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시계탑의 최상층은 사방이 오픈되어 있는데, 가운데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러나 그 문은 보통 큼지막한 자물쇠로 잠가져 있었다.
나일이 사람과 마주치기 싫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그곳을 찾았는데 하녀들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때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나일은 그곳에 자물쇠를 걸어두라 명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황궁을, 특히나 제 거처인 황자궁에 들어왔는데 딱히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설렘이나 두려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일 때보다도 더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시종장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할 테니 그에게 맡겨 두고, 낮잠이나 실컷 청하고 가야지.
시계탑에 누워있으면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 소리뿐이고, 살결에 닿는 바람은 차고 부드러워 구름에 떠 있는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그렇게 한잠 자고 일어나면 바쁜 오늘이 지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일은 눈을 감았다.
“저 건물이 하녀들이 묵는 숙소래요.”
“저기 저 녹색 건물?”
“네. 붉은 벽돌 건물인데 담쟁이 덩굴 때문에 녹색으로 보이네요.”
“그렇구나. 저긴??”
“아 저거는 뭐더라.”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른 감각들이 아무리 예민해져도 시간을 아는 것만은 힘든 일이었다.
하늘이 파란 아침인지, 노을 진 저녁인지… 그에겐 언제나 칠흑 같은 밤의 연속이었으니까.
따갑게 피부에 닿았던 햇살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저녁은 되었겠군.
몸을 일으키려는데 한 단 아래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황자궁도 잘 보인다.”
“오 그렇네요. 메릴린 아가씨는 2층에 묵고 계시죠?”
“웅.”
2층에 묵고 있는 메릴린 아가씨라.
그렇다면 어린 꼬마의 목소리는 루메낙 후작가의 어린 영애로군.
루메낙 후작 영애와 그 시녀가 시계탑까지 구경을 나온 것인가?
“피기는? 피기는 어디 묵어??”
“저랑 알레나 아가씨는 3층이에요.”
알레나 아가씨라고? 3층에 묵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얘기 중인 저 여자는 멘데 공작가 영애의 시녀로 온 자일 것이다.
루메낙 후작가의 어린 영애와 멘데 공작 영애의 시녀가 함께 있다고? 희한한 조합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이길래, 저런 희한한 조합이 첫날부터 탄생한 것인지….
나일은 도통 추측할 수가 없었다.
“황….”
제 옆에서 저만큼이나 열심히 자고 있던 시종이 그제야 깼는지 입을 열었다.
나일은 급하게 시종을 탁 쳤다. 입을 다물란 소리였다.
이런 보기 힘든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있나.
나일이 조용히 제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알아들었나보다. 시종에게선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피기피기. 나 여기 간지러워.”
“어디요?”
“요기 봐봐 요기.”
“아, 치료제 문양 있는 곳이 간지러우세요? 그래도 긁으시면 안 돼요. 빨개졌어요.”
“나 이 모양 없을 땐 간지럽지 않았는데 생기구 나서 간지러워… 이거 싫어….”
“음, 그게 치료제의 문양이라서… 황자님을 빨리 치료해드리면 여기가 간지럽지 않을 거예요.”
“그런 거야? 그럼 나 이거 만들어 준 아저씨한테 이거 다시 없애달라고 하면 안 돼?”
“…이거 아저씨가 만들어 줬어요?”
“응, 이상한 고깔모자 쓴 못생긴 아저씨였어.”
“…하.”
순간 나일은 오늘 두 번째로 소리 내 웃을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멘데가의 시녀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짧게 탄식 한 그 순간엔 정말 웃지 않으려 입을 꼭 오므려야만 했다.
시녀의 당황스러움이 그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나일은 자신의 시커먼 속을 채우기 위해, 사리 분별 못 하는 어린 딸에게 문양을 새기는 아비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촌극이 따로 없었다.
“근데 이거 지우면… 아가씨가 곤란하게 될 거라서… 계속 간지러우세요?”
“웅.”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어때요? 좀 낫지 않아요?”
“이게 뭐야? 꽃무늬야??”
“아뇨. 십자가요. 주님의 은총이 간지러움을 이겨내게 해주실 거예요. 좀 덜 간지럽지 않나요?”
“응응. 신기해.”
저 시녀는… 어린아이 못지않게 당황스럽군.
“근데 아가씨 그거 많이 간지러워도 못생긴 아저씨가 만들어 줬다는 말은 하시면 안 돼요.”
“왜? 아… 사실 후작님도 그런 말 했어.”
“에? 근데 왜 저한테 얘기하셨어요?”
“피기는 좋은 사람 같아서….”
“잘 모르는 사람을 섣불리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시면 안 돼요.”
“웅….”
꽤나 양심적인 시녀라고 해야 할지.
아니, 오히려 제 아가씨를 위한다면 상대방이 가짜인 걸 스스로 실토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서로를 대하는 세 가문의 기세가 대단할 것이라 여겼는데, 너무 화목하잖아?
나일은 저도 모르게 그 둘의 대화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사라가 그런 말을 했어. 황자궁에 온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 금방 나가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피기랑 금방 헤어져야 해?”
“그게 싫으세요?”
“응, 헤어지기 싫어.”
“하하핳 어쩌나. 황자님은 입장이 많이 다르실 텐데.”
황자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시녀군.
맞는 말이었다.
가짜 치료제를 곁에 두어서 제가 얻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일은 누가 진짜 치료제인지 확인 후, 가짜들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 황자님을 셋이 같이 치료해드릴까요?”
“이 모양이 있어야 치료할 수 있는 거지?”
“어~ 있으면 더 좋긴 한데요. 없어도 할 수 있어요. 마음으로 간절히 빌면 되거든요.”
“어떻게?”
“메릴린 아가씨가 어머님이 낫길 바라는 마음의 십 분의 일만 황자님께 쓰면 치료가 될걸요?”
“정말?”
“네, 사람을 낫게 하는 건 그를 위하는 마음이거든요. 그런 문양 없이도.”
그를 위하는 마음이라.
그렇다면 자신이 여태껏 낫지 않은 이유는 간절히 바라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란 말이 되는데.
좀 씁쓸하지만 너무 그럴싸해서 반박을 못 하겠군.
그가 자신을 조소하고 있을 때였다.
“의사가 셋이면 더 좋지 않을까요? 각각 전문분야를 정해서 치료해보는 거죠. 머리 담당… 팔 담당 이렇게. 황자님 키 크시니까 혼자는 좀 버거울 수 있어요.”
“아! 그렇다면 메릴린은 키가 작으니까 발 해야 하나??”
“발… 발 괜찮으시겠어요? 그분 발 냄새 안 나시나.”
“황자님 발 안 닦아??”
“몰라요 저도 오늘 왔잖아요.”
나일은 시종이 있는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이 제 발을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근데 황자님은 어떤 분일까?”
“글쎄요.”
“내가 들었는데, 늘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서 물잔을 던진대.”
“음….”
딱히 반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활이 요즘 그의 일상이었으니까.
소문이란 꾸물꾸물 퍼져나갔을 테고, 그들은 저들이 들은 그대로를 평가하는 것뿐이니까.
어떤 소리를 떠들든 나일은 크게 상관없다 여겼다.
“으음… 메릴린 아가씨.”
“응?”
“아까 어머니가 보고 싶다 하셨죠. 그래서 저랑 여기 온 거잖아요.”
“응.”
“근데 어머니를 계속 볼 수 없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계속? 얼마나?”
“음~ 100일?”
“안 돼. 그건 너무 슬퍼.”
어린 영애의 목소리엔 이미 울음기가 껴 있었다.
“거봐요. 어머니를 100일이나 못 본다고 생각하면 막 인형을 던지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웅웅. 그럴 거 같아.”
“그렇게 격하게 고갯짓은 하지 마시구요. 그래도 화난다고 물건 던지는 건 안 되는 거거든요?”
“웅… 알았어….”
“어쨌든 황자님은 100일도 훠얼씬 넘게 보고 싶은 사람들을 못 보고 계신 거랍니다.”
“그럼 황자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슬픈 사람인 거구나!?”
“네 뭐 그런 거죠. 괜찮아요. 저희가 치료해드릴 거잖아요?”
“알겠어! 그럼 나 이 모양 간지러워도 안 지울 거야!”
“좋아요 아가씨. 착하십니다.”
둘은 시간이 너무 흘렀다며 시계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계탑의 계단을 내려가는 큰 발소리와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저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황자인 저를 갈라 먹기 위해 온 자들인데.
“….”
저주가 많이 진행되긴 한 모양이었다.
저주가 제 몸을 다 파먹고 이제는 마음마저 너덜너덜하게 뜯어먹어 버린 모양이야.
저런 가벼운 동정의 말에도 위로를 받는구나 내가.
정말 약해졌구나 내가.
둘은 계단을 다 내려간 것 같았다.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가자.”
“예.”
나일은 다가온 시종의 몸에 어깨를 둘렀다.
*
“도대체가 넌 망아지처럼 첫날부터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 자.”
루메낙 후작 영애를 데려다주고 날 기다리는 알레나에게로 돌아온 시각은 저녁이 한참 지난 때였다.
화려한 자카드 무늬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니 알레나가 연고를 구해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넘어져 무릎이 까진 날 위해서였다.
그녀가 내게 연고를 휙 던지고서 테이블로 가 앉았다.
“야 발라주는 건 안 해줘?”
“직접 해.”
쟤는 정말이지 냉탕과 온탕을 자주 왔다 갔다 한다니까.
무릎을 세우고 드레스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리자 무릎까진 부분이 보였다.
“이거 연고 바르면 따갑대?”
“뭐?”
테이블에서 늦은 저녁을 먹던 알레나가 내 말에 등을 돌렸다.
많이 따가운지 안 따가운지 알아야 바르기 전에 마음을 굳게 먹고 바를지 편하게 바를지 결정한단 말이야….
연고를 바를 준비를 하고서 물어보는데, 내 쪽으로 등을 돌린 알레나가 갑자기 컥컥 댔다.
“목 막혔어?”
“야 너는, 무슨 애가….”
그녀가 제 가슴을 쿵쿵 쳤다.
“물 마셔.”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컥컥대던 그녀는 다시 돌아앉아 식사를 이어나갔다.
따가운지 안 따가운지는 끝까지 안 알려 주네.
연고를 무릎에 대고 짜자 누리끼리한 연고가 밀리듯 나왔다.
“다 발랐어?”
“응.”
“드레스도 내렸어?”
“다 발랐다니까.”
나이프와 포크를 빈 그릇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걸어와 내가 앉은 소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푹신한 소파가 그녀의 몸에 맞게 푹 꺼져 들어갔다.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알레나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왜.”
“연고 따가웠어?”
“아니.”
“….”
둘 다 소파에 기댄 채 말이 없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밥 먹고 나서 소화를 저렇게 남을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하는 걸까.
“넌 내 시녀야.”
“응. 그렇지. 그게 왜?”
“넌 내 시녀라고. 내 옆에 좀 있어. 어디 가지 말고. 네 아가씨를 자꾸 외롭게 둘 거야?”
“아… 미안. 나 기다리느라 저녁을 너무 늦게 먹었지.”
“…알면 됐다.”
말을 마친 알레나가 소파에 바로 앉았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자는 어쩌려는 걸까. 치료제가 셋이나 들어왔잖아.”
“확인하려 들겠지. 누가 가짜고 누가 진짜인지.”
“그렇겠지.”
어차피 알레나가 가짜라는 것을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진짜인 내가 곁에 있으니까.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 나일과 자주 닿느냐는 것인데.
“걱정 마. 네가 들키게 안 해. 내가 있잖아.”
소파에 앉아 옆에 앉은 알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나와 같은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너만 믿을게.”
그녀가 내 앞머리를 가볍게 부비며 웃었다.
걱정되겠지?
아마 알레나는 속으로 이것저것을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나와 황궁에 치료제로 들어와 가짜로 의심받는 일 없이 황자를 잘 치료하고 나갈 거라 여겼을 텐데.
치료제라 주장하는 이들이 둘이나 더 생겨버려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별하는 테스트에 올라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자기가 내 아가씨니까 딱 붙어 있으라는 말도 그래서 하는 걸 거다.
이 넓은 황궁에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은 안 되지, 제 편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응. 나 믿어. 그래도 돼.”
내가 널 끌어들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가짜 치료제로 황궁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너를 내가 진짜 치료제니 괜찮을 거라고 끌어들인 거니까.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을 꼭 말아쥐었다.
“내가 지켜줄게. 넌 내 아가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