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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6)화 (46/134)

46화

4월 중순부터 말까지, 약 2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신청을 받는 탓에 5월의 숙녀 접수 줄은 마지막 날인데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졌다.

그 줄의 중간쯤, 나란히 선 나와 민트 머리는 긴 놀이기구 대기 줄에 서 있다 지쳐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심심하지만 옆에 있는 민트 머리는 그다지 날 좋아하지 않으니 말을 걸기가 뭐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다양하게 예쁜 언니들이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는 거다.

예쁜 언니들은 옷도 참 신경 써서 입고 온지라, 그것 역시 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빨간 머리, 파란 머리, 분홍색 머리.

주황색 눈, 연두색 눈, 회색 눈.

프릴, 레이스, 양단, 공단, 명주, 시폰.

누군가는 작은 키가 콤플렉스인 듯 길게 내려온 드레스 밑으로 다른 이들보다 높은 하이힐을 착용 중이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내 옆에 선 민트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멘데 영애는 입이 거칠어서 그렇지 그것만 빼면 참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접수처엔 꽤 많은 수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멘데 영애는 그중에서도 흔치 않은 독보적인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지니고 있었고, 평균보다 큰 키를 가지고 있어 긴 줄에서 혼자만 머리가 우뚝 솟아 있었으며, 작은 얼굴 안에 큼직한 이목구비가 빡빡빡 들어가 있었다.

예쁘다는 느낌과 잘생겼다는 느낌을 동시에 풍기는 그녀의 얼굴은 솔직히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옆에서 물끄러미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날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뭘 봐.”

“너 예쁘다. 예쁘고 잘생겼어, 잘생겼는데 예쁘고.”

민트 머리가 기가 찬다는 눈빛을 쏘았다.

“수작 부리지 마라, 노랑머리.”

얘도 참 반응이 한결같다니까.

“우리가 앞으로도 사이가 좋을 것 같진 않지만, 딱히 거짓말할 필요는 못 느끼는데. 왜 솔직한 나를 거부하는 거지?”

칭찬해줘도 지X이야.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민트 머리가 밉지 않았다.

뭐 하나 좋게 받아들이는 게 없고 짜증은 있는 대로 내고 표정은 늘 오만상인데….

오히려 상대방이 저러니까 나도 딱히 가식적으로 웃거나 내숭 떨 필요가 없어서 그런가?

밉고 싫다기보다는 편안했다.

난 네가 편하고 꽤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님은 저랑 잘 지낼 생각이 없나요? 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야, 저기 봐.”

“꼴에.”

이제 막 도착해 맨 뒷줄에 선 언니들이 명백하게 비웃는 눈초리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옆에 서 있는 멘데 영애를.

줄을 일직선으로 선 게 아니라 U자로 선 터라, 어느새 접수대 코앞까지 와 있는 우리와 그 언니들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민트 머리의 어깨너머로 그 언니들을 흘끔 보았다.

딱 봐도 부내 나는 언니들이었다.

다만 그 부내라는 게….

둘 중 한 명은 굉장히 비싸 보이는 금색 천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비싼 건 알겠는데 그 느낌이….

명절 때 어르신들 드릴 선물 포장용으로 쓰면 좋을 법한 금색 보자기 느낌이라.

역시 돈이 많다는 것은 옳은 선택을 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는 것뿐이지 반드시 옳은 선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앞의 저 경우가 그랬다.

무튼 그녀들의 드레스를 보아하니 과시욕이 넘치시는 분들이라는 사실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멘데 공작가 탈탈 털리지 않았나?”

“접수비 낼 돈은 있나 몰라.”

과시할 수 있는 것들엔 재물도 있지만 인품이나 고운 말씨 같은 것들도 있는데.

저분들은 금색 드레스를 입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의 없음을 까발려 자신들을 높여 보이고 싶은 듯했다.

내 말에 한 번도 지지 않고 퉁명스레 말대꾸를 잘만 하던 멘데 영애가 입을 다문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화가 나지.’

민트 머리 너 사람 차별하냐.

왜 쟤들한텐 눈 안 부라리냐, 나한텐 막 부라렸으면서.

“접수하시겠습니까?”

우리 차례였다.

붉은 천이 덮인 책상 앞에 앉은 접수원이 고개를 들어 우리의 의사를 물었다.

“…네, 알레나 멘데입니다.”

민트 머리가 나직이 대답했다.

“옆의 분도 접수하시나요?”

“네, 피노 프리지아입니다.”

날렵하게 펜을 휘둘러 이름을 받아 적은 접수원은 책상 위로 손바닥을 보였다.

“접수비 각각 3골드씩 주시면 됩니다.”

민트 머리의 오른손에는 금화 세 닢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접수원의 손바닥 위로 오른손을 내밀기 전에, 나는 민트 머리가 눈치채도록 그것을 쓱싹 훔쳤다.

“…?”

비어버린 그녀의 오른 손바닥에 갈색 주머니를 쥐여 주며, 당황해서 날 쳐다보는 민트 머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거스름돈 없으니까 너 들고 있던 3골드 나 주고, 이걸로 네가 내거랑 네거 같이 내.”

그 말에 민트 머리가 제 손에 들린 갈색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안에서 조약돌 같은 게 만져지니 영 신뢰가 안 가나보다.

그녀가 불신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나쁜 거 안 시켜 잔말 말고, 자꾸 뻗대면 공작부인한테 꼰지른다.”

“….”

“접수비 3골드씩 주셔야 한다니까요? 접수비 없어요?”

달라는 돈은 안 주고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자, 접수원이 나보다 살짝 앞에 서 있는 민트 머리를 재촉했다.

그 말에 민트 머리가 허둥지둥 갈색 주머니를 조였던 끈을 느슨하게 풀자, 좌라라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 위로 내용물이 떨어졌다.

“….”

“….”

형형색색 화려하고 큼지막한 보석들이 붉은 천이 깔린 책상 위를 굴렀고, 어떤 것들은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눈앞에서 수십 개의 보석이 굴러떨어지자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어… 이걸… 이걸 다 접수비로 내시는 건가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의 접수원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민트 머리는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대뜸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말하기 어렵다면 내가 할게.

“네, 다요. 싹 다. 멘데 공작 영애가 다 내겠다고 가져온 거라. 5월 축제가 성황으로 끝마치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답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접수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보석들을 주워 담았다.

그러자 조용했던 뒤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땅에 떨어진 거 하나만 내도….”

“저게 다 얼마야.”

“황실에 다 털린 줄 알았는데 역시 왕가라 그런지 다르네. 아직도 저렇게 남아있네.”

바닥에 떨어진 보석까지 주워서 모든 보석을 책상 위 한곳에 모은 접수원은 다시 민트 머리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거 다 내시는 거죠?”

“…어, 그게….”

나는 민트 머리의 허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이른다.”

“….”

그제야 민트 머리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놨다.

“네, 조, 좋은데 써주세요.”

그렇게 접수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금색 천 드레스의 언니는 민트 머리를 보며 바들바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민트 머리가 그 언니를 보며 눈을 흘기는 모습은 나를 은근히 만족시켰다.

*

황궁에서 마차가 주차된 곳까지 이어진 언덕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등산할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내 손엔 노란 튤립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이제 며칠 후 5월이 되면 황자궁을 들쑤시고 다녀도 되는 것이다.

‘이걸 손에 넣었으니 나일을 곧 볼 수 있겠군.’

그래도 웬만하면 공작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피해 다닐 방법이 있으려나….

2년 전 호수에서 목소리는 들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질 못했다.

분명 잘생겼을 테지만 실제로 보면 너무 무서울 거 같아.

“야, 노랑.”

“어?”

언덕길을 올라갈 때처럼 내가 뒤처지든 말든 혼자서 척척 걸어 내려갈 줄 알았는데, 민트 머리는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걷고 있었다.

“너 나 싫어하지 않아?”

“당연히 싫어하지, 초면에 반말 찍찍 날리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저 말은 근데 아까 왜 그랬어, 라는 말이겠지.

“근데 너보다 쟤네가 더 싫은 걸 어쩌겠어.”

“….”

“아~ 난 왜 이렇게 세상에 싫은 사람이 많냐. 이러다 나중에 식인 식물처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뭐야?”

“알아서 좋을 거 없는 내용이야.”

“그 라울 호수 말하는 거 아냐?”

“너도 알아?”

“거기 마수 유명해!”

그 호수의 유명한 마수가 오늘 너의 접수비를 냈단다.

“너 아까 낸 거 여행비용을 몽땅 쓴 거 아냐?”

“아 맞아, 다 썼어.”

파베라 오면 또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대신 네 호감을 샀잖아.”

“뭐??”

“네 호감. 아니야? 못 샀어?”

“….”

옆을 보니 민트 머리가 아까완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 샀나 보네.

“사고 싶어?”

그녀가 수줍게 물어왔다.

이미 산 것 같은데 뭘 물어.

*

그날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은 인원은 총 6명이었다.

멘데 공작과 공작부인, 멘데 공작가의 아들 데이빗과 딸 알레나, 그리고 엄마와 나.

그들 중 식사 분위기를 시종일관 이끄는 이는 공작부인과 엄마였다.

멘데 공작부인은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재잘거렸는데 목소리가 워낙 좋고 잔잔해서 듣기가 좋았다.

낮에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 이야기에 미소로 화답하는 엄마를 보는 것도 좋았다. 

“프리지아 영애는 어때요?”

공작부인이 갑자기 내게 시선을 두며 음식 맛을 물어왔다.

“셀린 백작부인께서 동제국 요리는 맛이 없어서 여행 올 때 비상식량을 준비해가야 한다고 농담을 하셨는데 여긴 동제국이 아닌 거 같아요. 너무 맛있어요.”

“어머나. 프리지아 영애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하네요. 그건 멘데식 조리법으로 요리를 해서 그럴….”

“흠.”

멘데 공작이 입은 다문 채 묵직하게 코로 숨을 내뿜었다.

저게 언짢음의 표시라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눈치 못 챘을 리 없는 공작부인은 급히 말을 끊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를 굴려 식탁을 한번 훑었다.

아들 데이빗은 아무 반응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고, 공작부인과 알레나는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흐음. 가족 분위기가 좀 살풍경하네.’

“아참, 여보. 오늘 알레나가 5월의 숙녀를 신청하고 왔대요.”

“그래. 잘했다.”

“예.”

잘했다는 말인데도 알레나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 비어가는 내 그릇과 달리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엔 아직도 음식이 가득했다.

뭔 고기를 쥐똥만큼 작게 썰어 한 조각 한 조각 입에 밀어 넣는 모습이 이 아이의 현재 기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풀이 죽어 대답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기에 눌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을 그녀의 불행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무엇 때문일까.

상대방이 들여다 봐주길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라면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맞는데도, 나는 그 아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빙의하고 경제적으로 살만해지니까 오지랖만 늘어나나 보네. 나.’

나는 알레나의 그릇 위로 내 그릇에 있던 구운 가지를 한 조각 넘겼다.

그리고 상대의 그릇 위 쥐똥만 하게 썰려있는 고기 한 점을 포크로 푹 찍어 내 그릇으로 옮겼다.

그러자 알레나가 뭐하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우와 맛있당.”

고기를 씹으며 주변 이들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이자.

“하ㅎ….”

알레나가 소심한 실소를 터뜨렸다.

아주 사소한 장난이었기에, 그 모습이 누군가의 신경 줄을 건드렸으리라고는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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