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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7)화 (47/134)

47화

식사를 끝마친 후, 방에 있기 갑갑했던 나는 가벼운 숄을 어깨에 걸치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밀고 나가자, 마침 내 방문을 두드리려던 저택의 하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이 든 하녀였다.

“지금 이 시각에 어딜 나가시게요?”

“아. 산책을 좀 할까 해요.”

하녀는 자신이 들고 온 트레이 위에서 작은 컵 푸딩을 하나 집어 내게 내밀었다.

“추가 후식이랍니다.”

“우와.”

저녁 식사 때 후식까지 먹었는데 자기 전 추가 후식이 또 있다니.

“산책하면서 먹으면 딱이겠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컵 푸딩을 받아드는데 하녀가 내게서 의외의 사람을 찾았다.

“혹시 도련님 보셨나요?”

“…?”

하녀가 왜 이 집 도련님을 내게서 찾을까.

“오늘 두 분이 친해지신 것 같아….”

“아….”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하녀는 무언가를 혼동하고 있는 듯했다.

“착각하신 것 같아요. 제가 오늘 대화를 주로 나눈 건 멘데 영애라서… 멘데 소공작님과는 인사만 몇 마디 나눈 게 다랍니다.”

“에, 에구머니나. 제가 말실수했네요. 아가씨라고 한다는 것이 도련님이라고… 나이가 들면 이렇답니다. 용서하십시오.”

“뭘요. 후식 잘 먹을게요.”

나이 들면 그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뭘 저렇게 고개를 조아릴까.

그 모습이 은근히 불편했던 나는 가려던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늘한 4월 말의 밤공기는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발에 폭신하게 감기는 잔디를 밟으며 정원으로 나아가는데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어두운 밤에도 은은하게 빛나는 긴 민트색 머리카락을 보니 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 식사도 그렇고 이 푸딩도 그렇고 너희 집 음식은 다 왜 이렇게 맛있는 거냐구 물어봐야지.

알레나는 건물 모퉁이에 등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그녀의 몸 일부가 아주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이것은 살금살금 다가가 놀래켜주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XX, XXX”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알레나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다가가 말을 걸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침 푸딩도 다 먹었으니 들어가 잠이나 청해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을 때였다.

“너 실실 웃더라?”

“….”

비꼬는 어조의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그 목소리가 저녁에 잠깐 인사만 나누었던 이 집 아들의 목소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네 역할을 제대로 하란 말이야~”

“해.”

저녁 식사도 살풍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집 남매 사이는 더 살풍경하구나.

남매 사이가 보통 안 좋다고는 들었지만 저렇게 험악한 분위기가 평균인가?

저런 분위기에서 등장했다간 매우 뻘쭘해질 것이다.

“왜 그 프리지안지 뭔지 걔가 마음에 들어? 아주 사이가 좋더라?”

“….”

“그러다 들통 나면 알지?”

문득 들려온 내 이름에, 한 발 한 발 신중히 옮기던 발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을 때.

여전히 주변이라곤 전혀 의식하지 않는 첫째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의 몸에 있다는 저주의 문양.”

“….”

“입수했다. 이제 치료제가 되어 들어갈 일만 남은 거야. 행동 조심해라.”

흡.

그 말에 나는 숨도 멈춘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

방 침대에 누워 오늘 저 남매에게 들었던 말들을 조합했다.

- 왜 너도 가짜 치료제에 관심 있냐?

- 저주의 문양을 입수했다. 치료제가 되어 들어갈 일만 남은 거야.

낮에 알레나는 가짜 치료제가 뭐냐는 내 질문에, 치료제가 하도 나오질 않으니 의술이나 신성력이나 치료제를 대체할 만한 것들을 통칭하는 이야기라고 얼버무렸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진짜 치료제를 대신할 가짜 치료제를 만들어 황궁으로 보낼 셈이야.’

황자의 몸과 내 몸에 있는 저주의 문양은 같은 모양이다.

나는 왼쪽 발 복숭아뼈 부근에, 나일은 허리에 문양이 있다.

내가 그를 구조했을 때 그 문양을 본 것처럼,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일이 자신의 몸에 있는 문양을 남에게 보일 일은 없겠지.

하지만 황자의 하녀들이라면 허구한 날 볼 것이다.

위치가 어디인지, 어떤 모양인지 다.

중요한 정보이기에 황자궁에서도 하녀들을 단단히 입단속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입단속을 한다고 해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언제나 확실하게 막을 수 있던가.

이런 고위 귀족 가문에서 거금을 들여 하녀를 매수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의 딸을 치료제로 들여보낼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빌론 왕국에까지 붙인 벽보를 봤을 때, 치료제가 되면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민들 기준에서 어마어마고, 귀족들에게도 뭐 하찮은 금액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런 짓을 벌일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치료제가 평민 중에서 나왔을 때랑 귀족 집안에서 나왔을 때 보상이 다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아닌가.

어차피 나야 치료제의 운명을 알고 있어서 안 들어가는 거지, 평민이고 귀족이고 치료제의 운명을 모르는 다른 이들이 보기엔 가짜라도 만들어서 들여보낼 만큼 좋은 기회인가? 아 머리가 아파졌다. 

자자. 질문만 이어지고 답은 안 나오잖아,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그럼 나 대신 걔가 죽게 되는 건가?’

알레나가 치료제로 둔갑해 들어가면 이 소설에서 피비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건데.

게다가 치료제 역할을 한다 해도 가짜니까 나일은 치료도 안 될 텐데 그럼 애먼 사람만 하나 죽어 나가는 거 아니냐고.

피비는 진짜 치료제라서 치료라도 됐으니 나일이 다 나을 때까지 살아있기라도 했지.

알레나는 치료도 안 될 테니 가짜인 거 바로 들통 나서 바로 목 댕강 하는 거 아냐?

또 모른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역할에 부여된 것인지, 인물에 부여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만약 역할에 부여된 비중이 크다면 알레나가 죽을 확률은 높겠지만, 죽음이 나라는 인물에 부여된 거라면… 어쩌면 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 자체가 달라지면 괜찮지 않을까?

방 천장에 낮에 ‘사고 싶어?’라고 묻던 알레나의 수줍어하던 얼굴이 보였다.

“….”

아냐 신경 쓰지 마.

외쳐 남의 목숨, 외쳐 남의 인생.

크게 외쳐 내 목숨 크게 외쳐 내 인생!

“으아아아아!!”

나는 이불을 뻥뻥 차댔다.

아니 쟤들은 정신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왜 정원에서 저딴 개 중요한 비밀을 막 말하냐고!!

내가 알아 버렸잖아!!

겁나 신경 쓰이잖아악!!

*

이튿날 아침, 먼저 나와 황궁 가는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알레나가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

적어도 일곱 시간은 자야 하는 수면 타입의 인간이, 앞날에 대한 근심으로 두 시간을 자고 나면 이런 얼굴이 된단다.

“신경 꺼라.”

무뚝뚝한 내 말에도 그녀는 밝게 응수했다.

“오늘부터 황궁 왔다 갔다 하려면 바빠질 거야. 동제국 오자마자 축제 시작이라 어디 놀러 가지도 못 했네. 꽃 나르는 거 매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날 잡아서 놀러 가자.”

“됐어.”

“너 어제 접수비로 다 내서 돈 없어서 안 나가려는 거지? 내가 다 사줄게. 가자.”

그녀가 자꾸 내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니다. 나 돈 있는데 안 나가는 거니까 너나 가라.”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데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거든. 근데 축제 기간엔 확실히 더 한적해. 지금이 가기 딱 좋아. 유명 관광지는 아니고 나만 아는 장소인데 그래서 더….”

하아.

정말 무시하려고 했는데 왜 자꾸 친한 척하는 거야.

시선은 창 너머에 둔 채, 알레나에게 물었다.

“너 노는 거 좋아해?”

“넌 싫어해?”

“몇 살까지 놀고 싶어?”

“오래오래?”

“그럼 그거 하지 마.”

“뭘?”

나는 그때서야 알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제, 가짜 치료제 하지 말라고.’

“뭘 하지 마?”

“….”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빙의자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을 나만 안다는 사실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우쭐하게 했고 그래서 좋았다.

실제로 좋은 건 맞지.

딱히 필요가 없어서 안 하고 있지만, 뭐가 돈이 될지 어떤 사업이 뜰지 큼직한 것들을 알고 있는 나는, 마음만 먹으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을걸?

그렇지만 그런 거 다 몰라도 좋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누군가가 죽을 거란 사실이 아니라 앞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질 거란 사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말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건 같았겠지만 기분은 아주 많이 달랐을 텐데.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냥 좀 피곤하네.”

“아… 하긴. 너 어제 보니까 그것 좀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팔다리가 진짜 후들후들하더라. 네가 토할 것 같다고 내 어깨에 손 올렸을 때 진짜 토하는 줄 알고 얼마나….”

그녀가 걸어오는 친근한 그 모든 말들이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얘 가짜 치료제로 혼자 황궁에 들어갔다간 죽을 텐데.

허나 지금의 나는 이 아이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어떤 방안도 가지고 있질 않았다.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있어. 곧 나일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알레나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행사 장소는 황자궁 뒤편에 있는 후원이었다.

후원이라길래 작고 비밀스러운 정원을 생각했지만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이동한 곳에는 너른 튤립정원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튤립정원 한가운데 단상과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자를 따라 행사를 위해 모여든 100여 명의 인원이 튤립 꽃밭 사이를 걸었다.

한껏 꾸민 미인들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꽃밭을 걷는 모습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근데 인원이 이게 다야?”

접수 줄이 그렇게나 길었던 것에 비하면 뽑힌 인원이 적다고 의문을 표하자, 알레나는 신분이 귀한 순, 돈 많은 순으로 추려낸 인원이라며 총인원은 훨씬 많다고 말해주었다.

이곳에 모인 인원은 대부분 귀족이며 그렇지 않은 평민의 경우 대단히 많은 기부금을 낸 이들이었다.

심지어 평민들은 접수비도 귀족과 달랐다.

귀족들의 접수비가 3골드였던 것에 비교해 평민은 10골드였다.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튼 튤립 향이 너울거리는 꽃밭 사이를 걷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노란 튤립만 가득할 거라 생각했는데, 튤립 꽃밭엔 다양한 색상의 튤립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나와 알레나의 신분을 확인한 안내자가 단상을 기준으로 두 번째 줄에 있는 좌석으로 손짓했다.

“네가 접수비 많이 내서 우리 좀 앞이다?”

“아 그래?”

야 돈 쓴 보람이 있다.

그녀가 짓궂게 웃으며 착석했고 나는 따라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사실 5월 축제의 핵심은 5월의 여왕을 뽑는 행사여서 오늘 모임은 그저 5월 축제 기간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사전 행사일 뿐이었다.

그래서 5월의 여왕을 뽑는 행사에는 황제나 황후가, 오늘은 황자가 축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황자가 축사를 진행한다는 말에 내가 대번 반색하는 모습을 보이자, 알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너 이거 하는 목적이 설마 황자야?”

“어.”

“왜?”

“나 피폐한 서사 가진 남자가 취향이거든.”

“….”

“이해 못 하겠으면 지나가고.”

속닥대는 와중에 진행자가 단상 위로 올랐고 행사를 시작했다.

행사는 평이하게 흘러갔다.

자기들이 그럴싸하게 부여한 5월의 숙녀의 의미라든가, 5월의 여왕을 뽑는 기준을 설명한다든가 하는 일반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그 지루한 내용을 찬란한 봄 햇살 속에서 듣고 있으려니 점점 눈이 풀려갔다.

“일어나. 이제 축사야. 너 황자보고 싶다며.”

“어디? 어디 어디?”

졸다 일어난 내가 두리번거리다 쓰고 있던 모자를 떨어트리자, 알레나가 모자를 주워 다시 씌워주었다.

“이제 곧.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왜? 안 나온대?”

“작년엔 안 나왔을걸. 황자궁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황자가 모습을 안 비춰서 말이 좀 있었던 거로 기억해. 올해는 모르겠다.”

안 나오면 뭐 내가 황자궁을 뒤지고 다니는 수밖에 없지.

근데 작년엔 왜 안 나온 걸까.

재작년 봄이면 실명 전이었고, 작년엔 완전히 실명해서?

그러나 황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단상 뒤에 있던 하얀 커튼이 쳐진 원두막 같은 곳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시종이 들어 올린 하얀 커튼 안에서, 다른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쨍한 햇살 속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그를 자세히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좌석에서 엉덩이를 떼자, 알레나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왜 그래?”

“아냐.”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깨물어대는 나를 옆에 앉은 알레나가 이상한 눈길로 보는 것 같았다.

“나일 리베르 황자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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