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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51)화 (51/134)

51화

“나일 리베르 황자 전하에 대해 제가 들은 소문은, 용맹하고 자비로우시며 휘하의 자기 사람들을 소중히 아끼는 분이라, 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홀로 적진을 마다치 않는 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칭송이 가득한 황자 전하를 가까이에서 뵐 기회라 생각해 그만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

“여기까지가 프리지아 영애가 제게 적어 준 내용입니다. 전하.”

알레나가 말을 마쳤고 좌중은 죽은 듯 조용했다.

이 정도의 대답이라면 잘 마무리가 되려나… 나는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뒤틀린 음성이었다.

“영애는 나를 참 좋은 황자로 생각하고 있군. 그런데 이상하지? 이전에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들, 그날 그런 사건을 겪었으면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뀔 법도 한데. 아니 그런가?”

“….”

“그렇게 좋은 소문만 가득한 황자가 왜 자신의 궁에서 힘없는 영애가 피를 뒤집어쓰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걸까? 내가 들은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닌가. 그것이 궁금했던 건 아니고?”

“….”

“소문에 의하면 황자는 비범한 능력을 쓴다고 하던데 어째서 그날은 그리도 무능했을까. 그래서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나를 떠본 것 아닌가? 프리지아 영애.”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시종장.”

시종장을 부르는 나일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고, 어쩔 줄 몰라 땅만 보고 있던 내 등을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떠밀었다.

힘없이 등이 떠밀려 그의 앞에 선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마치 날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멸감을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고 변명을 덧붙여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긴장된 내 숨결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벙어리 영애.”

“….”

나를 칭하는 목소리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제 앞에 서 있는 내 정수리를 더듬었다.

나일의 손바닥이 내 머리카락과 귀, 볼을 차례로 더듬으며 목을 타고 어깨까지 내려왔다.

그가 치민 분노를 손가락에 담아 누르나 보다.

어깨를 꽉 부여 잡힌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가 하도 어깨를 꽉 쥐고 비틀어 잡은 탓에 어깨가 부서질 듯 저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더 이상 능력을 쓰지 못합니다. 이미 그 대가로 눈이 빠르게 멀어버렸으니까요. 한 번만 더 능력을 썼다간 저주가 악화되어 이 목숨이 꺾여버릴지도 모르죠.

눈이 먼 자도 제 목숨은 부여잡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때 당신이 그리 피투성이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한텐 내 목숨을 걸만한 가치 따위 없으니까요. 답이 되었습니까.”

“….”

물음과 함께 그가 내 어깨를 더욱 세게 짓누르는 통에 나는 바스러질 듯 몸을 떨었다.

“시종장.”

“예, 황자 전하.”

“내가 이 영애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라 명했는데 그리 하였나.”

“그것이… 아직 논의 중이던 문제라서… 송구합니다. 전하.”

“그래?”

어깨 위를 기던 그의 손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잘 되었군, 그럼 내가 지금 정해주지.”

내 목을 타고 턱밑으로 남자의 양손이 스멀스멀 모여들었다.

“윽….”

목이 졸리는 느낌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그에 의해 몸이 들려지는 탓에 나는 조금씩 뒤꿈치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죽을 죄인을 몸 성히 살려 보내라. 무능력한 황자에 의해 황자궁에서 모진 고충을 겪었으니 내 마땅히 보상해야 할 것이 아닌가.”

더는 들어 올릴 뒤꿈치가 없어 발을 허둥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목을 죄던 양손을 풀었고,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몸을 처박았다.

바닥으로 내쳐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혀 있던 목구멍으로 숨을 급하게 들이붓는 일이 다였다.

“커, 컥… 허억….”

“영애.”

고통으로 신음하는 내게 나일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이것이… 영애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동제국 황자 나일 리베르의 자비로운 모습이 아닙니까.”

“….”

“떠도는 소문 따위는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텅 비어버린 까만 눈으로 나를 내려보던 그는 이내 등을 돌렸다.

시종장이 다른 이들에게 이 상황을 정리하라는 눈짓을 보낸 후, 황자를 부축하기 위해 재빠르게 그의 옆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잔디 위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목이 아파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

“목 괜찮아?”

“어….”

마차 옆자리에 앉아 물어오는 알레나의 대답에 순순히 답했다.

나는 마차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황궁을 눈에 담았다.

“황자가 성격이 거지같다는 소문이 은근히 돌았는데 진짜였네… 그런 놈일 줄은.”

“….”

“너는 동제국 정황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내가 더 말을 잘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아니야.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알레나.”

“….”

“입을 함부로 놀린 건 나인 걸.”

마차 창을 통해 시가지의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몸에 닿자, 그의 손가락에 눌려 퍼런 멍이 들어버린 상처 부위가 시큰거렸다.

“와 이제 정말 빌론으로 가버리면 네가 다시 동제국에 올 일은 없겠네. 이렇게 나쁜 기억을 단기간에 얻어버렸으니.”

“….”

그녀는 크게 놀란 나를 위해 아무 말이라도 던져, 이 침울한 분위기가 이 이상 가라앉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차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내가 창밖만 보면서 입을 열지 않자, 알레나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오늘 내 덕분에 몹쓸 고생을 해버린 그녀인데.

안타깝게도 내겐 알레나의 상태까지 묻고 신경 쓸 여유가 남아있질 않았다.

“너 많이 무서웠지. 그날도 그렇고 오늘도.”

“아니.”

“….”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웠어.”

무서웠던 건, 이 모든 일을 영영 모른 채 빌론으로 도망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오늘의 나인 걸.

나는, 내 방에 딸린 작은 공간의 문을 부수고 나온 과거의 그를 떠올렸다.

손등에 푸르스름한 번쩍거림이 핏줄을 타고 돌아다니던 2년 전 그날의 그를.

- 이미 그 대가로 눈이 빠르게 멀어버렸으니까요. 한 번만 더 능력을 썼다간 저주가 악화되어 이 목숨이 꺾여버릴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는 나로 인해 사용해선 안 될 능력을 무리해서 썼고, 그 대가로 1년 반이나 먼저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의 그가 그 리스크를 과연 몰랐을까.

아니, 알면서도 그랬던 거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는 내 물음에 끝끝내 대답을 회피하던 그가 떠올랐다.

다 알면서 그랬던 거다.

“너 울어?”

나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재빨리 얼굴을 문질렀다.

“미안해. 네 새 친구가 좀 울보야.”

“괜찮아. 그게 뭐 이상한가.”

“나 빌론으로 안 돌아가.”

“어?”

나는 손수건을 꺼내 막힌 코를 팽 풀었다.

후아, 시원해.

“안 돌아가, 여기 남을 거야. 동제국에 더 있고 싶어졌어.”

그녀가 갑작스러운 내 선언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 변덕 진짜 심하지?”

콧잔등을 구기며 짓궂게 웃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내 결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도무지 앞에 앉은 상대방의 기분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유가 뭐야?”

“이유는….”

내가 그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야.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야.

빚을 다 청산했기 때문에 내겐 내 멋대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야.

“다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빌린 금액이 내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지 뭐야. 이제 보니까 이자가 왕왕 불어나 있더라고.”

“그렇게 큰 빚을 졌는데 어떻게 이제껏 모를 수가 있어?”

“어… 왜냐면.”

“….”

“그 빚쟁이가 나한테 갚으란 말을 안 해서.”

그 사람 자기가 멋대로 돈을 빌려줘 놓고, 완전히 까먹은 것 같아.

아니, 그냥 빌려준 사실도 모르는 것 같은데. 완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빚쟁이 아니니.

“그래서 이자가 더 불어나기 전에 갚으려고.”

“….”

나는 내 기분에 취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였고, 알레나는 묵묵히 그 말들을 다 들어주었다.

고마운 자식.

“무튼 그래서 너도 좋지? 나 안 가서.”

“그럴 리가 있겠냐.”

“왜에~ 좋잖아~”

“몰라. 모르겠어 너.”

왠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내 목을 쓸었다.

상처 부위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그치만 괜찮아, 나을 거니까.

*

저택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쌌던 짐을 다시 푸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먼저는 엄마에게 했던 말을 정정하는 일이었다.

“저 빌론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동제국에 더 있을래요.”

엄마의 얼굴 위로 떠오른 당황의 빛은 ‘여기서 제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발견했어요.’라는 말을 덧붙임과 함께 가라앉았다.

“이곳에 더 있을 생각이니? 그럼 친구에게 너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둘까 해.”

“아뇨.”

동제국에서 시간을 더 보낼 예정이지만 이곳에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새 숙소를 구해야지. 그곳에서도 오래 묵을 일은 없겠지만.

엄마는 다가와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네가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오렴. 대신 빨리 와야 한다. 중간중간 편지 보내는 것 잊지 말고.”

엄마는 셀린가의 안주인으로 이제 그만 돌아가 밀린 일을 할 참이라고 했다.

내 등을 쓰다듬는 엄마에게 파베라는 경쾌하게 말을 건넸다.

“언니 걱정 마요. 내가 남잖아.”

그렇게 모두에게 내 바뀐 결정을 알린 후, 나는 방에서 혼자 조용히 짐을 풀었다.

짐 가방 한쪽 구석에 넣어두었던 투명한 보석을 꺼내 촛불에 비춰보았다.

투명한 보석 안쪽으로 제 몸을 비집고 들어왔던 빛들이 잠깐 사이를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몸에 늘 착용하려면 어디가 좋으려나.’

귀걸이? 귀걸이가 편하긴 한데 보석이 한 개라 한쪽은 다른 보석을 써야 하니 별로인 것 같고.

반지? 반지도 나쁘진 않지만….

‘목걸이로 하자.’

목걸이로 만들어서 옷 안쪽에 감추고 다녀야지.

목에 걸면 잃어버릴 일도 없을 테고.

오늘 황자에게 피노 프리지아 영애의 이미지는 완전히 박살 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이들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원래 얼굴로는 황궁에 당당히 드나들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동제국에 남아 황궁을 드나들 생각이었다.

다른 신분, 다른 외모를 하고서 황궁에 들어가 그를 치료해 나갈 것이다.

‘그러려면….’

나는 2층에 있는 알레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 똑똑

“레나야, 나야. 피노.”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가더니 금세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민트색 눈동자가 빼꼼, 방문자를 응시했다.

“나 들어가도 돼?”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함부로 방문자를 들일 순 없지.”

그녀는 장난을 걸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장난을 얼마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진지했다.

2층 복도에 다른 이가 없는지 살핀 나는, 내가 어떻게 장난을 받아줄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알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황궁에 언제 들어가?”

“매일 가지. 나 매일 꽃 받아오잖아.”

“아니, 그 일로 말고.”

“...?”

“가짜 치료제로 언제 들어갈 거냐고 묻는 거야.”

내 말에, 알레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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