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얼마 후 파베라는 약속대로 날 호수 밖으로 보내주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호수가 보석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황자는 사망 직전까지 갔고 나는 죽었다 살아났는데, 마치 그런 일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호수는 잔잔하기만 했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
황자를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너무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잔잔한 호수를 보고 있으려니 이제 내 삶의 시간도 다시 잔잔하게 흘러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제국 보초 탑이 있던 곳을 보니 멀리서지만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평화 협정은 잘 체결된 건가.’
호수 안 파베라의 집에서 생활한 시간을 계산해보면, 이미 평화 협정은 체결된 이후여야 했다.
결렬되거나 미뤄졌다면 저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을 테니, 협정을 잘 맺은 것으로 봐야 할까.
‘변태도 우리 집에서 나갔겠지?’
단념하고 서제국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백작 부인에게 연락은 은밀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자.”
내 옆에 선 파베라가 내 등을 떠밀었다.
“정말 같이 가실 거예요?”
“응. 왜 군식구 늘어날까 봐 걱정되니?”
“아뇨. 뭐 셀린가가 그 정도에 부담을 느끼진 않아요.”
“그럼 빨리 가자. 100년 동안 비린내를 맡았더니 지겨워 여기.”
내가 짐을 싸는 동안 파베라 할머니도 짐을 싸길래, ‘어딜 가시나 보네’ 했는데 그게 우리 집이었다.
남는 방이 많긴 한데… 괜찮겠지?
“얘, 뭐하니.”
“네, 가요. 할머니.”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던 나는 미련 없이 저택이 있는 서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신을 추억하는 건 여기까지. 진짜, 안녕.
“근데 계속 할머니라고 불러요?”
“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텐데.”
“그럼 언니라고 하렴. 좀 닭살 돋지만 어쩌겠니. 내가 너무 젊어 보이는걸.”
음, 이분이 집에 계시면 백작 부인이랑 별 트러블이 없으려나?
“할머니 눈치는 좀 가지고 계시죠? 900년 넘게 사셨으니까… 믿을게요?”
“얘 걱정할 걸 걱정해라.”
나 사람 비위 맞추는 거 잘해~ 하며 파베라 할머니는 웃었다.
엄마가…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엄마 보고 싶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 가족에게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가족들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
나와 파베라는 셀린가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골랐다.
마을에 있는 한 카페의 구석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둘이 음료를 호록호록 마시는 중이었다.
잔을 내려놓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파베라의 갈색 주머니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할, 아니 언니.”
“응?”
“이것 좀 가방 속에 넣어요.”
“그래.”
파베라가 그 즉시 가방 속으로 갈색 주머니를 집어넣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다시 잔을 들었다.
“그런데 돈도 많으면서 왜 우리 집엘 간다는 거예요?”
카페에 들어와 음료를 시키는데 나와 파베라의 행색이 워낙에 추레해서 그랬는지, 카페 주인은 우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계산을 요구했다.
가방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려는데, 그때 나보다 먼저 파베라가 저 갈색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 들었다.
순간 그녀의 손에서 청색 사파이어가 번쩍였고, 그것을 보는 나와 카페 주인의 눈빛도 번쩍였다.
“아이 언니야! 계산하려면 돈을 꺼내야지 왜 다른 걸 꺼내고 그래….”
“어? 이걸로 계….”
나는 재빠르게 파베라의 입을 손으로 눌렀다.
그리고 꺼낸 금화 한 닢을 카페 주인에게 내밀었다.
“계산할게요. 잔돈은 됐어요.”
사파이어를 보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주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를 만들러 돌아섰다.
계산할 때의 일이 생각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음료를 호록대는 파베라를 바라보았다.
“나는 따라온다길래 돈 한 푼 없어서 그런 줄 알았잖아요.”
“이거 요즘도 비싸니?”
- 좌라락
그녀가 다시 갈색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서 툴툴 터는 바람에,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으이씨!
나는 빠르게 파베라의 옆으로 옮겨 앉아 카페 주인의 시선을 차단했다.
“비싸죠.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카페도 살 수 있을걸요?”
“어머나~ 그렇구나. 올랐을 줄 알았는데 예전이랑 물가가 똑같네.”
“도대체 그 예전이 언제인데요.”
“내가 막 세계수가 됐을 때니까… 900년 전?”
나는 있는 힘껏 미간을 구겨서 내가 느낀 황당함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파베라는 능력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무를 가지고 손쉽게 각종 보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냥 길 가다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가지고서도 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돈 귀한 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왜 돈 많으면 너 따라가면 안 되니?”
“그게 아니라 돈 많으면 자유롭게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굳이 절 따라온다니까 그렇죠.”
“이 할미는 말이야, 우리 피비가 너어~무 사랑스럽거든. 그래서 너 따라가는 거야.”
“하하하….”
나는 그녀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에 보답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주었다.
“아이구~ 요 귀여운 것! 웃으니까 볼때기 부푸는 것 좀 봐… 어머나!?”
내 볼을 꼬집던 파베라의 눈이 내 뒤를 바라보며 크게 뜨였다.
“우리 피비랑 똑같이 생겼네…!”
그 말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창문 밖으로 두꺼운 겨울용 로브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엄마였다.
그 즉시 카페 문을 열고 달려갔다.
“엄마!!”
엄마 뒤로, 마차에서 내리는 오빠의 모습도 보였다.
“…피비야!!”
가녀린 부인을 생각하면 그렇게 거칠게 행동하면 안 됐는데 조절이 안 됐다.
달리던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내가 거칠게 안기는 바람에 휘청이는 엄마의 등을 오빠가 뒤에서 잘 받아준 모양이었다.
엄마에게 안겨 어깨에 코를 박자, 익숙한 항유 냄새가 풍겼다.
부인에게 맨날 나던 익숙한 일랑일랑 향이었다.
“엄마아아….”
“내 새끼… 엄마가 얼굴 좀 보자. 얼굴 들어봐 어서.”
“싫어… 으… 요”
“싫긴 뭐가 싫어, 빨리 고개 들어봐.”
내가 그녀의 어깨 위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 올릴 생각을 않자, 부인이 포기했는지 내 등만 살갑게 쓸어내렸다.
“그래, 잘 돌아왔으면 됐어. 그거면 됐어. 엄마는 그거면 돼.”
“흐으응….”
오늘도 날씨가 되게 추운 날인데, 날 사랑해주는 사람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있으니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눈물로 적시다 슬쩍 올려다본 엄마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기쁘고 안심한 얼굴로 내 등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는 건 나 혼잔가, 하며 다시 어깨로 얼굴을 파묻으려는데 엄마의 뒤에서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으흐흑… 큽….”
래빌이 엄마 등 뒤에 서서 엄마와 나를 함께 끌어안고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바빠 보였다.
오빠가 한 손으론 내 정수리를 쓰다듬고, 한 손으론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금발 성인 세 명이 마을 한가운데 서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울다가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래빌아.”
“흡, 네 어머니.”
“코 다 풀었으면 그만 울고 마차에서 애 겉옷 좀 가져와, 동생 춥잖니.”
“네….”
엄마의 말에, 오빠가 듬직한 어깨를 들썩이며 마차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실감이 났다.
그래, 나는 살아 돌아온 거다. 이 가족에게로.
*
“안녕하세요. 파베라라고 합니다.”
와, 이 할머니 이렇게 쑥스러운 표정도 지으실 줄 아는구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셀린가의 안주인과 장남을 향해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파베라의 얼굴은 그녀의 눈동자 빛깔처럼 붉어져 있었다.
“이미 딸아이에게 들어 아실 테지만 유리아 셀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래빌 셀린입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파베라가 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고개 숙인 파베라를 향해 백작 부인이 더 깊게, 테이블에 이마가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죽을 뻔한 제 딸아이를 구해주셨다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오빠도 엄마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둘을 보며 당황하던 파베라가 얼른 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아, 아뇨. 고귀한 영혼을 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말을 하는 파베라의 코끝이 테이블에 닿아있었다.
얼굴이 아닌 정수리로 대면 중인 셋을 보며 나는 테이블 한구석에서 목을 긁었다.
저 멀리서 카페 주인이 저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하는 얼굴로 그릇을 닦으며 이쪽을 흘깃거렸다.
“그, 그럼 저는 잠시 화장실 좀.”
파베라가 일어서자 그제야 나머지 둘도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서는 파베라가 내 귀에 스치듯 귓속말을 속삭였다.
“나 너희 어머니 좋아. 너랑 똑같이 생겼어. 너무 신기해.”
그러면서 얼굴을 붉힌 채로 화장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부모 자식이 닮은 게 그렇게 신기한가.
저렇게 얼굴을 붉힐 일인가.
내 어머니라고 해도 파베라가 보기엔 한참 아기들인 건 똑같을 텐데,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신기했다.
“좋은 분인 것 같구나.”
테이블 위로 내 손을 끌어당기며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응?”
“저분께서 절 구하다가 거처를 잃으셨거든요.”
“세상에… 걱정 말렴. 꼭 부족하지 않게 보상해 드릴 거란다.”
“아니 그게… 집에서 같이 지내도 될까요?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쓸쓸하신가 봐요.”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엄마 쪽이 아닌 오빠 쪽에서.
“좋은 생각 같습니다. 어머니.”
그걸 왜 네가 판단하니, 라는 눈빛으로 부인이 래빌을 쳐다보자, 그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분이 그걸 원하시니? 너도 원하고?”
“네.”
“그래, 그렇다면 엄마는 상관없단다.”
긍정의 미소를 짓는 엄마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안은 여전히 한적해서 오늘 이곳으로 엄마를 불러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베라와 함께 어제 마을에 도착한 나는 심부름꾼을 시켜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택의 상황을 알 수 없는 터라 될 수 있으면 은밀히 와주시길 요청했고, 오늘 부인이 카페에 당도한 것이었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추려 그간의 상황을 전하자, 엄마와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빠는 같이 안 오셨네요.”
은밀히 엄마 혼자 와주십사 편지에 적었는데 오빠도 함께 왔길래 아빠도 같이 온 건가? 했는데 백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내 말에 부인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열었다.
“그 양반은 눈치가 없어서 이런 일에 데리고 오는 건 자제해야 해.”
“….”
“그때도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그놈 이마에 나쁜 놈이라고 뻔히 쓰여 있는데 아주 그놈한테 가서 너 찾아달라고 울고불고… 하….”
“….”
“아니 보면 모르나? 얘도 제 아빠 닮아서 마찬가지야.”
그 말에 오빠가 죄인이 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눈 뜨고 일어나보니까 넌 사라졌고, 놈 이마에는 어디서 다쳤는지 하룻밤 새 주먹만 한 혹이 생겼는데 어쩜 그렇게 둘 다 의심 한 번을 안 하니? 난 이 부자가 너무 신기해~”
“오빠….”
바로 옆에 앉아 엄마에게 헐뜯기는 오빠를 안쓰러운 음성으로 불러보았다.
“동생아….”
“오늘도 망칠까 봐 말 안 하고 그냥 오려다 네 편지 받고 우는 걸 얘한테 들켜서 어쩔 수 없었지 뭐니.”
“그럼 아빠는 아직 제가 살아있는 걸 모르세요?”
부인이 살짝 양심에 찔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말 해줘야지. 근데 워낙에 표정관리를 못 해서 괜찮을지… 엄마는 아직 의심스럽거든.”
부인의 말에 따르면, 사건 당시 서제국 2황자는 날 찾아주겠다며 나섰지만 찾지 못했고, 평화 협정을 위해 예정된 날 저택을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낯선 자들이 집 근처에 가끔 보인다며 부인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협정이 잘 체결되어서 서제국군이 모두 철수했는데 아직도 영지 내에 가끔 낯선 자들이 보이는 게 영 의심스러워.
이 저택에서만 몇 년을 살았는데, 엄마가 모르겠니? 영지민들 얼굴은 다 익숙해. 내 딸, 아쉽지만 아직 집에 돌아오는 건 안 될 것 같다.”
역시 아직은 이른가.
그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분간 저는 지금처럼 실종된 상태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외부에서 저를 찾는 이가 오면 찾지 못한 거로 말을 하기로 맞춰둘까요?”
엄마와 오빠가 못내 미안한 표정으로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의도치 않게 독립하게 되다니.
나는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