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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8)화 (48/134)

48화

진행자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좌석에 앉아 있던 100여 명과 주변인들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박수갈채 소리가 제 목소리를 숨겨줄 것을 알고 있는 귀족 영애들이 빠르게 귓속말을 속삭여 댔다.

“뭐야, 완전 실명했다고 들었는데?”

“치료제 계속 못 찾아서 죽을 날 받아놓은 거 아녔어?”

“그럴 리가, 황자라고는 한 명뿐인데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았겠지.”

“야, 황자 상태가 안 좋아서 황제 황후가 늦은 나이에 늦둥이 가져보려고 밤마다 애쓴다던데?”

“영애 경박하게 무슨 말을 그리 하세요. 어머 진짜 호홓홓.”

“어차피 황자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는 거 아냐? 실 권력은 후페이 공작가가 계속 쥐고 있는데.”

“근데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내 앞줄과 뒷줄에서 속삭이는 소리들이 다 들려왔다.

단상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에겐 들리지 않겠지.

못된 말을 내뱉는 여자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나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일은 많이 말라 있었다.

화려한 정복 차림에 달린 장신구들이 시선을 교란시켰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그가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햇볕이, 단상 위에 중요한 인물이 올랐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단상으로 쨍한 빛을 내리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완전히 실명했다는 것을 두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강한 햇살 아래서, 그는 마치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눈 한번을 찡그리지 않았다.

편안하게 뜨였다 감기는 남자의 두 눈을 보는 일이 내게는 고역이었다.

“너 괜찮아?”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있자, 알레나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어왔다.

“어. 괜찮아. 눈이 너무 부셔서 그래.”

“이쪽 봐봐. 모자챙 햇빛 비치는 쪽으로 모양 잡아줄게.”

“아냐. 됐어. 저거 듣자.”

“….”

그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황자 앞에 설치된,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법이 걸린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고 있었다.

지직거리던 소리가 끝나자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봄이 돌아왔네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축사가 시작되었고, 좌중은 숨죽였다.

너무나 수척해진 외관과 다르게 2년 만에 들은 그의 목소리는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튤립 향기를 타고 그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동제국의 나라꽃인 노란 튤립의 꽃말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헛된 마음입니다. 동제국을 세우며 초대 황제가 정한 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초대 황제가 동제국을 세울 때 무슨 정신 상태였던 거냐, 실연당한 상태에서 동제국을 세웠던 거냐, 이런 농담을요.”

그 말에 좌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계속 잠잠히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색 튤립은 다 긍정적인 의미의 꽃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빨간 튤립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고, 분홍 튤립의 꽃말은 애정과 배려이니까요. 아마 제가 초대 황제였다면 분홍 튤립을 나라꽃으로 정했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나라꽃인 노란 튤립보다 여러분에게 더 환영받았을 것 같군요. 그러나….”

그가 부는 바람에 날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나 저는 노란 튤립의 꽃말인 헛된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헛된 것을 마음에 품을 수는 있지만, 마음 중에 헛된 마음은 없다고 여기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언젠가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맙니다. 그 마음이 헛될 리 없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마음도 무언가를 이룰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노란 튤립의 꽃말 따위는 생각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꽃을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담아 꽃을 나눈다면 전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황자가 축사를 끝냈고, 시작보다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에 대한 몹쓸 추측들을 쏟아내던 영애들의 반응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축사 내용 되게 긍정적인데? 치료제 찾은 거 아냐?”

“하나뿐인 황자잖아, 황궁에서 뭐라도 시도하고 있겠지. 근데 얼굴이랑 목소리 합 너무 좋다.”

“어. 그러니까. 왜 저주 같은 게 있어서….”

그 말을 끝으로 황자는 단상 위에서 몸을 돌렸다.

그 빈자리를 재빨리 진행자가 올라와 채웠다.

“축사를 끝으로 튤립을 나눠드릴 겁니다. 원래 이 순서는 황자 전하께서 진행해주셨지만, 올해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XX 백작님이 맡아 진행을….”

단상 우측에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로 노란 튤립이 가득했다.

진행자의 안내에 좌석에서 일어난 5월의 숙녀들이 우측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와 줄 너무 길다. 천천히 일어날…? 야!”

알레나가 옆에서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내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일어나 그가 있는 단상 왼쪽으로 향했다.

언제 실명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예상대로 황자는 완전히 실명했다.

그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의 왼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뭘 하려고?

어차피 실명했으리라는 건 빌론 왕국을 출발할 때부터 알고 있었는걸.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실명 시기가 소설과 달라졌는지, 달라졌다면 무엇 때문인지였다.

지금 다가가 봤자 그 두 가지를 알 길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뒤를 쫓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

더 가까이서 얼굴을 한 번만 봤으면 좋겠어.

저렇게 황폐해진 얼굴로 어떻게 그렇게 밝은 내용의 축사를 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어.

작년 행사엔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면서 올해는 왜 나온 건지 알고 싶어.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래서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물론 하나도 물을 수 없겠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가까이에 당도해 있었다.

그를 옆에서 부축하던 시종이 가까이 다가선 나를 발견하고 놀라 멀리 서 있던 경비병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시종이 움직임을 멈추자, 덩달아 멈춰선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

“어떤 영애가 가까이 다가온지라.”

“목적을 말하라.”

“….”

그와 나의 시선이 비껴갔다.

나는 나일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지만, 그의 시선은 내 귓가 어딘가로 비켜 지나갔다.

“왜 말이 없지.”

“….”

“어허, 황자 전하 앞입니다.”

2년 전 들었던 내 목소리를 그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아무 핑계나 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목소리를 내면 정체를 들킬까 두려웠다.

“계속 말을 하지 않으면 경비병을 부르겠습니다.”

“시종장.”

“예, 황자 전하.”

“영애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지.”

“어, 그것이… 매우 슬퍼 보입니다. 전하.”

그의 눈동자가 자리 둘 곳 없는 허공에서 흔들렸다.

대충 제 앞에 서 있는 자의 시선이 어디쯤 있겠거니 추측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이다. 무슨 사정인지 듣고 살펴 보내도록 하라.”

“예. 전하.”

그 말과 함께 그가 내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어? 어어… 어!!”

벌어진 입으로 말을 더듬으며 시종이 나를 가리켰다.

끝난 거 아니었나? 황자는 이미 등을 돌렸는데. 무슨 변명을 요구하는 건가?

그때, 영애들이 몰려있던 우측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다시 보니, 시종의 커져 버린 눈은 내가 아닌 내 뒤를 향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상황이야.”

시각을 쓰지 못하는 나일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종에서 물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버벅거리는 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저, 전하… 피….”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악어?’

그건 마치 몸통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얼굴에는 악어 머리를 잘라다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기가 멀리서도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 거대한 생명체가 따스한 봄날의 꽃밭을 뛰어오고 있었다.

이질적인 풍경에 넋을 잃었다.

내 뒤로 도착한 경비대가 황자를 뒤로 세우고 창을 곧추세웠다.

“야 노랑머리!!!”

민트 머리가 날 부른다.

처음 보는 저 괴물이 줄곧 향하는 방향은 황자가 있는 쪽, 즉 내 쪽이었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쭈그려 앉아 머리를 손을 감쌌다.

촤악, 하는 물벼락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뜨겁고 진득한 액체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렸다.

손을 내려 확인하자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생생한 피였다.

코를 찌르며 들어온 짙은 피 냄새가 뇌까지 타고 올라온 것 같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몸이 휘청거려 쭈그린 상태에서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손바닥에 느껴지는 것은 까슬까슬한 흙바닥이 아닌 미끌미끌하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생명줄이 끊어진 것 같은 파충류의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목 부분이 날카로운 얼음 창에 꿰뚫린 것이 사인인 모양이다.

뚫린 부분으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날 바라보며 몇 번 껌벅거리던 파충류의 눈은 뜨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올라오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게워냈다.

“우욱.”

고여 있는 괴물의 피 위로 내 속에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건 아침에 먹었던 토마토 껍질 같은데….

더 짙은 붉은 피 웅덩이 위에 쏟아낸지라 토마토 껍질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쓰레기 같은…!”

뒤에서 누군가가 핏대를 세우며 화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이라고 있는 것들이.”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후페이 각하.”

이 목소리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을죄지.”

그 말과 함께 또다시 최악 하는 소리가 보는 앞에서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날아온 긴 원통형의 무언가가 내 이마를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사람의 잘려나간 팔이었다.

이미 괴물의 피를 뒤집어쓴 내 이마를 타고 이번엔 사람의 피가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뒤집어쓴 건지, 턱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고여 내 주변으로 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거 무슨 블러드버킷 챌린지라도 되냐?

왜 사람한테 자꾸 피를 뒤집어씌우지?

“네 죄에 비교하면 너무 가벼워서 웃음이 나는 처사군. 황자 전하를 제대로 경호하지 못한 대가다. 시끄럽게 만들면 나머지 한쪽 팔도 잘라달라는 요청으로 알겠다.”

잘려나간 팔을 보며 경비병은 이를 악물며 제 비명 소리를 안으로 집어먹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사람 몸에 붙어 있던 팔이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입도 벌리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면 인중 위를 흐르는 핏물이 입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감이 생생해 미칠 지경인데 미각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고개를 쳐든 곳에 은발에 벽안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의 시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오금이 저렸다.

“이 영애에겐 민폐를 끼쳤군. 시종장. 제대로 보상하도록.”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나는 고개를 꺾었다.

그건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이 아니었다.

실수로 엎질러진 휴지통을 본다는 듯, 짜증 섞인 무감한 눈이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간 파충류 괴물의 눈보다 저 눈이 더 무서웠다.

바닥을 짚은 두 팔이 벌벌 떨렸다.

“누가 다친 건가?”

황자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지만 고개를 들어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니, 부상자는 없다. 피가 조금 튀었을 뿐이야. 들어가자.”

“무슨 상황이야.”

“들어가면서 설명할게. 가자.”

멀어지는 소리를 엎드려 듣고 있는데 곁에 누군가 다가와 내 몸을 감쌌다.

숙이고 있는 내 얼굴 옆으로 민트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부는 봄바람에 흩날려 내 볼에 닿았다 떨어져 나간 민트빛 머리카락엔 사람의 피가 묻어있었다.

“괴물은 죽었어. 안심해도 돼. 가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일단 집으로 가자. 가서 쉬자.”

그녀의 말에 내가 대답을 했는지, 고개라도 끄덕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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