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프리지아 영애는 정말 환하게 웃으시는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앞에 앉은 남자의 칭찬에 의무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빌론의 동북부는 봄에도 자못 날씨가 쌀쌀했다.
카페 테라스로 내리쬐는 봄볕이 아니었다면 제법 추웠겠는걸, 생각하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볼레로를 끌어 올렸다.
셀린 백작의 친분으로 동북부에 자리한 한 자작가의 딸로 신분을 위장 중인 나는, 신분을 위장 중이면 어떠하냐 좋은 시절 다 가기 전에 선이나 봐라, 하는 백작의 바람대로 이 자리에 나와 온순히 앉아있었다.
아빠한테 다른 건 안보니 외모를 일 순위로 따져달라고 요청했는데 잘 반영된 것 같았다.
“제가 기계적으로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입니다. 웃으실 때 주위가 다 환해지는 기분인걸요.”
“그런가요… 루벤 소남작님도 웃음이 멋지신걸요.”
그가 먼저 건넨 칭찬에 대한 응대이기도 했으나 나 역시 반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나를 보며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밥을 먹고 함께 이 카페까지 오면서 느낀 예의 바름이나 순한 성격까지.
그는 좋은 신랑감이 분명했다.
동북부는 빌론 왕국의 중앙인 수도에 근접해 있던 셀린가와는 살짝 다른 분위기였다.
겉핥기식으로만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몰라도, 바쁘게 움직이는 수도 사람들보다 한결 여유롭고 한적해 보였다.
앞에 앉은 이분도 그랬다.
따듯하고 넉넉한 분위기의 남작가에서 잘 자란 순박하고 바른 청년 같은 느낌.
나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좋은 첫인상을 심어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마음이 평온할까.
훤칠한 남자가 내 앞에서 호감을 드러내며 웃고 있으니 가슴이 설렐 법도 한데, 어째선지 내 마음의 풍경은 사하라 사막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나 설레고 싶은데…!
가슴이 막 쿵쾅쿵쾅 지진 났다 무너졌다 하고 싶은데…!
왜 이리도 반응이 없는 것이야!
“그렇게 봐주시니 기쁩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떨구며 눈웃음 지었다.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 옆으로 눈물점이 찍혀있었다.
‘그 남자랑 똑같은 위치네.’
황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눈가에 찍힌 눈물점부터 보였는데.
눈 근처에 점 찍힌 사람이 내 취향이었던 건가.
그를 떠올리자, 파노라마처럼 그가 보여주었던 다양한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년이나 지났는데도 떠오르는 표정들이 다 선연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얼룩덜룩 흙먼지 묻은 얼굴로 눈 감고 있던 것부터 시작해서…
“….”
잠시 나일을 떠올렸던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테이블 위에서 예쁘게 빛나고 있던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렸다.
잔을 입에 대고 기울이자, 상큼한 아이스티가 흘러들어와 입안을 적셨다.
“와 이 아이스티 너무 상큼해요.”
“그렇죠? 여기 음료 만드는 분이 실력이 아주….”
선본 남자가 입에 맞아 다행이라며,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며 즐겁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응하며 의식적으로 크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다고 한들, 소설의 주인공만큼 잘생겼을까.
나일과 잠깐이었지만 한 방에서 매일매일 얼굴 보고 지냈던 시기를 보내서 그런가.
그래, 그 얼굴을 매일 보고 살아서 그런 거다.
난 이제 웬만한 잘생김엔 면역이 생겨버린 거야.
‘젠장… 평범한 잘생김에도 가슴 설레고 싶다고… 이러면 너무 비효율적이 되어버린다고.’
그놈 때문에 핸섬함에 대한 역치가 너무 올라가 버렸으니 이제 일상에서 두근거림을 찾긴 다 글렀다.
점점 메말라갈 내 가슴이여.
안 돼.
안 돼 안 돼.
메마른 일상, 두근거림 없는 일상 반대야 나는.
“우리 일어날까요?”
“…?”
“재밌는 거 하러 가요. 흥분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 하러 가요, 우리.”
내 말에 놀란 기색을 하던 맞선남이 기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
내가 선본 남자를 끌고 온 곳은 마상경기장이었다.
훤칠남 앞에서도 가슴이 뛰지 않으면 어쩔 수 있나.
다른 거로 뛰게 해주고 훤칠남 때문인 것처럼 착각하면 되지.
‘흔들다리 효과를 동원해서라도 오늘 1설렘을 하고 만다 내가.’
때마침, 내가 돈을 잔뜩 건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쓴 기사가 결승전을 준비 중이었다.
‘아오, 심장 떨려.’
양쪽에서 두 기사가 출발선에 서자 왁자지껄하던 좌중이 일순 숨을 머금었다.
마상 경기장의 관중석은 발 디딜 곳 없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지금 마상경기는 대륙을 휩쓸며 인기몰이 중이었다.
제국 간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직한 기사들은 마상경기에 열을 올렸고, 심심했던 사람들도 마상경기를 보며 즐거워했다.
하여튼 인간들이란 전쟁을 안 하면 전쟁 비슷한 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종족이라니까, 라고 말하며 파베라는 혀를 끌끌 찼다.
잔인한 건 인간을 못 따라가지, 라는 말을 덧붙이는 파베라를 향해 “라고 전직 식인 식물께서 말씀하셨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그녀는 콧김을 내뿜었다.
- 뿌우
출발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양쪽의 기사들이 중앙으로 내달렸다.
붉은 깃털 투구의 기사가 좀 더 빠르다고 느낀 순간.
- 콰직
상대 기사의 플레이트아머가 볼품없이 구겨지며 그가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우와아아아아!!!”
‘지금이야! 지금이 심장이 제일 크게 뛸 때야!’
우렁찬 관중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맞선남의 손을 낚아챘다.
심장이 흥분으로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이럴 때 훤칠남을 보면…!
고개를 돌리자, 내게 손을 잡힌 남자가 얼떨결에 몸을 일으킨 채 어리둥절하지만 재미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날 보며 따라 웃는 미소가 보기에 좋았다.
“….”
심장은 계속 쿵쾅대면서 뛰고 있었지만 여전히 훤칠남에게 설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 그냥 흥분이랑 설렘이랑 되게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여자였구나.
왜 이런 데서만 쓸데없이 똑똑한 거야 나는.
“프리지아 영애… 저 너무 가슴이 뜁니다.”
“….”
의도치 않은 곳에서 흔들다리 효과가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쓴 입맛을 다시며 맞선남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너무 뛰어요. 돈 따서….”
“….”
그도 나를 따라 트로피를 거머쥔 기사에게 돈을 걸었으니 배당금을 좀 땄을 것이다.
그 때문에라도 그가 오늘의 맞선을 나쁘게 기억하지 않길 바랐다.
에휴… 배당금 챙겨서 집에나 가자.
내 인생에 무슨 설렘이여 설렘은.
“자네 돈을 다 잃어서 어쩌나.”
“그게 돈 잃은 친구를 걱정하는 표정인가 자네?”
배당금을 받으려고 관중석에서 일어나 걸어 나가는데, 돈을 왕창 잃었는지 죽을상을 짓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가 보였다.
그 옆에서 친구로 보이는 아저씨가 고소하다는 표정을 한가득 짓고 있었다.
두 분 절친이신가 보네.
“이제 돈이 없으니 즐기지도 못하겠구만.”
“왜 못 즐겨! 다음번에 따면 되지!”
“걸 돈이 있어야 돈을 딸 것 아닌가, 어디 돈 나올 구석이라도 있나? 내가 알기론 없는데~”
서로의 경제 사정을 저리 속속들이 알고 있다니 역시 친한 벗 사이가 맞군, 하며 신경을 끄려는데.
내 귀를 잡아끄는 말이 있었다.
“아 있다니까!”
“어디? 딸이 저주에 걸린 황자의 치료제라도 되나 보지?”
“치료제? 그게 뭔데? 돈 벌리는 일인가?”
“아 이 친구 이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요즘 그 얘기뿐인데 귀가 이리 어두워서야.”
그 말을 끝으로 두 아저씨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는 슬금슬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영애?”
“쉿.”
아저씨들이 속닥속닥 말을 이어나갔다.
“동제국 황자의 치료제가 아직도 나오질 않았다네.”
“아 그 저주에 걸렸다던?”
“그래 이 사람아.”
“그래서?”
“아 이 돌아가는 머리 없는 친구 보게나.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인가. 치료제가 제 발로 나오질 않고 있으니 그 몸값이 점점 치솟고 있는 거지. 그래서 지금….”
한동안 두 아저씨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발을 옮겼다.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직접 가보고 싶었다.
*
상가 거리 한복판에는 게시판의 역할을 하는 평평하고 커다란 벽이 있었다.
게시판의 용도로 만든 게 아닌 일반 건물의 벽이었지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야 할 소식이나 전단지를 그곳에다 붙였다.
그 벽의 건물주는 과일가게 주인이었는데, 소식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 중 일부는 지나가다 과일도 사 가는 모양이라 별말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과일가게 앞을 지나며 탐스럽게 익은 사과 한 개를 골라 집었다.
“얼마예요?”
주인이 얘기한 금액을 그에게 건네며 가게 모퉁이를 돌았다.
사람들이 벽 앞에 우글우글 몰려있었다.
높은 위치에 전단지가 붙어있던 터라, 딱히 그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지 않아도 벽에 붙은 전단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액의 보상금….’
대략의 내용은 이러했다.
동제국 첫째 황자의 치료제를 찾고 있다.
치료제 당사자에겐 거액의 보상금은 기본,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의지를 동제국 황실은 가지고 있다.
또한 치료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가 그 내용을 황실에 알릴 경우에도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황자를 치료만 해주면 동제국 황실에서 금은보화를 준다는데 왜 나오지 않을까, 참 이상하네.”
“어휴 내 몸에는 뭐 생긴 게 없나? 치료제가 되면 몸에 뭐가 생긴다는데.”
“아하핫 이놈아 치료제가 너 같은 면상이면 황자님께서 참 치료받고 싶으시겠다~”
“됐네! 이 사람아! 어차피 치료제는 저주 걸린 당사자의 성별이랑 반대라잖아.”
“그럼 백 퍼센트 여자라는 건가?”
“그렇지.”
너도나도 치료제에 대해 한 마디씩 떠드는 바람에 벽 앞이 소란했다.
여기 이렇게 내가 꼭꼭 숨어있으니까 치료제를 찾을 수가 없지.
‘저주가 얼마나 진행되었으려나….’
이제 슬슬 시력을 완전히 잃어갈 때인가.
흑요석같이 까맣고 깊던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버린 모습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입 한가득 베어 물었다.
가자.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예상했던 일이잖아.
더 들을 것도 없네.
그만 가려고 몸을 돌려세웠을 때였다.
“그 황자님도 참 안됐어. 젊은 나이에 눈이 먼지 어언 1년 반이 되어 간다지?”
그 말에 나는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땅바닥으로 집어 던지며 그 말을 한 자에게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