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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5)화 (45/134)

45화

“너라면 할 수 있잖아.”

“….”

물잔을 다시 협탁에 내려놓은 나일은 제 팔을 들어 올려 로건 쪽으로 손날을 보였다.

손끝까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제 손을, 그는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양 눈앞에서 휘저었다.

“손끝을 얼려서 날카로운 얼음 칼날을 만든 다음, 내 목에 박아 넣어.”

말을 하며 나일은 다른 한 손으로 제 목부터 어깨까지를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걸쳐져 있던 화려한 로브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가 드러난 제 목과 어깨를 로건에게 내보이며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자.”

“….”

나일의 한쪽 어깨와 가슴에는 마치 그을음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들이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 얼룩을 바라보자, 서로의 몸을 휘어 감는 뱀들처럼 자국이 꿈틀거리는 착각에 빠질 것만 같았다.

투명한 푸른 눈으로 제 친구를 바라보던 로건은 얼굴을 돌렸다.

“더 못 들어 주겠군.”

더는 못 있겠어.

로건은 문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그의 부츠가 발을 옮기느라 소리를 냈을 때, 그곳을 향해 물잔이 날아왔다.

- 쨍그랑

로건의 옆을 스쳐 지나간 유리잔이 벽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어딜 가, 내 말 안 들려?”

“제국 너머까지 방방곡곡 전단을 붙였어. 소식이 있을 거다.”

나일이 손으로 허공을 짚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로건은 위태위태한 그 모습을 말없이 눈으로 좇았다.

보이지 않는 터라 발을 잘못 디뎠고, 순간 나일의 몸이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빨리 무릎을 굽힌 로건이 나일의 몸을 부축했다.

“해줘.”

“….”

“동제국 최초로 자살한 황자보다는 살해당한 황자라는 타이틀이 더 나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보다 살해당한 게 황제 황비님 체면에도 더 나을 거다.”

“하….”

로건이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등신같이 구네.”

“하라고!!”

로건은 제 품에 안겨 비명을 지르는 나일을 손에서 놓았다.

돌아선 등 뒤로 자신을 부르짖는 친구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

내가 탄 마차는 상점가 및 여타 관광 거리를 싹 지나쳐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멘데 영애가 정말 관광 안 하고 그냥 가도 나중에 아무 말 하지 않을 거냐며 자꾸 의심했지만, 그러라고 냅두고.

오히려 바로 황궁으로 직행하게 되어 나는 더 좋았다.

내 목적은 언제든 룰루랄라 할 수 있는 관광이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면 황궁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 곳에서 마치를 세워야만 했다는 점이었다.

동제국 황궁은 해발고도가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경사도도 크진 않았지만 그건 사람 기준이고 마차로는 불가능한 경사였다.

마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다른 마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 구두를 신고 오르막길이라니, 이런 지형이 있다는 걸 알고도 쟤는 나한테 관광 안 하고 갈 거냐고 물은 건가?

멘데 영애의 말대로 관광 후에 왔다면 여길 오를 체력 따위는 내게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멘데가의 둘째는 10분 후까지만 생각이 가능한 뇌 구조를 가진 것인가.

도대체 마음에 드는 게 눈곱만큼도 없는 애라고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데, 멘데 영애는 보폭이 얼마나 큰지 퍽퍽 걸어서 이미 저만큼이나 나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녀가 홱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야 안 오냐? 너 길 잃으면 나만 골치 아파, 바짝 따라오지 않고 뭐하냐?”

전직 왕녀라더니, 왕녀의 커리큘럼엔 체력강화 프로그램이 잘 짜여있는 게 분명했다.

“야이….”

간다고.

아니꼬운 녀석의 얼굴에다 욕을 해주려고 해도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비통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팔다리는 죽었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있으니까.

눈빛만으로 제압해버리겠다 이 재수 없는 놈.

“킥… 야 그런 팔다리면 달아 놓은 의미가 있냐?”

“….”

한심한 꼴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나를 비웃은 멘데 영애가 다시 몸을 돌려 팍팍 걷기 시작했다.

파베라 할머니 언제 오려나, 나 청부 살인할 건수가 하나 생겼는데.

*

“허억… 헉….”

마지막에는 거의 시종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다시피 올라온 나는 황궁 입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야 노랑머리 적당히 헉헉대라, 너 촌사람인 거 티 나니까. 나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니, 그녀의 말대로 정말 숨 차 하는 사람은 나 한 명뿐이었다.

동제국 귀족들은 다 체력이 어마어마하구나.

괜히 강대국 놈들이 아니야 이거.

“노랑? 야… 민트, 헉… 다 온 거 맞지?”

“어. 황자궁은 여기서 금방이야.”

“하아….”

동선을 잘 짜서 헛걸음하지 말고 나일을 빨리 만나 확인해야지, 이거 황궁을 몇 번 더 방문하면 원하지 않게 건강해져 귀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다리가 휘청거려서 그만 민트 머리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말았다.

“야 노랑. 이 손 뭐냐.”

“뭐긴 뭐야, 나 여기서 쓰러져서 창피해지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 토할 것 같으니까.”

그 말에 민트 머리는, 제 어깨에 장수말벌이 올라가 있는 듯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저렇게 끔찍해 하는 표정으로 견디고 있다니, 귀엽기도 하지.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로건 후페이 알아?”

“모르는 사람도 있냐?”

하여튼 얘는 질문을 하나 하면 곱게 답해주는 경우가 없어 정말.

하지만 나는 답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기에 곱게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여기서 로건 후페이 공작을 마주칠 가능성을 확률로 말해봐라.”

민트 머리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80퍼센트?”

“파….”

팔십 퍼센트요?

“너 제대로 계산한 거 맞아? 너 수학 못 하지?”

왕녀 커리큘럼에 죄다 체력증진 시간만 있고 수학은 없었던 거 아냐?

멘데 영애는 아주 진저리나 죽겠다는 표정이 되어 날 내려다보았다.

“아닌데, 맞는데. 후페이 공작은 자기 저택보다 황자궁에 더 자주 출몰한다던데.”

어휴 이 두 놈들.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아주 끔찍한 사랑을 하고 계셨구만.

하긴 저주로 괴로워하는 수가 황자궁에 있으니 공이 여길 자주 들락거리는 게 당연하고도 남을 일이지.

“후우우우우.”

나는 들숨을 배꼽까지 밀어 넣었다가 날숨에 길게 빼냈다.

공작을 만날 확률이 80프로라니.

혹 만나더라도 쫄지 말자,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을뿐더러 그는 내 존재 자체를 모르니까.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속으로 되뇌며 날 진정시켰다.

“뭐하냐 도대체.”

“심호흡 처음 보냐. 내가 촌사람이라 좀 긴장이 돼서 그런다. 너도 해볼래? 그 까칠한 성격 죽이는 데 도움이 될지도?”

“….”

깊게 숨을 내쉬며 계속 피에 깨끗한 산소를 공급하고 있자 민트 머리가 인상을 구겼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등에 붙어서 잘 따라와, 커서 길 잃기 딱 좋으니까.”

“야 그럼 안 되지. 나 길 잃으면 공작부인한테 네가 나 버렸다고 이른다. 나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민트 머리카락이 싱그러운 그녀는 벙찐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5월의 숙녀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줄이 이렇게 긴 걸까.

나는 단일 성별만으로 구성된 긴 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민트 머리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이 녀석 한번도 인상을 안 쓰는 일이 없으면서도 나름 또 설명은 열심히 해준다.

동제국 나라꽃이 노랑 튤립인 건 아느냐.

튤립은 귀한 품종이라 황궁에서 주로 재배하기 때문에 평소 황궁이 아닌 곳에서는 튤립을 보기 힘들다.

그런 튤립을 황궁 밖에서도 볼 수 있는 게 노란꽃축제 기간이다.

5월의 숙녀가 되면 황궁에서 하루에 몇 송이씩 노랑 튤립을 나눠주고, 5월의 숙녀는 황궁 밖으로 튤립을 가지고 나가, 동제국 수도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노랑 튤립을 선물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보수는 얼마야?”

돈 되게 많이 주나 봐.

그러니까 그런 귀찮은 일을 나서서 하겠다는 언니들이 저렇게 많은 거겠지.

내 간단한 질문에 민트 머리는 너 이제껏 설명 제대로 들었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겠냐. 다들 5월의 숙녀가 되어 많은 귀족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란 말이야.

동제국 각지에 거점을 둔 귀족들이 모두 수도로 모여드는 시즌이니까. 그리고 5월의 숙녀 중에서 5월의 여왕을 뽑는데, 거기 뽑히면 명예로운 일이라 다들 하고 싶어 한다고.”

“하….”

이 망할 놈의 결혼이 개중요한 세계관.

그러니까 결국 결혼을 잘 하고 싶어서 다들 이 무료봉사에 너도나도 지원한다 이거지?

튤립을 받아가려면 매일 황궁에 얼굴도장을 찍어야 하고, 그러려면 나는 저 미니 등산을 매일 해야 하고, 받은 튤립을 황궁 밖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면 또 하산을 매일같이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와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

“황궁을 몰래 돌아다니다 잡히면 어떻게 돼?”

“젊은 나이에 죽고 싶냐? 그 팔다리면 얼마 살 것 같지도 않지만.”

이 예쁘장한 친구는 말은 더 예쁘게 한다.

예뻐서 팔다리를 꺾어버리고 싶은데 쓰레기 같은 내 몸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이해했어. 그럼 중간에 그만둘 수는 있어?”

민트 머리는 매번 그딴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답을 안 해주고 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있어. 사정이 생기거나 하면 가능하지.”

좋아. 중도 포기가 가능하다면 해볼 만했다.

어차피 내 팔다리로 저 언덕길을 등산 하산을 반복하다 보면 내 몸뚱이가 휘청거리는 순간이 있을 거고, 그럼 나는 넘어져 팔이 부러지든 다리가 부러지든 할 테니 

망할 5월의 숙녀인지 봉사인지를 끝까지 하게 될 일은 없을 거란 얘기였다.

“무튼 5월의 숙녀를 하는 중에는 황자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거지?”

“물론. 그래도 못 가는 구역이 있지만 대부분은 갈 수 있을 거야.”

좋아 좋아.

5월의 숙녀가 되면 가슴에 5월의 숙녀임을 증명해주는 브로치를 달아준다고 하니, 그걸 달고 돌아다니다 나일을 확인 후 때려치우면 될 일이었다.

“좋아. 나 할래. 가자, 신청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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