴의 지분을 나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조심해야지.

어설프게 빛나던 과거의 그를 칭찬하는 말도, 현재의 그를 안타까워하는 말도 조심해야 했다.

뼈아픈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방 공기가 좀 답답해서 자기 전 산책을 나온 길이었습니다.”

“그렇군. 거처는 지낼 만한가?”

“예. 신경 써주신 덕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하나둘 꺼져가는 황궁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바쁜 하루를 보낸 노곤한 영혼들이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는 때가 이때인가보다.

“….”

멀리에 서 있는 시종도, 옆에 있는 그도,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밤하늘도 너무나 조용했다.

그래서 별안간 말이 툭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동제국의 황궁은 아름답습니다. 황자 전하.”

아, 갑자기 황궁을 칭찬한다고?

그냥 가만히나 있을걸.

도대체 얌전히 있어야 하는 타이밍 따위 모르는 내 입을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가, 다행이군. 마음에 든다니.”

남자의 가벼운 동조에 내 입술이 또 실룩거렸다.

“네. 예전에….”

예전에 왜 당신이 그렇게나 동제국에 같이 가자고 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만큼.

“동제국에 꼭 놀러 오라고 조르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될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래? 그럼 그 친구가 기뻐하고 있겠군. 초대한 이가 황궁에 왔으니.”

“아… 하하… 아쉽게도 그는 제가 온 걸 몰라서…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라서요.”

“….”

바로바로 대화를 이어나가던 그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길래, 나는 이 대화가 이대로 끝이 난 거로군. 여기고 있었다.

“내게도.”

“…?”

“내가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상대가 있었는데 말이야.”

“….”

“어찌나 고집이 센지. 영영 올 생각이 없나 봐.”

“….”

“그러니까 그대가 황궁에 머무는 동안 많이 봐주도록 해. 못 본 사람이 아쉬운 거지 뭐.”

“…예.”

저 아래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반사된 빛들이 아른거렸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멀쩡한 눈을 가진 나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가 보는 것들이 탐이 났다.

“어떻지?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황궁의 모습은.”

“….”

“지금도 아름다운가. 밤이라 보이는 것이 많이 없을 텐데.”

“아….”

그 말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지평선 아래에서 하나둘 불빛들이 꺼져가는 대신, 지평선 위로 하나둘 별빛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어 어둡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초를 켜놓은 곳도 많고, 밤하늘에 별이 정말 많아서… 하나도 어둡지 않습니다. 전하.”

“그래? 별이 많이 뜬 밤이라니. 그대가 보는 것들을 나도 보고 싶은 밤이로군.”

“…보여드릴까요?”

“…?”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을 설명해 드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황자 전하께 황자궁을 설명해 드린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지만.”

“내 궁이라 하더라도 안 본 지가 워낙 오래라. 그대의 설명으로 오랜만에 궁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군.”

오늘의 그는 다행히 유한 상태구나.

그가 내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살짝 그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제가 왼쪽에서 보이는 것들부터 쭉 설명해나갈 거라서요… 황자님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려… 네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옆에 붙어 서서, 그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보이는 풍경부터 설명해나갔다.

“1층으로 된 하얀 석조 건물이 있는데 저곳은 경비병들이 묵는 숙소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건물 중에 가장 많은 불이 켜져 있습니다.”

나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건물 안으로 붉은 정복을 입은 경비병들이 지금 우르르 들어갔어요.”

“교대시간일 것이다.”

“아… 그리고 옆에는 아주 큰 나무가 쭉 이어진 길이 시작되는데, 저게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지?”

어둡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설명하려니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까치발을 든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보일 것도 같은데.

“뭐 하는 거지? 몸을 계속 움직이는 것 같은데.”

“아, 그게 잘 안 보여서….”

“황자궁에서 추락사가 생기는 건 원치 않으니 얌전히 있어 주었으면 좋겠군.”

“…네, 황자 전하.”

그가 제 손을 올려놓은 난간을 더듬더니 몸을 조금 더 난간 쪽으로 기울였다.

한 손을 뻗어 멀리 나 있는 나무 길을 가리켰다.

“저쯤이지? 나무가 쭉 이어졌다는 길이.”

“네.”

“플라타너스 길이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우측으로 움직였다.

“그 길은 저쯤에서 끝나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황궁 사용인들을 위한 커다란 식당이 있어서 그곳을 지날 때면 음식 냄새가 가득 나지.”

그가 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장소를 보며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의 황궁에서의 추억을 살짝 엿보는 듯한 느낌에 난 괜스레 호들갑을 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와. 그럼 밥 안 먹고 저길 지나면 안 되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식사 시간도 잊고 있다가 급하게 황자궁으로 돌아가는데, 하필 저곳을 지나야 했던 거야.

황자가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지. 그땐 어렸으니까 그런 것도 잘 모르겠고 배는 고픈데 맛있는 냄새는 나지.

저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밥 달라고 소리쳤거든. 백여 명 가까이 되는 사용인들이 밥을 먹다가 동시에 벌컥 일어나는데 그걸 보고 놀라서 뛰쳐나왔어.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 들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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