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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4)화 (44/134)

44화

앞서 걷는 그녀를 따라 마차로 향하는데, 여자는 나보다 키가 한 뼘 이상 컸다.

여린 민트빛 컬러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나도 모르게 그녀가 가냘픈 체구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마차 앞에 선 그녀가 시종의 도움도 없이 마차에 올랐다.

여긴 원래 그런가? 생각하며 뒤따라 마차에 오르려는데, 내 앞으로 시종이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자 멘데 영애는 이미 한쪽 구석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창밖을 감상 중이었다.

좁은 마차 안에서 나랑 머리카락 한 올 닿기 싫다는 듯 창문 옆에 딱 붙어 앉아있는 모양새였다.

상대방이 그걸 원한다면야.

나도 딱히 처음 만난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의 바람대로 대각선 창문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 다각다각다각

타운하우스 메인 거리는 저택가가 몰려있는 블록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급 저택과 그 앞에 주차된 화려한 마차들뿐이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잘 정비된 돌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다였다.

‘황자궁에 어떻게 들어가지?’

호랑이를 보아야 하니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할 텐데, 동제국에서 황궁 출입을 쉽게 허락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난 빌론 왕국 사람이니 외부인이기까지 해서.

동제국 현지인과 함께 있으니 질문 좀 하고 싶어서 내 대각선에 앉아있는 멘데 영애 쪽을 슬쩍슬쩍 보았지만, 불어오는 것은 시베리아 기단이었다.

어우 추워, 인간 냉각기가 따로 없네.

“너….”

“…?”

“사람을 왜 힐끗힐끗 봐? 기분 나쁘게.”

민트색 인간 냉각기께서 기분이 나쁘시단다.

아 예~ 이 촌구석에서 온 사람은 원하시는 대로 눈도 입도 닫고 있겠습니다,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아니 근데 나도 슬슬 짜증이 나네.

내 눈 내가 사용하겠다는데 무슨 불만이야 도대체.

그리고 방금 깨달았는데 얘 말도 짧네?

지금 나한테 반말 찍찍 갈긴 거 맞지?

“야… 민트.”

“…?”

“너 나한테 돈 줬냐?”

“뭐?”

“내가 그쪽 창문 밖을 볼 권리를 너한테 팔았냐고. 내가 이쪽을 보든 그쪽을 보든 뭔 상관인데 네가.

내가 나오자고 했어? 안내하는 게 싫었으면 네가 거절을 했으면 될 거 아냐.”

“….”

호오, 민트색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당장 내 머리를 바닥에 메다꽂고 싶다는 표정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던 민트색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쟤한테 질문해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 나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빌론 왕국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지.”

“아마?”

내가 알기로 자잘한 침략 시도가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빌론 왕국이 양옆의 서제국과 동제국에게 아양을 떨어 극복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넌 네 나라의 역사도 모르냐?”

“내가 무슨 역사책이냐… 대답했잖아, 아마라고. 그러는 넌 잘 아나 보다.”

“잘 알지….”

비 온 뒤라 날씨가 습했다.

마차 안의 분위기도 점점 눅눅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왕국의 마지막 혈통이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에 복속된.”

“….”

앞에 앉은 여자애가 급 청승을 떠는 바람에 나도 입이 꾹 닫혔다.

서로 위로를 바라고 또 위로를 건네기엔, 우린 오늘 처음 보는 사이라 효과가 떨어진단 말이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말이 공작가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속은 텅텅 비었어. 그래서 난 어머니 말씀 거절 못 해. 아직도 마음 아파하시니까.”

“….”

“그러니까 노란 머리 너는 알아서 기분 좋게 혼자 구경하다 잘 마차로 돌아와라? 어머니께는 내가 잘 구경시켰다고 말하고.”

왜 청승맞은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목적이 명확했던 거로군.

그러니까 도착해서 각자 행동하다 얌전히 마차로 돌아오잔 소리였다.

“아~ 왜 불필요한 얘기를 꺼내나 했더니 날로 먹겠다는 얘기네?”

날로 먹으면서 뒷마무리까지 거짓말로 그럴싸하게 해주길 바라는 심보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도 딱히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인간이랑 붙어서 시간 보내길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리됐네, 그럼.”

“야 민트 머리, 근데 하나만 묻자.”

창밖 풍경이 어느새 하나둘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상점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거의 목적지에 도착한 듯했다.

“동제국 황궁, 아니 황자궁에 들어갈 수 있어?”

내 말에 그녀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왜 너도 가짜 치료제에 관심 있냐?”

“가짜 치료제?”

“아니다.”

아니긴 뭘 아냐, 뭔가 겁나 있어 보이는데.

알려달라는 눈빛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멘데 영애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뭐냐니까, 치료제면 치료제지 가짜 치료제도 있어?”

“…치료제가 하도 나오지 않으니까, 황궁에서 의술이나 신성력이나 치료제를 대체할만한 다른 방법도 찾아보는 중이라는 얘기야.”

뭐야, 별 얘기도 아니구만 왜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대.

어차피 치료제를 대체할만한 다른 방도는 없다.

원작 소설에서 이것저것 시도를 했지만 결국 모두 소용이 없었다는 구절을 읽었으니까.

나는 흥미를 잃고 민트 머리가 어서 본래의 내 질문에 대답해주길 기다렸다. 

“아무튼, 노란꽃축제 기간엔 5월의 숙녀를 뽑는데, 행사를 주최하는 곳이 황자궁이라 그 기간엔 외부인한테도 황궁이 열려있어.”

“5월의 숙녀가 뭔데?”

민트 머리가 자신이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냐는 눈빛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어디 먼 대륙 출신도 아니고, 빌론 왕국 사람이면 동제국 축제쯤은 다 꿰고 있지 않나?”

“너 아까 패권주의를 부정적으로 얘기해놓고, 지금은 강대국 입장에서 약소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너 지는 거 싫어하지.”

“지는 것보단 사람을 가릴 뿐인데.”

“….”

“….”

입을 꾹 닫고 볼을 부풀리던 민트 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진짜… 그럼 그냥 날 따라와, 아는 것도 없는 애가 황궁을 누비게 방치했다가 욕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

로건은 황자궁의 3층 복도를 걸었다.

외벽에 난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로건의 그림자를 길게 눕혔다.

제국과 황가가 늘 운명을 같이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래된 동제국에서 리베르 황가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동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었다.

때문에 황자의 방으로 향하는 긴긴 복도 내내, 전대 황태자들의 초상화가 길게 걸려있었다.

로건이 신고 있는 검정 부츠의 둔탁한 뒷굽이 대리석 바닥을 울려대자, 제복을 갖춰 입은 수비병들이 그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황자의 방이 있는 복도 끝에 다다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색을 표하는 얼굴이었다.

“고해.”

“…공작 각하 그것이….”

“알겠으니까 고해.”

단호한 로건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식은땀만 흘리던 시종이 목을 가다듬었다.

“로건 후페이 공작이 나일 리베르 황자 전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황자방 문에 대고 시종이 큰 목소리를 냈지만 안에서는 들이라는 답이 없었다.

적막한 복도를 시종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로건의 눈치를 보랴, 문 너머를 신경 쓰랴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시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 후페이 공작 각하… 황자 전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시어….”

“….”

그를 물리려는 시종의 말에 잠자코 서 있으니 안쪽에서 사람의 대화 소리가 문틈으로 삐져나왔다.

- 너 금발인가?

- 눈동자 색은 어떻지?

- 말해보아라.

대화라기엔 남성의 일방적인 물음만이 주로 들려왔다.

“황자 전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내 더 전하를 뵈어야겠다.”

달달 떠는 시종의 옆으로 로건의 팔이 쑥 지나갔다.

로건이 멋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지만 그를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발을 들이는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코를 찌르는 사향 냄새였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사향이 방 안에서 진동했다.

로건이 보일 듯 말듯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방 중앙에 놓인 커다란 캐노피 침대 안에서 황자의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캐노피에 쳐진 커튼 때문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선 금발의 여성만이 기에 눌려 울 듯한 모습이었다.

“화, 황자 전하… 제, 제 머리 색은….”

울먹이며 말을 하는 여성에게로 침대 안에서 커다란 쿠션이 날아와 그녀의 몸통을 맞췄다.

“그 목소리가 아닐 텐데.”

“…저 그, 그게….”

눈물을 쏟기 일보 직전인 여자를 향해 로건이 눈짓했다.

이만 나가라는 신호였다.

로건에게 고개를 조아린 여자가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아… 내 친우님께서 또 나를 훼방 놓으시는군.”

“그만해라.”

“….”

“지겹다 너 이러는 거.”

침대 커튼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로건은 침대 곁에 놓인 소파로 다가갔다.

소파가 있는 각도에서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일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나일의 얼굴에서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소파에 몸을 의탁하니, 나일이 고개를 로건 쪽으로 틀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온통 어둠뿐일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잡히는 것 하나 없으니 동공 가득 차 있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다.

그 두 눈에 잠시 시선이 붙들려 있던 로건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찾아라.”

“….”

“네가 찾는 건 이 세상에 없어.”

“그럼 이 세상에 뭐가 있는데.”

“2년이다. 없어.”

“왜... 찾아봤자 보지도 못할 거면서 찾아대는 게 우습냐?”

로건은 목구멍으로 답답한 울분을 삼키려 했지만 못내 다 삼켜내지 못하고 일부분을 토해냈다.

“아… 맞네, 너 보이지도 않잖아? 그 여자가 네 옆에 서 있어도 뭐 하나 보지도 못할 텐데 왜 등신같이 포기를 못 하지?”

“하하… 내 오랜 벗님께서는 말이 참 곱기도 하시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나일의 빈 동공엔 화도 슬픔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이 로건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했다.

“이제 5월이다. 적어도 황자궁에서 해야 할 것들은 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뭘 뽑으란 거냐? 네가 해라.”

“이러니까…!”

“….”

조용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나일이 근처 협탁에서 더듬더듬 물잔을 찾아 들었다.

몇 모금 물을 삼킨 그가 입을 열었다.

“야 로건 후페이.”

“….”

“내 목 좀 베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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