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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42)화 (42/134)

42화

“아저씨!”

강렬하게 눈을 부릅뜬 여자가 거칠게 사과를 내던지며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오자 아저씨는 좀 겁을 먹은 듯했다.

“왜… 왜?”

“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뭐, 뭐를?”

“황자님 얘기요!”

“아~ 동제국 황자님이 실명했다는 거?”

실명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실명한 게 1년 반 전이라구요?”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되묻자, 아저씨는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했느냐는 표정으로 제 광대를 긁었다.

“그랬… 지. 아니 근데 그게 왜?”

“확실해요?”

“….”

말을 하며 괜스레 왼쪽 발의 복숭아뼈 부근이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치료제의 문양을 발견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

생겨난 지 일주일이 맞을 것이다.

등 같이 씻을 때조차 스스로 보기 어려운 곳이 아닌 맨날 보는 발이었으니까.

원작 소설에서 황자가 실명하는 시기와 피비의 몸에 치료제의 문양이 나타난 시기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 원작대로라면 황자는 1년 반 전이 아닌 이제 막 실명했어야 옳았다.

“확실하냐구요. 출처가 어디에요?”

에이 아니겠지.

소문이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와전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빌론 왕국이다.

동제국 황실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란 말인가.

1년 반 전, 황자가 단지 시력이 많이 나빠졌을 뿐인데 그것이 부풀고 부풀어 실명까지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추… 출처는 내 친군데 왜! 동제국까지 운송업을 하는 놈한테 들은 거야!”

“그 친구분 동제국 황실까지 직접 물건을 대나요? 직접 본 사실이래요?”

“어… 아 몰라! 내가 그렇게까지 알 게 뭐야!?”

나는 몸을 뒤로 빼는 아저씨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아저씨 과일 뭐 좋아하세요? 저 돈 많은데 제가 왕창 사드릴게요. 사과? 바나나? 멜론? 과일 먹으면서 저랑 얘기 좀….”

“아 이 아가씨가 왜 이래!”

“아, 아저씨!”

아저씨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어 줄행랑을 쳤다.

과일 싫어하시나.

내 발치엔 내가 아까 놀라 떨어트린 한 입 먹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

프리지아 자작가의 내 방은 1층에 위치한데다가 정원 쪽으로 창이 나 있어, 이런 봄이면 꽃향기가 너울너울 창을 넘어 들어왔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꽃봉오리에서 덜 익어 살풋한 꽃내음이 풍겼다.

방으로 들어온 하녀가 창가에 앉은 나와 파베라 앞으로 생딸기가 가득 담긴 그릇을 내려놓았다.

“자.”

내가 평소와 다르게 창밖만 보며 과일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파베라가 포크로 딸기를 콕 찍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딸기 맛있네, 봄이다 봄.

“왜 더 안 먹어? 딸기 맛없어?”

“아니 맛있는데?”

“그럼 고민 있는 거네?”

나는 그 말에 파베라에게로 몸을 돌려 앉아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내려놓았다.

“할머니… 저주가 가속화되기도 해? 저주로 인한 병증이 갑자기 악화된다거나.”

“동제국 걔?”

“….”

이 무서운 할머니는 눈치가 장난 없다. 900년 세월은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내가 딱 걸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주로 제일 유명한 애가 걔 아니니? 네가 아는 애 중에서도 그렇고.”

“응, 맞아. 그 사람 얘기야.”

파베라가 딸기 한 개를 입에 톡 털어 넣었다.

“피비야. 감기만 걸려도 사람마다 다 달라, 회복되는 시기도 그렇고 누구는 엄청 앓다 일어나고 누구는 걸렸는지도 모르게 지나가지. 저주도 마찬가지야.”

“더 자세히 말해줘, 할머니.”

“음….”

그녀는 기억을 되짚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라울 호수 안에 있을 때라 잘 모르겠는데, 현 황제도 저주에 걸렸다가 치료된 거잖아. 같은 저주지만 황제랑 황자도 시기나 증상이 조금씩 다를걸.”

“근데 할머니 사람 간 차이 말고, 저주로 인한 증세가 갑자기 악화되는 건 뭐야?”

“뭐….”

“….”

“저주도 결국은 사람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건강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다거나 하면 그럴 수 있겠지?”

그럼 2년 전 호수에서 날 감싸다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란 건가.

“….”

진짜 그렇다고 해도 어쩔 거야.

거기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뻔히 아는데, 동제국 황실로 쳐들어가서 내가 치료제요 날 쓰시오. 할 거야 뭐야.

“하….”

난 빚 갚았어.

나도 그를 구했잖아.

서로 한 번씩 구해줬으니 더 청산할 빚은 없는 거라고.

“한 번 가서 확인해보지그래?”

그 말에 나는 딸기를 입에 와구 구겨 넣다 말고 파베라를 쳐다보았다.

“어딜.”

“그 남자애 있는 곳.”

“내가 왜.”

대답하며 양 볼에 딸기를 가득 넣고 씹었다.

한 개 먹었을 땐 맛있었는데 여러 개 넣고 씹으니까 딸기는 좀 시었다.

“애기야 너 말해봐 봐. 2년 전에 그 남자앨 왜 구했는데?”

“음… 우정?”

파베라 할머니는 정말 자기 감정표현에 솔직한 사람이다.

나를 예뻐하는지라 평소에는 늘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면서 이럴 때는 사정없이 비리다는 표정을 짓는다.

“음… 할머니에겐 없는 인간애? 내가 파베라랑은 다르게 좀 선한 인간이잖아.”

“후자는 맞는데, 전자는 틀렸네.”

“….”

“너 어제 선본 남자 얘기는 왜 한마디도 안 해? 2년이나 지난 놈 얘기는 고민고민하다 털어놓을 정돈데, 어제 만난 남자 얘기는 왜 한 마디가 없어? 인간애? 잘 생각해보렴. 아가야.”

“….”

저 무서운 식물 같으니.

아가라고 불러대면서 말은 채찍질 수준이야. 아가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릇에 아직도 딸기가 수북했으나 더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 방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피비야.”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엄마였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내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꺼냈다.

그리고 부인이 내 옆에 앉았을 때 방문은 또 열렸다.

“우리 딸~”

아빠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작을 보는 엄마의 눈은 도끼눈이 되어 있었다.

“아니 당신? 여기 어떻게 온 거예요?”

“어떻게 오긴? 마차 타고 왔지.”

“그게 아니라 저택을 지켜야지 여길 오면 어떡해요?”

그 말에 백작은 자못 서글픈 눈을 했다.

“부인! 왜 자꾸 나를 두고 혼자만 여길 오는 거요. 집에 맨날 나하고 래빌 밖에 없거나 나 혼자 있어!”

“그럼 저택에 있는 사람이 다 오면! 의심할 거 아니에요. 피비가 여기 있는 거 들통나게 하고 싶어요?”

“그럼 돌아가면서 와! 당신이랑 래빌은 맨날 오면서 왜 나만 집 지켜!”

- 똑똑

세 번째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백작의 친우인 프리지아 자작이었다.

“아 이 양반아 뭐해~ 이리와 나랑 술이나 먹어~ 자네가 거길 왜 껴들어.”

“술 먹으면 배만 나오지 먹어서 뭐해!”

아빠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프리지아 자작이 안 나가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빠를 끌고 나가자, 세 여자만 남은 방은 그제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 딸, 루벤 소남작은 어땠어?”

다시 산뜻한 표정을 되찾은 부인이 어제의 맞선남을 물어왔다.

“잘생겼고 착한 것 같긴 한데 음….”

“그래, 엄마 이해했어.”

말끝을 흘리자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오늘 이곳을 찾아온 본론을 꺼내셨다.

“엄마 한동안 동제국에 가 있을 거야.”

“동제국이요?”

동제국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 나를, 파베라가 음흉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엄만 동제국 출신이잖니? 엄마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는데, 멘데 가문의….”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동제국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셀린가의 외아들을 만나 빌론 왕국으로 온다.

그리고 비슷하지만 조금 이른 시기에 엄마의 친구분은 멘데 왕국의 왕자비가 되어 멘데 왕국으로 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왕비가 아닌 공작부인이 되어 있었다.

멘데 가문도 원래는 자치권을 가졌던 작은 왕국의 왕족이었으나 동제국의 끊임없는 정복 전쟁으로 이제는 동제국에 복속된 가문 중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 멘데 왕비에서 멘데 공작부인이 되어버린 친구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공작가면 큰 문제는 없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생각에 불과했다.

기존 혈통이 왕가였던 탓에 복속되며 공작가의 지위를 얻긴 했지만,

공작이라는 허울 좋은 지위만 빼면 동제국에 복속되며 황가에 재산을 거의 몰수당한 탓에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원래부터 동제국의 고위귀족으로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왔던 기존 세력에 비교하면, 동제국에 복속되며 공작가나 백작가로 지위가 강등당한 가문들의 영향력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웠다.

“친구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너무 우울증이 심해 보여. 1, 2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엄마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가서 놀아주게!”

“언니 나도!”

부인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은 파베라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몇백 살 어린 동생한테 언니 소리가 참 잘 나오는 게 신기했다.

“피비는 어때? 엄마랑 베라 언니랑 같이 놀다 올까?”

“저는….”

가족들이 동제국에 갔던 건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안 간다고 고개를 저었었는데, 이번에는 선뜻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니 쟤가 가겠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제국 얘기만 나오면 싫어하잖아요.”

내 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 파베라는 입술을 오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게.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아, 그 집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첫째 아들이 굉장한 미남이란다. 이런 걸로 우리 피비가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그니까요.”

엄마와 파베라는 재미있다는 듯 서로 눈을 맞췄다.

“하… 어머니.”

“응?”

“멘데 첫째 아들이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어머 그건 왜?”

직접 가서 내 눈으로 확인만 하고 돌아오자.

그에 대한 소문이 정말 맞는지, 상황이 어떤지.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왜 원작이 틀어졌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가요. 저도 갑니다. 가서 보게요. 얼마나 잘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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