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말도 안 돼.
알레나야 내가 진짜 치료제인 걸 알고 있으니 황자가 치료될 거고, 그럼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들어온 거지만.
“치료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사지로 딸을 몰아? 들킬 확률이 훨씬 큰데.”
“세상에 좋은 부모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처럼.”
“….”
“일이 웃기게 돌아가는군.”
알레나도 이 상황이 황당한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치료제라고 주장하는 세 명이 온 거면… 적어도 가짜가 두 명인 건 확정인 거잖아.”
“그렇지. 정확히는 가짜만 셋이지만.”
“황궁에선 어쩌려는 걸까. 세 명 중에 두 명의 가짜가 섞여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는데.”
“글쎄….”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짐을 날라주었던 조금 전의 시종이었다.
“시녀로 오신 분께선 지금 아래 모이셔야 합니다. 황궁 생활을 위한 안내시간이 잡혀 있습니다.”
세상에.
황궁에서 주최하는 신입 오티라니.
가기 싫어 죽겠다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내가 갈까?”
시종이 나가자마자 알레나가 내게 물어왔다.
미쳤니, 모시는 아가씨를 오티에 내보내는 시녀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게 바로 내 얼굴에 먹칠이지.
“됐어. 넌 여기서 쉬어. 언니가 기강 잡고 온다.”
*
늦은 오후부터 시작된 치료제분들의 시녀 대상 오티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오티 내용은 황궁 주요 기관의 위치와 약도, 황궁 예법과 황궁에서 가지 말아야 할 곳 등등이었다.
마지막엔 위 내용을 다 숙지했는지 검사하기 위한 간단한 시험을 쳤다.
아니 온종일 이것만 공부했는데 모를 리가 있겠냐, 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쳤는데 시험에 통과한 이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방대한 양을 빠르게 주입시키는 k학교 출신인 내겐 너무나 적은 양이었는데, 이 세계 언니들에겐 너무나 버거운 양이었나보다.
홀가분하게 걸어 나가는 등 뒤로 오센 공주의 시녀 셋, 메릴린 후작 영애의 시녀 하나, 총 네 명의 따끔한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아이 따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티장을 나섰다.
“춥네.”
가벼운 가디건을 걸쳤는데도 저녁 바람이 꽤 쌀쌀했다.
나는 오티장에서 저녁을 챙겨줘서 먹었는데, 알레나는 잘 먹었으려나.
아니 아가씨들을 잘 모시라고 시녀들을 대동했으면 옆에 붙여줘야지 시녀들을 다 불러가면 아가씨들은 어떻게 하라고.
성격 더러운 알레나가 걱정된 나는 급하게 발을 옮겼다.
“세라… 세라아….”
오티에서 황궁 지도도 얼추 외웠겠다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궁에서 지내는 사람 중에 아이를 데려온 자도 있겠지 뭐.
신경 끄고 걸어가려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금세 울먹울먹해졌다.
도저히 나 몰라라 지나갈 수 없는 목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건물 기둥 옆에 작달막한 아이가 기둥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분홍 머리에 분홍 눈을 가진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고운 분홍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모습이 적잖이 깜찍한데 표정은 울먹울먹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황궁 하녀의 딸이라든가, 낮은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는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
나는 아이의 앞에 가서 쭈그려 앉았다.
“안녕하세요.”
“안… 녕.”
“제 이름은 피기 란셀롯. 당신의 이름은?”
“나는 루메낙 후작가의 메, 메릴린 루메…낙.”
“아~”
알레나의 경쟁자.
아니다, 일단 같은 치료제 입장이니 경쟁자가 아니라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하나.
황자궁에 묵는 다른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어린 꼬맹이였다니.
근데 이 아이가 왜 여기서 혼자 떨고 있을까.
“루메낙 아가씨는 왜 여기 혼자 계세요?”
“사, 사라가… 안 와서….”
사라? 아 사라.
시녀 오티에 가자마자 했던 자기소개가 생각이 났다.
저는 루메낙 후작 영애의 시녀로 온 사라 도비입니다, 라고 첫 번째로 자기소개를 했던 여자였다.
“사라 영애가 오지 않아서 찾으러 나오신 거예요?”
“으응….”
세상에, 이런 어린애가 시녀랑 단둘이서 왔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한테서 시녀를 빼앗아가면 안 되는 거 아냐?
그 시녀 시험 볼 때 도대체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던데.
“음… 사라 영애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은데 방으로 돌아가 계시겠어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시, 싫어….”
“싫으세요?”
“웅….”
“싫어도 가시면 안 되나요?”
“응??”
애를 여기다 버리고 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알레나의 시녀로 온 내가 이 애를 데리고 있는 건 잘못하면 오해를 살만한 그림일 거 같은데.
냅다 안고서 방으로 뛰어버릴까.
아 그건 너무 납치범 같아 보일지도.
“싫어도 방으로 가야 해? 여기 온 것처럼?”
볼이 불룩하게 나온 게 마음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한껏 시무룩해진 아이의 표정이 귀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말 꼬랑지처럼 돌돌 말린 아이의 묶은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머리 모양 귀여워….
“여기 오는 거 싫으셨어요?”
“응.”
“근데 왜 오셨어요?”
“후작님이 황궁에… 황궁에 있는 황자님을 치료하면 엄마가 낫는다고 했어.”
아빠는 후작님으로 부르고 엄마는 엄마로 부르는 거로 봐서, 이 아이가 부모와 각각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까 루메낙 후작가가 어디라고 했지? 동제국의 최북단이랬나.
그 먼 곳에서 거짓말로 애를 꼬여서 달랑 시녀 한 명 붙여서 보내다니. 알만한 집안이군.
“와, 루메낙 아가씨는 굉장하네요. 그럼 황자님을 치료하면 어머니도 치료되는 거니까 일타쌍피, 아 아니 일거양득. 아 이것도 좀 어렵다. 여튼 대단하신 거예요.”
“그런 거야?”
“네.”
대단하다는 짤막한 칭찬에 아이는 양 볼을 붉혔다.
귀여워라.
그럼 이제 대단한 아가씨는 방으로 갈까?
“그럼 이제 방으로 가실….”
“싫어.”
“….”
“엄마 얘길 했더니 엄마 보고 싶어.”
“하… 엄마….”
엄마는 나도 보고 싶어요.
그치만 여기엔 아가씨 엄마도 우리 엄마도 없는걸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엄마를 볼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답니다 아가씨.
‘그치만 이 어린애가 벌써부터 그런 사실을 알 필요는 없는데.’
“북부로 가고 싶어. 나 엄마가 있는 북부로….”
엄마라는 단어가 이 꼬마 아가씨 마음의 수문이었나보다.
그 말과 함께 봇물 터지듯 아이가 북부라는 단어와 엄마라는 단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가시죠, 북부로.”
“정말?”
말과 함께 일어서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북부라는 말에 아이가 기쁜 기색으로 내 손을 잡았다.
“대신 북부를 보여드리고 나면 방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웅웅.”
“좋아요. 가시죠.”
*
‘오티에서 배운 내용을 이렇게 바로 써먹을 줄이야.’
황궁 오티에서 황궁 내 건물 소개와 위치도 알려주었기에, 나는 바로 시계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내 왼쪽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쥔 루메낙 어린이가 쫄래쫄래 날 따르고 있었다.
북부를 보여준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날 따르는 어린이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저기에요. 가실 수 있겠어요?”
“웅.”
시계탑은 황궁 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내가 현재 갈 수 있는 곳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고개를 뒤로 끝까지 꺾어야 맨 위층이 보일락 말락 했다.
높은 건물에 올라가자는 말에도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하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선 어른 여자 한 명과 아이 한 명은 너 나 할 것 없이 숨을 헥헥대고 있었다.
아이가 계단을 오르며 나를 자꾸 힐끗힐끗 훔쳐보는 것이, 이 여자한테 날 업어줄 힘이 있나 없나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파김치처럼 흐물거리는 내 꼬라지를 보고 빠르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이는 칭얼거리지 않고 묵묵히 탑을 올랐다.
눈치란 어려서부터 타고 나는 것인가.
“다 왔다.”
황궁 자체가 이미 해발고도가 높은 데다가, 그런 황궁에서도 높은 축에 속하는 시계탑인 만큼.
시계탑에서는 동제국의 수도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붉게 지는 저녁노을 사이로 구름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저녁 햇살을 덧칠한 바다가 붉게 빛났다.
“북부는 어디 있어?”
고개를 빼꼼 빼고 바다를 보던 아이가 내게 물어왔다.
“보세요. 저기요. 저기 구름 너머에 있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어린아이라면 정말 북부로 데려다주는 것을 기대했으려나.
너무 실망해 울음이라도 터트리지는 않겠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저기? 저쪽이 내가 온 북부가 있는 곳이야?”
“네.”
루메낙 후작가의 어린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없이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 보이세요? 구름 때문에 가려져서….”
“보여.”
보인다고?
나는 구름 너머를 보다 말고 아이의 옆에 쭈그렸다.
상기된 양 볼이 저녁노을의 햇살을 받아서 더 짙어져 있었다.
“신기하다. 여기서 보니까 우리 집도 잘 보이고 엄마도 잘 보여. 고마워. 나 여기 데리고 와줘서.”
보이는 거라곤 하늘과 바다뿐인데, 그 안에서 제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는 아이가 대견했다.
대견하고 안쓰러워 나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꾹 잡아주었다.
“원래 노력하면 더 잘 보이거든요. 아가씨가 여기까지 열심히 올라와서 보이나 봐요.”
“응. 고마워 피기.”
*
“세 분 다 오늘 입궁합니다.”
“….”
톡, 톡, 톡.
나일이 손끝으로 텅 빈 크리스탈 잔을 건드렸다.
“치료제랍시고 보낸다니 받기는 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를 동안 치료제를 찾지 못해 황자의 저주가 날로 깊어만 가고 있었다.
하도 나오질 않으니 치료제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황자가 상태가 좋아지는 날 없이 나빠지기만 했지만, 황궁에서도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일 리베르는 황제의 뒤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였다.
유일한 적장자를 저주 따위에 죽게 할 수야 없지.
황궁에서는 치료제가 끝까지 나오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의술, 신학, 점성술, 해주에 능하다고 소문난 자들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황궁으로 불러모아 저주를 풀기 위한 연구를 이어온 끝에.
황궁에서 치료제를 대신할 약을 만들어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이, 치료제를 찾는다는 전단지와 함께 대륙 곳곳에 퍼지고 난 지금.
치료제를 자처하는 자들이 세 명이나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가짜는….’
둘? 아니면 셋?
처음 치료제를 자처하는 연락을 받았을 땐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도 나오지 않던 치료제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
그러나 첫 서신을 시작으로 자신의 딸이 치료제라 말하는 편지가 연이어 두 통 더 도착한 것이다.
‘셋 중에 진짜가 있긴 하려나.’
처음엔 진짜는 한 명일 테니 셋 중 둘은 가짜겠거니 생각했으나, 지금은 셋 중에 과연 진짜가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치료제라….’
나를 어떻게 뜯어먹을지 고민하는 치료제들인가.
이미 보이지 않는 제게 무엇을 더 가져가려 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일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한 보상을 약속했으니 치료제가 되어 제 가문의 잇속을 챙기려는 속셈이겠지.
아마 그들도 딸을 보내기로 마음먹을 때까진 예상치 못했던 결과이리라.
치료제를 대신할 약을 만들었다 하니 황자는 진짜 치료제 없이도 치료될 것이고… 그렇다면 치료제가 얻어갈 예정이던 금은보화는 공중으로 사라지겠구나.
아, 아쉬운 것. 내가 그것을 차지하고 싶구나. 내 딸을 치료제로 만들면 어떨까, 어차피 황자가 약으로 치료된다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확인이 어렵지 않을까.
남의 것을 탐하는 욕심 많은 자들이 하는 생각이란 어찌 그리도 똑같을까.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두 세 명이 더 있었다는 것을.
“2층에 메릴린 루메낙 후작 영애, 3층에 프리츠 오센 공주, 알레나 멘데 공작 영애가 묵을 예정입니다.”
나일은 그녀들의 아버지 되는 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들 황궁에서 한자리하고 싶어 눈을 부릅뜨고 다니는 꼴이 우스운 자들이거나, 동제국과 어떻게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다.
“알아서 배정하도록.”
“….”
“참, 어디서 새나간 건지는 찾았나.”
“예, 모두 동일한 하녀의 입에서 나간 정보였습니다. 하녀는 처리했습니다.”
“그래.”
나일은 몸을 일으켰다.
시종장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됐어. 시종장은 나의 귀한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나일은 시종장 뒤에 서 있던 다른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가 다가와 나일 곁에 섰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아 세 여인을 동시에 보기가 힘들 것 같군.”
“….”
“시종장이 알아서 환영해주도록 해. 나는 천천히 보도록 하지.”
자신을 어떻게 뜯어먹을지 고민 중일 자들의 얼굴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시계탑으로 가자. 날이 좋으니 바람을 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