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후에 듣기로 나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한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며칠 묵어 조금 익숙해진 방 천장이었다.
“어떻게 황궁에 그런 괴물이….”
침대에 누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가 아직 깨어난 줄 모르는 엄마와 공작부인이 소리 죽여 소곤대고 있었다.
“모르겠어. 황궁을 다 뒤져봐도 괴물이 출입한 흔적은 없대. 그게 더 무섭지 않니?”
“그 날 있었던 특이한 일이라고는 지하감옥에 죄수 한 명이 탈옥한 것뿐이라는데.”
“왜 하필 우리 애들이 갔을 때 그런 일이….”
“프리지아 영애가 받았을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 걱정이야.”
부를 기운이 없었다.
그저 얘기를 속닥거리는 둘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때마침 두 분이 고개를 돌렸다.
“피, 피노야!”
“정신이 드니?”
엄마는 내 본명인 피비를 부르려다 순간 멈칫하고는 가짜 이름을 불렀다.
나 역시 엄마라고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셀린 부인….”
“괜찮니?”
엄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며 침대 위에 힘없이 놓여있는 내 손을 쥐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아늑함과 따듯함이었다.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알레나가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고개를 서성였다.
“부인 저….”
“응, 얘기하렴. 어디 불편한 거니?”
“집에 갈래요.”
“….”
“저 집에 갈래요. 집에 가고 싶어요.”
여기가 싫어요.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어요.
제가 어리석고 멍청했어요. 단지 상대방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나들이하듯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런 살인귀를 대적할 만한 힘도 용기도 없는 나약한 사람인데.
착각한 거다.
우연히 그를 한 번 구해냈다고 내가 뭔가를 바꾸고 이룰만한 대단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던 거다. 얌전히 그곳에 찌그러져 있었어야 했는데.
시퍼런 눈의 살인귀가 항상 붙어 있는 그를 내가 무슨 수로.
어리석음이 넘쳐 스스로를 과신하고 이리도 용감하게 이곳까지 왔구나.
“가요 집에. 부인, 빌론 왕국으로 돌아가요.”
무엇 때문에 그의 상태가 그렇게 나빠진 것인지 계속 모를래.
이런 것 따위 다 모르고 안전한 곳에 있을래.
보고 싶은 건 참을래. 계속 그럴 거야.
나는 침대 위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
5월의 숙녀인 건 까맣게 잊고 며칠간 푹 누워만 있으라는 모두의 만류에도, 나는 하루 만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하루 동안 알레나는, 마치 주군을 지키는 데 실패한 호위기사 같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 곁을 지켰다.
“자.”
알레나가 침대 위 내게 내민 것은 캐모마일이 소담하게 담긴 작은 화병이었다.
화병을 건네는 손끝에 너무 티 나게 녹색 풀물이 들어 있었다.
“너 이거 직접 꺾어온 거야?”
“봤어? 여기서 보여??”
그녀가 창가로 뛰어가더니 막 고개를 사방으로 굴려댔다.
정원에서 따왔나 보네.
“아니 너 손톱 밑에.”
“아.”
그제야 자신의 손톱 밑을 확인한 알레나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씻었는데….”
“너 은근히 사람 챙길 때 티 내면서 챙기는구나.”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티 내면서 챙겨야 똑똑한 거야. 고마워.”
“응.”
다시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앉은 알레나의 뒤로는 그녀가 오늘 황궁에서 받아온 노란 튤립 세 송이가 놓여 있었다.
“이미 꽃이 있는데 뭘 또 꽃을 꺾어왔어.”
“아 저건… 안 좋은 기억이 나게 할 수 있으니까. 꽃말도 이게 더 좋아.”
그 말을 하며 알레나가 제 등 뒤로 튤립을 쓱 치웠다.
그녀가 직접 꺾어다 준 캐모마일의 꽃말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었다.
햇님처럼 맑은 노란색 수술에, 사방으로 하얀 꽃잎이 팽팽하게 달려 있었다.
그렇네, 이미 역경에 부딪혀 보기도 전에 굴복 선언을 한 나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말도 없다 야.
‘헛된 마음.’
황자가 축사에서 마음 중에 헛된 마음은 없다고 여긴다했는데.
하지만 내게는 헛된 마음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가슴에 품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꺾여버린 마음이라면 그게 바로 헛된 마음이겠지.
“난 저 노란 튤립이 더 좋은데.”
“환자한테 주는 꽃으로는 꽃말이 별로인 거 같은데.”
“그걸 믿냐, 예쁘면 땡이지.”
“어… 그럼 이것도 화병에 꽂아올까?”
“싫어, 그럼 네가 시내 돌면서 꽃 나눠주느라 고생하는 거 못 보잖아.”
나와 그녀는 쿡쿡거리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노란 튤립보다 환하게 웃는 알레나의 얼굴이 훨씬 더 밝고 경쾌했다.
- 꽝
“우리 아기가!”
누군가 문을 부실 듯 세게 여는 바람에 문과 벽이 박치기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파베라였다.
여기가 우리 집도 아니고 불쌍한 문 생각도 좀 해, 할머니.
그녀가 걱정 서린 눈으로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침대로 바싹 달려드는 바람에, 알레나는 살짝 당황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곁에 앉은 파베라가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에구… 우리 아기 많이 놀랐다며?”
“언니 내가 놀라는 게 걱정되면 문이나 살살 열고 들어와. 그거에 더 놀랐어.”
“그 개XX, XXX… XX…”
파베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 날 행사장에 있었던 황궁의 모든 인사들 앞에 개아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거친 단어들이 처음 보는 여자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자 알레나가 누구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설명하기가 귀찮아 눈을 감았다.
“멘데 공작 영애죠? 자리 좀 비켜줄래요?”
“….”
내게 답을 묻는 알레나의 눈빛에, 파베라의 말대로 해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알레나가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둘만 남은 방에서 파베라는 목소리를 죽였다.
“걔 때문에 놀란 거라며. 2년 전에 호수를 얼렸던.”
“그냥 뭐 갑자기 괴물도 나타나고 피 냄새도 확 나고… 그래서.”
“얘, 너는 괴물 중의 괴물이랑 살고 있는데 뭘 그런 피라미들로 놀라니?”
“하핫, 그러네.”
얘, 거기서 네가 진짜 인정해버리면 안 되지, 하며 파베라는 웃었다.
“걔는? 봤어? 언니한테 돌아가자고 했다며. 벌써 가도 되는 거야?”
“….”
나일을 묻고 있는 거다.
나는 입꼬리를 당기며 애써 웃어 보였다.
“갈 생각이야.”
“그래. 네가 됐다면 된 거지. 아참… 나 너한테 줄 거 있다?”
파베라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아주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렸다.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빛의 보석이었다.
이제까지 파베라가 보여준 보석들이 다 왕방울만한 크기였던 것에 비교하면 그 보석은 새끼손톱만 해서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이 자그마한 건 도대체 뭐냐는 눈빛이네?”
“아 맞다. 언니 나 보석 다 썼어 만들어 줘.”
“그런 거야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거고. 이건 좀 많이 특별한 녀석이야. 이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네 외형과 목소리를 바꿔줄 거야.”
“헤에?”
“완전히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고 기본 네 생김새에서 살짝만 바뀌는 거야. 목소리도 톤만 좀 바뀔 테고.”
대신 착용하고 있는 동안은 착용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고 했다.
그럼 나 이거 착용한 만큼 빨리 죽어? 라고 물었더니 파베라는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더 빨리 피로해질 뿐이야.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돌아다니는 거랑 가방 들고 다니는 것 정도의 차이? 365일 24시간 연속으로 착용하는 건 어렵다는 얘기지. 잘 때 정도는 빼야겠지?”
신성한 나무의 생명력을 응축시켜 만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것 때문에 동제국에 늦게 도착했다고.
“난 사실 네가 프리지아 영애로 지내는 동안 불안했거든. 발각되지 않은 건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
“포기한 거 아닐까? 별 관심 없어졌거나.”
“그럼 좋겠지만?”
“발각되면 언니가 다 쓸어버리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하는 바람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바로 가면 되니? 난 오늘 왔는데 바로 가야 하네. 언니랑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응. 황궁에 한 번만 더 다녀오고 나서 바로 떠날 생각이야.”
“그래. 다녀올 수 있겠어?”
“응. 그럼.”
갈 수 있지.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었는걸.
*
짐 싸는 일이야 금방 끝냈고, 빌론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황자궁에 가서 5월의 숙녀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오는 것이었다.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으나, 그 대리인의 조건이라는 게 까다로웠고 원칙대로라면 물러날 때 본인이 오는 것이라 하니 나는 두말없이 저택을 나섰다.
정말 다녀올 수 있겠냐는 엄마의 물음에.
- 부인의 가르침을 받아 씩씩하답니다!
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을 올라도 적응이 안 되는 황궁의 언덕길을 올라 황자궁으로 나아가는 내 옆에는 알레나가 함께 걷고 있었다.
“빌론 왕국 놀러 가면 볼 거 많아?”
“음. 소박한 시골 정취를 좋아한다면 추천할게.”
“가면 가이드 해주나?”
“하는 거 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갈림길 앞이었다.
알레나가 튤립을 받아야 하는 장소는 황자궁 입구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나는 황자궁의 안쪽까지 쭉 들어가야만 했다.
“같이 가.”
알레나가 내 팔목을 잡아챘다.
그녀의 말은 같이 꽃 받는 거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이자는 말이었는데, 튤립 줄을 슬쩍 보니 다들 이른 시간에 나왔는지 줄이 꽤 길었다.
“됐어. 나 혼자 갈래. 넌 줄 서서 꽃 받아.”
팔을 놓아라 아이야.
그러나 알레나는 놓으라는 팔은 놓지 않고 미간만 좁혔다.
“너 길 설명은 외웠어?”
“여기서 왼왼오왼직직 1층 입구에서 3번째 방.”
“….”
“같이 움직이면 시간 두 배로 걸리잖아. 효율적으로, 각자 행동하자 우리, 애들도 아니고. 간다.”
라는 말을 하며 아직도 미간에 11이 새겨진 알레나에게 자신감 있게 외치면서 헤어졌는데.
‘어디야 XX.’
분명 왼왼오왼까지는 야무지게 잘 왔는데 문제는 왼 다음에 나온 직선 길이었다.
왼쪽으로 잘 걸어 들어왔더니 나온 곳은 세 갈래 길이었는데, 길 하나는 완전히 꺾여 있어서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머지 두 갈래가 굉장히 애매한 각도였다.
둘 다 직선도 아니고 커브도 아닌 것이….
에라 모르겠다. 두 길 중 한 곳으로 들어서 걸어가는데 건너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내가 방금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한 길에서 나와 내가 왔던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뒷모습이 호위병 같았다.
“그 친구 어떻게 됐어?”
“팔 하나가 날아갔으니 낙향밖에 더 있어? 근데 황자님이 조금 한산한 곳으로 재배치 해주셨나 봐. 감사한 일이지.”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해? 애초에 황자나 공작이나 다 괴물들인데 경비병이 필요하긴 한 거냐고.”
“어허~ 이 사람 안 되겠네. 말조심해 이 사람아!”
그는 화가 난 제 친구의 목소리가 길 위에 울리자 염려되는 눈길로 뒤를 돌아보며 주변을 살폈다.
나는 재빨리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황자님은 지금 능력을 전혀 못 쓰신다고 이 사람아. 그러니 더 열심히 보호를 해드려야지!”
“아 그래서 무너진 기강을 잡겠다고 대낮부터 다 소집해서 불려가는 중이 아닌가.”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귀를 기울였지만, 그들이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탓에 둘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능력?
황자의 능력이라고 하면 손에서 전기를 내뿜었던 그 능력을 말하는 건가?
저주가 진행되며 그 능력도 상실해버린 걸까.
나도 모르게 경비병들을 따라가려 몸을 돌려세웠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
동제국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절차를 밟으러 가는 길에 그것을 들어봤자 무엇한단 말인가.
왼왼오왼직까지 왔으니 남은 건 직선 1층 입구에서 3번째 방이었다.
나는 가던 길로 발을 돌렸다.
*
“정말 그만두신다고요?”
“예.”
“꼭 매일매일 꽃을 나눠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체력적으로 힘드시다면 이삼일에 한 번 나눠주셔도 되고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
“아… 이렇게 3일 만에 그만두겠다고 오신 일례가 없어서.”
“제가 될게요. 그만두겠습니다.”
“….”
장기고객의 해약을 막아야만 하는 통신사 직원이라도 빙의했는지, 황궁 사무원은 나를 끈질기게 회유했다.
이득 될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잡아대지?
설마 접수비를 많이 내서 그런가.
여하튼 간단히 말만 하면 될 줄 알았던 5월의 숙녀를 관두는 일은 장장 30분을 잡아먹었고, 황궁 사무원과 했던 말을 반복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약도는 새하얗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3번째 방을 나와 꽃내음 풍기는 건물 1층 입구에 선 나는 머릿속으로 길을 떠올려 보았다.
‘반대로 가는 길이니까 직직오왼오오로 가면 되려나. 맞겠지?’
뭐 해지기 전까지만 황궁을 나가면 되지 않겠니.
나는 가볍게 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