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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53)화 (53/134)

53화

“황자 전하!!”

쿵쾅거리는 달음박질 소리가 3층 복도를 울렸다.

누가 저리 채신머리없이.

발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시종장의 눈에 띈다면 그에게 분명 한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대리석 바닥을 쾅쾅 울려대는 저 발소리는 제 방문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멎을 것이다.

시종장이 달려오는 그에게 냅다 소리부터 지를 것이니까.

나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화앙자~~ 저언하!!”

그러나 3층을 뒤흔드는 달음박질 소리는 그대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말도 없이 들어온 자, 누구냐.”

“시종장이옵니다.”

나일의 머리를 빗던 하녀가 대답했다.

감히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벼락처럼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시종장이었다.

늘 단정한 복장의 노신사인 그가 보기 힘들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항상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빗어 올린 그의 머리가 흔들림을 못 이기고 엉망이었다.

“시종장의 복장이 엉망이옵니다. 전하.”

하녀가 나일에게 이르듯 말했다.

나일은 흔치 않은 일에 어이없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 시종장이 결국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치매에 걸린 게로군.”

“헉… 허억….”

“그 얌전한 사람이 한순간에 저리 바뀌다니 무서운 병이로다.”

“전, 전하.”

시종장의 푸른 두 눈동자가 설핏 젖어있는 듯 보였다.

그런 시종장을 빤히 바라보던 하녀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내 그대를 아껴 곁에 오래 두고 싶었는데 참 안타깝군.”

“저, 전… 저언하아~~”

고하지도 않고 문을 발로 차듯 열고 들어와 계속 저언하~!만 외치고 있는 시종장이었다.

그가 나일의 뒤에 서 있던 하녀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녀가 나감과 동시에 문이 닫히고 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동제국의 영원한 번영과 함께하실 리베르 황가의 적장자시여.”

숨을 가라앉힌 시종장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나일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시종장의 진지한 목소리에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찾았습니다!”

“….”

“치료제를 찾았습니다! 황자 전하!”

시종장의 손에는 서신 한 장이 들려있었다.

그가 분주한 손길로 흰 봉투에 담긴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시종장이 읽어내려가는 편지의 내용은 제 딸아이에게서 치료제의 문양이 발견되었으니,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제 딸과 시녀를 황궁으로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확실하게 확인해봐야겠으나, 편지에서 설명하는 문양은 황자 전하의 것과 일치합니다!”

“그렇군.”

나일은 제 엄지손톱을 만졌다.

거칠고 건조한 손톱 옆으로 거스러미가 달려있었다.

그가 거스러미를 반복적으로 문질렀다.

분명 기다렸던 소식인데, 반가워야 하는데.

기쁘고 반가웠지만 늘 기다렸던 순간을 맞이한 것에 비해서는 마음이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거스러미를 계속 문대자, 얇은 살가죽이 살짝 더 떨어져 나왔는지 거스러미와 손가락이 연결된 그 부분에서 희미한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치료되겠군.”

“네. 황자 전하! 이제 드디어…!”

감정이 격해졌는지 시종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몸이 치료받아서 저주를 떨치게 된다면.’

그곳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려 했었는데.

기다린다는 대답을 끝내 해주지 않았지만 내 멋대로 그리 정했었는데.

“하하….”

“이럴 때가 아니지. 황자 전하 금방 그 영애를 불러오겠습니다!”

시종장은 치료제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확실히 정신이 나가버린 게 분명했다.

그가 나일에게 나가보겠다는 말도 없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일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필해 온 시종장이, 이 소식을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기다린다는 말을 끝끝내 못 들어서 내 마음이 이러한가.”

기뻐야지, 시종장도 이리 기뻐하는데.

그가 조용히 제 입술을 깨물었다.

나일의 엄지손톱엔 하도 문질러서 거의 떨어져나온 거스러미가 달랑거렸다.

*

새 숙소의 현관문을 누군가 쾅쾅 두드렸다.

달려나가며 창 너머를 힐끔 보자, 멘데가의 마차가 서 있었다.

‘알레나가 왔어!’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내가 마주한 사람은 멘데가의 마차를 탈 때마다 보았던 익숙한 시종뿐이었다.

그의 손에 서신 한 통이 들려있었다.

“알레나는요?”

“아가씨께서 이 편지만 보내셨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알레나는 아픈가요?”

“…곧 황궁으로 들어가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내 눈을 피하며 대답하는 시종의 저 말이 어째 대충 둘러대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래도 진짜 치료제는 나인데 가짜 치료제로 들어가는 것이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도 있고 말이야.

‘뭐 어때서 그러지.’

어차피 황자는 치료가 될 거고 나 좋고 너 좋고 다 좋은 건데.

나는 그녀에게서 온 편지를 소중히 들고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알레나의 글씨체는 손편지가 아닌 키보드로 써낸 것처럼 정갈했다.

- 황궁에서 회신이 왔어. 입궁은 3일 후야. 입궁 날 오전 네 숙소 앞으로 마차를 타고 갈게. -

거처도 가까운데 얼굴이나 보러 와서 직접 얘기해도 될 것을, 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그녀도 입궁 전 준비할 게 많겠지.

“언제야?”

편지를 읽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파베라가 물었다.

“3일 후래.”

그녀가 다가와 나를 품에 넣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살갑기 그지없었다.

“너는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아이란다.”

“나도 나처럼 용감한 사람 못 본 것 같아.”

“큭큭,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하는 거, 알지?”

품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를 토닥이는 파베라의 손길엔 더 힘이 실렸다.

“언니한테 잘 돌보겠다고 했으니 내 체면을 생각해줘야 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럴 일 없어.”

이번 기회에 파베라에게 이야기를 더 털어놓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어렴풋이 내가 황자의 치료제인 걸 눈치채고 있었다 했다.

왜 감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 걱정하지 마 파베라. 잘 하고 올 테니까.”

“그래.”

*

3일은 빠르게 흘렀다.

편지에 쓰여 있던 것처럼 당일 날 아침, 멘데가의 마차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알레나 멘데 아가씨의 시녀로 가시는 분이 맞습니까?”

“네.”

내 뒤를 따라 나온 파베라가 들고 있던 커다란 짐가방을 한 손으로 시종에게 넘겼다.

가냘픈 팔목의 여성이 쉽게 드는 것을 보고 크기만 커다란 가방이라고 생각했던 시종은, 가볍게 한 손으로 가방을 넘겨받자마자 헉 소리를 냈다.

그가 알 수 없다는 눈길로 파베라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마차에 올랐다.

알레나의 옆자리엔 이미 그녀의 커다란 짐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탔는데도 창밖만 내내 보고 있던 그녀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

“헤헤, 어때? 어울려?”

내 모습을 확인한 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내 머리는 원래의 화려한 금발에서 조금은 평범한 담갈색이 되어 있었으니까.

목소리도 살짝 달라져 있었고.

“어떻게 할 건가 싶었는데 이거였군.”

본모습으로는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웠으니.

알레나의 시녀로 황궁에 들어가기 위해 새로운 신분을 사고, 파베라가 준 보석으로 외형과 목소리를 바꿨는데도 알레나는 놀라지 않았다.

엄청 놀랄 줄 알았는데?

“안 놀라네? 새 신분을 구할 거라고 말은 했지만 외형을 바꾼다는 얘기는 안 했는데.”

“새 이름은 뭐야.”

“란셀롯 남작가의 둘째 딸 피기 란셀롯이랍니다. 멘데 공작 영애.”

“….”

“오늘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겠습니다. 아가씨. 부디 새 인연에 마음을 열어주시죠.”

웃어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하자, 알레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건 나 아니냐? 치료제시니.”

“떽!”

알레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가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뒤로 물렸다.

“치료제는 너야. 이제부터 우리 둘만 있을 때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마.”

“알겠어. 근데 장신구는 뭐야?”

“장신구라니?”

“속임수 보석을 박은 장신구 말이야.”

“아, 목걸이야.”

잘 여며진 가슴께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이자 그녀는 알았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파베라가 엄청 희귀한 보석처럼 얘길 했는데, 이미 잘 알고 있잖아?

‘이거 그냥 흔한 보석인가?’

도대체 어떻게 외형과 목소리를 바꾼 거냐며 놀란 눈으로 물어올 거라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알레나의 반응은 응~ 그거구나~ 하는 김빠지는 반응이었다.

“이거 속임수 보석이라고 하는구나. 이거 흔해?”

“…그럴리가 있겠냐.”

알레나는 대답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를 다시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나도 조금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

황자궁 앞에 다다르자 이제는 몇 번 보아서 얼굴이 익은 시종장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는 웃음 띤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황궁에 머무실 동안 지내실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황자궁은 위에서 보았을 때 ㅁ자 형태인 네모난 건물이었다.

2층 높이의 거대한 입구로 들어서니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중정이 나왔다.

건물은 대부분 3층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 좌측 모서리에 있는 원형 탑은 홀로 5층까지 뻗어 있었다.

그곳 3층이 황자의 방이었다. 

‘저기 나일이 있구나.’

“멘데 영애께서 머무르실 방은 여깁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3층에 있는 방 중 하나였다.

“방을 어찌 쓰실지 몰라 급한 대로 이 방과 바로 옆방만 꾸며두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방을 내어드릴 수 있으니 원하는 대로 쓰시면 됩니다.”

잘 마련해 놨네.

황자의 방과 같은 층에 있는 가까운 방이었다.

이왕이면 가까운 곳에 머무르는 게 알레나가 그와 더 빠르게 친해질 기회가 많을 테니.

그래야 내가 그에게 닿을 기회도 더 많아질 테고.

“네. 알겠습니다.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아 일단 방 두 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오센 공주님은 방 두 개론 턱없이 부족하다 하시어 멘데 영애도 그러실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오센 공주님이라니요?”

알레나의 물음에 나 역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오센이 누구야.

갑자기 모르는 이름이 시종장의 입에서 튀어나와 알레나가 묻지 않았다면 내가 물으려던 상황이었다.

“설마 오센 왕국의 프리츠 오센 공주를 말하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

시종장의 말을 끝으로 셋 사이에 의미심장한 침묵이 흘렀다.

오센 공주는 방 두 개론 부족하다 했다고?

설마….

“시종장님. 황자궁에 다른 분들이 계신가요?”

“오센 왕국의 프리츠 오센 공주님, 동제국 북부에 영지를 가지고 계신 루메낙 후작가의 메릴린 루메낙 후작 영애께서 와 계십니다.”

왜 그분들이 우리와 같이 황자궁에 머문다는 것인지.

황자궁을 일종의, 고위 귀족들이 황궁에 놀러 왔을 때 숙소로 내어주는 공용거처 같은 곳으로 사용하는 건가?

아니면 황자님의 개인 손님이라거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이것저것 생각하기 바쁜 나와는 달리, 알레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시종장이 물러나자 방엔 나와 알레나만이 남았다.

그녀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치료제가 더 있는 거야.”

“뭐?”

“다들 나처럼 가짜 치료제를 만들어서 보낸 거라고. 치료제가 계속 나타나질 않아서 황자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래서 보낸 거야.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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