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50)화 (50/134)

50화

“아니네.”

돌고 돌아 발을 들인 곳은 또 다른 정원이었다.

정원 입구엔 이제 막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한 수국이 수줍게 피어있었다.

수국은 4월에서 5월 사이 만개하는 튤립보다 개화 시기가 살짝 늦어서, 아직 색이 물들지 않아 꽃잎이 잎사귀처럼 푸르기만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알레나가 이미 튤립을 다 받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침 내가 나온 길에서 하녀들이 도란도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연두빛 꽃봉오리를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렸던 나는 하녀들에게 길을 묻기 위해 정원을 빠져나갔다.

“거기.”

“….”

빠져나가는 내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좀 쉽사리 보내주면 안 되냐.

“와서 잔을 채워라.”

들려온 목소리는 내가 2년 전에 들었던, 그리고 3일 전에도 들었던 그의 목소리였다.

수국 정원 안쪽에서 들려온 나일의 목소리는 어쩐지 좀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으로, 이제 막 빨아서 가져가는 길인지 뽀송뽀송 새하얀 세탁물을 잔뜩 든 하녀들이 앞을 지나쳐 갔다.

저기요, 당신들의 황자님이 목이 마르신 듯합니다.

나 대신 하녀들을 부를까 잠시 고민했던 나는 몸을 돌려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저 하녀들이 나일의 명을 따르려면 새하얀 세탁물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니 방금 빨래한 보람이 없지 않을까.

굴곡진 정원 입구로 몇 걸음 들어가니 하얀 레이스보가 깔린 테이블 앞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가 제 손에 들린 크리스탈 잔을 까딱거렸다.

“몸이 굼벵이같이 느리구나.”

“….”

그의 말처럼 나는 굼벵이보다 못한 걸음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다가가 옆에 서자, 나일은 손에서 까딱거리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떤 걸 채우라는 거야.’

잔 하나에 술 한 병 있을 줄 알았더니 테이블 위는 마치 세계주류박람회를 연상시켰다.

이건 보드칸가? 이건 위스키? 꼬냑도 있네.

아주 대낮부터 골라 먹는 재미가 좋구만.

크리스탈 잔에 남은 술이 있었다면 대충 술의 수색을 보고서라도 그가 따르라는 술이 뭔지 때려 맞춰 볼 만한데, 잔은 깔끔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다.’

목소리를 내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어떤 술로 따라 드려요?’라고 물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나일의 곁으로 좀 더 다가가 그가 먹던 잔 위로 코를 들이밀었다.

- 킁킁

- 킁킁킁?

잔에는 은은한 술 향기가 남아있었다.

가만있어 보자 이게 보드카향은 아닌 것 같은데, 꼬냑이야 위스키야?

“뭐 하는 거지.”

“….”

“꼬냑이다.”

“….”

“동그란 술병.”

아, 그의 말대로 테이블 끝에 병의 목이 길고 몸통 부분은 동그랗게 생긴 술병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집어 나일의 잔에 졸졸졸 따랐다.

“하녀 중에 말을 못 하는 자가 있던가.”

“….”

“술잔이 채워지는 소리로 보아 잔 가득 술을 따른 것 같군. 황자의 술잔을 이리 가득 채우는 하녀는 이제껏 황자궁에 없었으니 너는 신입 하녀인가?”

나는 실례한다는 의미로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손등 위에 손가락으로 ‘네.’라고 썼다.

“하하… 황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에 거침이 없는 것을 보니 신참이 맞는 것 같군.”

“….”

“좀 모자란 신참이군.”

이 자식.

그가 흐릿하게 피어오른 제 웃음을 술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나는 멀거니 서서 술잔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웃음을 좇았다.

“하녀들이 황자의 몸에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고 귀띔해주지 않던가.”

어떤 마음씨가 개발새발 한 언니들이 그런 망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걸까.

그 말을 하는 황자의 말투는 퍽 담담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더 아리게 했다.

이번에도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이제는 이 행동의 의미를 알았는지 손목 부분의 셔츠를 걷어 올려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테이블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하얀 팔목 위에 ‘이미 하고 싶은 말도 건네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지라 저주가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살 위에 적어나가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그는 차분히 벙어리 하녀를 인내해 주었다.

“하하….”

싱겁게 웃어버린 그가 다시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보아라. 네가 너무 많이 따른 탓에 두 모금이나 마셨는데도 이리 많이 남아 있지 않으냐.”

서투른 신입 하녀를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내가 또 무언가를 제 팔 위에 끄적거릴 줄 알았나 보다.

아무 반응이 없으니 제 팔 쪽으로 기울었던 그의 고개가 다시 테이블 위로 향했다.

“나무란 것은 아니다. 너는 겁도 없지만 눈치도 없구나.”

나일은 두세 모금 더 술잔을 기울였다.

찰랑대도록 가득 따라던 술잔이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술잔을 채웠다.

“보지 못하는 황자와 말하지 못하는 하녀의 조합이라…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군. 황자궁의 하녀들은 만만하지 않으니 마음고생 하지 않으려면 눈치껏 행동하거라.”

독한 술병들이 가득 놓인 테이블 앞에 서 있으려니 강한 술 냄새로 코가 시큰거렸다.

이 남자 맨날 이렇게 술로 시간을 보내는 건가.

그는 말 못 하는 신입 하녀가 언제든 제 의사를 자신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팔목을 하늘을 향해 두고 있었다.

야위어 볼이 푹 패어도 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여전하구나.

나는 코를 훌쩍이며 나일의 팔 위에 손가락을 죽죽 그어나갔다.

- 죄송합니다. 황자님. 눈치가 없어 이미 잘렸습니다. 오늘까지만 일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보는 일은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그러자 그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가.”

담담히 수긍하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속으로 몇 번이나 그를 향해 목소리를 냈더니, 안에서 중첩된 대답들이 쌓여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더 이상 머물렀다간 실수할지도 몰라.

나는 반쯤 빈 그의 잔에 술을 더 채웠다.

자리를 뜨기 위함이었다.

- 보내주신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팔에 적은 내용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되었다. 가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가 대충 내가 있을 법한 위치로 팔을 휘둘렀고 그 팔에 걸려 넘어진 나는 잔디 위에 나동그라졌다.

재빠르게 내 위로 올라탔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날 제압하는 나일의 손길은 어눌하기만 했다.

더듬더듬 내 몸을 짚어나가는 남자의 손길이 수치심을 일으킬만한 부위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가 한참 만에 내 목을 찾은 후에야 품속에서 익숙한 단검을 꺼내 목을 겨눴다.

많이 보았던 예의 그 단검이었다.

“너는 황자궁 사람이 아니다. 어디서 온 첩자냐.”

참 이상도 하다.

내 눈물이란 놈은 터져 나오는 타이밍이 참 이상도 했다.

그의 손이 내 목을 겨누기 위해 어설프게 몸을 더듬을 때부터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수치심이 일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자식 사람 하나 제압하는데 무슨 시간이 이리도 오래 걸리냐.

예전에는 그래도 이리 느려터지진 않았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힘겹게 날 제압하는 몸짓을 보고 있으려니 괴로웠다.

내가 진짜 첩자였다면 너를 발로 밀어내고 충분히 도망치고도 남았으리라.

그 느려터진 행동에 속에서 성질머리가 일었다.

“으흑….”

그리고 결국 눈물이 터져 나온 타이밍은 많이 보았던 그 단검이 내 목 아래 등장했을 때였다.

목에 닿은 서늘한 날붙이의 촉감이 익숙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단검이 내 목에 닿자 목구멍 아래 들끓던 울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저주에 걸린 남자가 제 신세를 비웃으며 처량하게 혼자 술 마실 때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는데.

내 눈물샘의 취향이 참 독특하구나.

“잡히자마자 눈물부터 터트리는 첩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군.”

“….”

“어디 사람이냐. 이 황자궁의 하녀들은 하나같이 장갑을 착용하고 있지. 너처럼 맨손으로 황자를 만져대는 하녀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파베라가 준 보석이나 챙겨올걸. 멍청이.

“하는 꼴이 신입 하녀인 줄 알았더니 신입 첩자인 모양이군.”

그때,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황자 전하!”

“시종장.”

“아니 이게 무슨, 이 영애는….”

누운 채로 고개를 젖히니 3일 전 튤립 정원에서 보았던 그 시종장이었다.

“내게는 정체를 말하지 않던데 시종장이 아는 자인가?”

목에 겨눴던 단검을 내리며 그가 내 위에서 물러났다.

그와 함께 시종장의 뒤에 서 있던 인영이 불쑥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야 너…!”

노란 튤립을 품에 안고 나를 보는 알레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하 그게, 이 영애는 3일 전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혼절했던 그 영애입니다. 방금 멘데 영애가, 황자궁으로 5월의 숙녀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간 프리지아 영애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청을 하여 찾던 중이었습니다만.”

나는 내 프로필을 읊는 시종장의 말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곁에 다가온 알레나가 젖은 손바닥으로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

뭐라고 변명을 지어내야 하지.

뭐라고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야 알레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텐데.

그래야 했는데 어째선지 몸 안에 의욕도 기운도 남아있질 않았다.

내가 기운 빠진 얼굴로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나보다 알레나가 더 위급함을 느꼈나 보다.

그녀가 우왕좌왕 말을 둘러대기 시작했다.

“프리지아 영애가 그날 혼절을 할 만큼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자신도 그랬는데 그런 괴물의 표적이 되셨던 황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신지 궁금했나 봅니다.”

“프리지아 영애는 원래 말을 못 하는가.”

“아…? 그, 그건 아닌데 그 사건으로 정신적인 타격이 커서 잠시 말을 못 하는 함구증에 걸린 것 같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녀로 속이면서까지 내 안위가 궁금하셨다?”

“….”

나 대신 내 변호를 술술 해대는 알레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술술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내 손을 맞잡은 그녀의 손바닥이 긴장으로 점점 더 축축해져만 갔다.

나의 바보 같은 행동이 이 친구를 이렇게나 안쓰럽게 만들었으니 나도 뭔가를 해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펜하고 종이 든 놈이 있을 법한데.

시종장 옆에 딱 붙어 있는 놈을 보니 가슴에 펜과 종이를 안고 있었다.

다가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니, 내 요구를 찰떡같이 이해한 그가 내게 제 펜과 종이를 넘겨주었다.

알레나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충격으로 함구증에 걸렸으니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내가 할 말을 종이 위에 쭉쭉 적어 알레나에게 넘겼다.

그것을 슬쩍 본 알레나의 두 눈이 ‘이대로 읊어주면 돼?’라고 물어왔다.

그래, 이대로 읊어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

한숨을 내뱉은 그녀가 종이 위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