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대로 얼어붙은 알레나에게서 여전히 들어오라는 말이 없자.
미안, 지금은 어쩔 수 없구나, 이 얘기를 복도에서 할 순 없잖니.
나는 손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알레나는 장난치고 있었다는 것도 까먹었는지,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했다.
방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린 앞으로도 황궁을 드나들게 될 거야. 어쩌면 꽤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지.”
“…?”
“레나 너… 황자의 치료제가 될 거잖아.”
그녀의 사탕 같은 민트색 눈망울이 한껏 커지는 걸 난 분명 보았는데.
그런 그녀를 곧은 눈길로 직시하자, 알레나는 중언부언 말을 늘어놓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가 당황해서 눈을 몇 번씩이나 껌벅거렸다.
“넌 도대체 그런 헛소문을 어디서 듣고 다니는 거야. 치료제가 지원제도 아니고 되고 싶다고 되는 거냐.”
“….”
“그건 타고 나는 거라니까.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잘 아네.”
여전히 알레나는 표정관리가 전혀 되질 않았다.
저렇게 다 티 나는 표정으로 황궁 안에서 가짜 치료제인 걸 들키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후… 치료제의 문양은 몸 어디다 새길 거야? 벌써 새겼어?”
“무, 무슨 마, 말이야.”
“들었어 나. 네가 오빠와 정원에서 이야기하는 거.”
“….”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 말에도 그녀는 여전히 밤에 졸려서 네가 잘못 들은 거라는 둥 사실을 부정하기 바빴다.
거짓말 참 어지간히도 못 하는구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게 이쪽에서도 잘 보였다.
“밤에 들었다고는 얘기 안 했는데, 정원에서 들었다고만 했지.”
“아… 하하, 그날 오빠랑 나랑 대화한 건 밤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밤에 들었겠지.”
“내가 이 말을 꺼낸 건 네게 무슨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냐. 알레나.”
“….”
“어렵게 입수한 문양을 몸에 새기고, 네가 치료제인 것처럼 위장해서 황자의 곁에 있게 되었다고 쳐.”
“….”
“넌 가짜잖아. 황자는 치료되지 않을 거야. 그 결과에 대한 대응책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알레나가 날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들었나 보다.
“너 귀 진짜 밝구나.”
“아니 너희 남매 목소리가 너무 컸어. 발음이 거의 귀에 때려 박는 수준이라 모를 수가 없겠던데.”
“….”
“….”
기분이 좋아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말해. 대응책이 있는지.”
“있다고 들었어.”
“있다고 들어?”
“황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만한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들었어.”
“정확해야 해. 확실한 방법 맞아?”
“자식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맞지 않을까….”
그렇게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확실한 방법이란 것은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다.
문양을 가진 치료제 외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호전되지 않으면 넌 가짜인 걸 들킬 거고 죽게 될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알레나가 눈빛을 낮게 깔았다.
그건 확고한 결심이 선 자의 얼굴이라기보다 고민에 빠져 괴로운 얼굴에 더 가까웠다.
“응.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다는 답을 내놨다.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대답해 줄 차례였다.
“그렇다면 날 네 시녀로 들여.”
“뭐?”
“네가 치료제가 되어 황궁에 들어갈 때 날 네 곁에 있게 해줘.”
*
알레나는 동그란 녹색 눈동자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에게 눈을 맞췄다.
알게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피노 프리지아라는 이름의 이 여자애는 진심을 농담처럼 말했고 장난을 진심처럼 내뱉곤 했다.
늘 말 속에 반은 진심인 것 같고 반은 또 농담인 것 같아 알레나에겐 그 구별이 어려웠다.
그러나, 아까부터 이 아이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말 속에는 농담이 단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았다.
- 네가 치료제가 되어 황궁에 들어갈 때 날 네 곁에 있게 해줘.
내가 진짜 치료제가 아니라 가짜 치료제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가짜라는 게 밝혀진다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저 금발의 녹색 눈망울을 가진 여자애는 상황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가짜 치료제의 시녀로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같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알레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이 아이에게도 황궁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입을 닫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입에 침이 고였다.
알레나는 혀 아래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시녀를 구했어? 그래서 대답해주지 않는 거야?”
그럴 리가.
알레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로 해.”
“….”
“아니면 내가 싫어? 난 너 좋아해.”
그 순간, 알레나는 제 목덜미부터 귓불까지가 확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워진 그녀가 길고 탐스러운 자신의 민트빛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목덜미에 바람이 닿자 갑자기 느껴진 열감이 천천히 식는 듯했다.
“대답이 없네.”
“그게… 나도 이유를 알고 싶어. 네가 내 시녀가 되면서까지 나와 함께 하려는 이유를 말이야.”
“아… 그렇네. 역시 말해두는 게 편하겠지.”
설마 내가 좋아서라는 단순한 이유를 대는 건 아니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질 것 같으니까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그런….
헉, 만약 그렇다면 얘는 나를 여자로 좋아하는 걸까, 남자로 좋아하는 걸까.
아 물론 여자로겠지. 내가 남자인 것을 모르니.
알레나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잘 봐. 이게 내가 네 시녀로 황궁에 들어가려는 이유야.”
피노는 제 앞으로 자그마한 스툴을 하나 가져오더니 그 위로 발을 올렸다.
뭘 하려고….
“봐.”
그러더니 드레스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알레나는 황급히 제 눈을 가렸다.
코앞에서 여자아이가 스타킹을 훌훌 벗고 있었으니까.
빈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그녀는 거침없이 스타킹을 까내렸다.
“이유가 궁금하다며, 보라니까.”
도대체 뭘 보라는 거야.
제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를 벌리자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흰 다리가 보였다.
알레나는 순간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저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하체가 불편해져 버린 것이다.
아마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의상이 드레스가 아닌 꽉 끼는 바지였다면 많이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장이 이런 건 좋네. 진짜 씨….
힐끔 눈을 돌려도 그녀는 당당히 제 다리를 이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방금까지 저 여자아이의 다리가 담겨있던 스타킹은 지금은 뱀 허물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야 여자끼리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여전히 신체가 불편했던 알레나는 선 채로 자세를 바꿨다.
“하… 정말, 발목을 봐달라고 발목을.”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자, 치마를 내려서 흰 다리는 보이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의 발목이었다.
작은 기하학 무늬들이 모여, 초승달이 위아래로 화살에 꿰뚫리는 모양을 한 저것은.
“그래. 이제 이유를 알겠지? 내가 진짜 치료제야. 알레나.”
“….”
“난 네 시녀로 들어가 황자를 치료할 거야. 그게 내 목적이야.”
*
“너… 너 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타킹을 주워 그녀에게 던지다시피 건넨 알레나는, 피노의 등을 거칠게 밀었다.
“야, 아직 난 대답을 못 들…!”
안 나가려고 버티는 여자아이의 등을 떠밀어 겨우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그녀가 미련이 남은 듯, 몇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알레나는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서 알레나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곧이어 2층을 내려가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아… 하….”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했다.
크게 크게 숨을 들이켜 봐도 가슴의 답답함이 해소되질 않았다.
알레나는 오른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잡아 뜯어내듯 빼내 바닥으로 내 던졌다.
톡, 토톡, 톡… 바닥에 몸이 튕기던 은반지가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던 은반지가 바닥에 쓰러진 순간.
- 툭, 투두둑, 투둑
알레나가 입고 있던 꽉 조이는 드레스가 제가 담고 있는 자의 몸의 변화를 당해내지 못하고 하나씩 실밥이 뜯겨 나갔다.
평균 여자보다 컸던 알레나의 키는 더 커져 있었고, 어깨는 단단하게 벌어져 그 부분의 옷이 아예 찢겨버렸다.
그저 체격이 좀 좋은 편이다, 라고 여겨졌던 그의 몸은 변화 후 완전히 건장한 남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
알레나가 자랑하는 민트빛의 긴 머리는 길이가 짧아져 귀 부근에서 하늘거렸다.
그의 얼굴도 반지를 빼기 전엔 부드러운 선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변한 후엔 직선적인 느낌의 선들이 대신 채우고 있어 남성적인 느낌이 훨씬 강하게 풍겼다.
그가 아예 찢어져 너덜거리는 상의 부분의 천을 잡아 북 당겼다.
그러자 이제까지 꽉 끼는 옷 안에 조여져 있던 그의 상체가 밖으로 드러났고, 그는 한결 답답함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 똑똑
“아가씨?”
“….”
또 그 아이인 줄 알고 놀랐으나 들려온 목소리는 멘데가에서 오래 일한 하녀의 목소리였다.
왕족으로 오랜 부귀영화를 누렸던 멘데 가문은 이제 사용인들을 넉넉하게 고용하기조차 어려운 재정 상황이었다.
그렇게 떠나간 많은 사용인 중에서도 그녀는 쉽게 떠나지 않고 오래오래 그들 곁에 남아있어 준 사람이었다.
하긴 그녀뿐인가.
지금 그들의 저택에서 새로운 사람이란 없었다.
다 낡고 오래된 것.
예전의 영광을 아직도 잊지 못한 자들 뿐이었으니.
“도련님?”
그가 대답이 없자 하녀는 그를 본래의 호칭대로 불렀다.
“알렉스 도련님. 차가운 음료를 올릴까요?”
문 뒤에서 그녀가 자꾸 알렉스를 보챘다.
저러다 아버지나 형에게 그를 남자 호칭으로 부르는 걸 들킨다면, 그녀는 크게 혼이 나고 말겠지.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그를 불러댈 것 같았다.
“베리, 저택에서 날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간 또 혼날 거야.”
“하지만 저택에서라도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어디서 도련님을 부르겠어요.”
“….”
맞아, 어디서도.
어디서도 난 남자로 불리지 못하지.
그래서 가끔은 베리 당신이 신기해.
날 잊지 않고 도련님으로 기억해주는 게.
여자로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져서 나조차 내가 남자라는 걸 가끔 까먹는데 말야.
그가 짧아진 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럼 이 유모가 우리 도련님 좋아하시는 찬 음료 대령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문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소리가 들렸다.
- 난 네 시녀로 들어가 황자를 치료할 거야. 그게 내 목적이야.
진짜 치료제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 대가 없이 치료제로서 황자를 치료해주고 떠나겠단다.
동제국에 오자마자 황궁에 가는 것, 황자를 보는 것에 신경 쓰더니 목적이 그것이었나.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짜 치료제가 되어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었던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만한 상황이었다.
진짜 치료제가 없을 시의 불안요소는 모두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왜….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 불만스럽기만 할까.
저 여자애와 황궁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내키지 않는 걸까.
알렉스는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