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39)화 (39/134)

39화

그곳에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녹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처음 보는 여자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언니는 누구세요?”

“풋… 언니?”

성숙한 목소리 위에 콧소리가 살짝 스며든 가볍지만은 않은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나는 단박에 그녀의 성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언니 기 세다.’

느낌 왔어, 나.

이 언니 장난 아닐 거 같아.

“얘,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아무 데나 않아. 화내고 싶으면 내고.”

“….”

“화낸다고 살려준 거 취소하진 않을게. 원하면 가능은 해.”

그 말에 단박에 이해가 됐다.

나 살았구나.

그리고 저 언니가 나 살려준 거야.

나는 바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뭐해?”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입니다. 언니.”

“어머.”

그녀가 호호홋 하는 웃음을 덧붙였다.

내 행동이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됐어. 너한테 언니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거든.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따라와.”

진한 녹색의 긴 머리를 찰랑대며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언니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

“네, 절 구해주셨는데 제가 존함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머리카락 밑으로 손을 넣어 녹색 머리를 휙 흩날리며 날 바라보았다.

흡사 샴푸 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파베라.”

예쁜 언니는 이름도 예쁘시네요.

그리고 마음도 고우셔서 절 구해주셨구요.

다 갖췄네.

그녀의 뒤를 따르며 나는 속으로, 방금 만난 언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여자의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 곧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

“그래놓고 날 구해줬다고 한 거야? 뻔뻔하게? 너 돌았니?”

나는 분에 못 이겨 숨을 헐떡거렸다.

얼굴이 붉어져서 터질 것 같았고, 가슴도 분노로 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

“너? 너 이제 말도 짧다?”

“그래 야! 너! 너 같은 거한테 내가 존칭을 써야 하니?”

“아휴… 됐다. 내가 어린애 상대로 뭐 하는 건지… 자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앉아.”

녹색 머리의 여자가 한숨을 쉬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사람이 성내며 말을 하는데 뒤를 돌아?? 지금 뒤를 돌았어?? 네가 한 짓을 알고도 이렇게 뻔뻔해?

“진짜 당신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 새끼가 아니니까 그렇게 뻔뻔하지. 그치??”

“뭐? 악!!”

나는 내게서 등을 보인 여자의 뒤로 달려들어 그녀의 무릎 뒤를 발로 깠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으니 엄청 아프겠지. 내 알 바냐? 그러라고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겠지. 꼴좋다. 근데 너한테는 한참 부족해. 더 맞자.”

여자의 등 뒤로 올라타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아악!! 야! 꼬마야! 얘기를 더 들…! 아악!!”

파베라라는 이름의 여자는 다른 말로도 불리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녀를 부르는 호칭은 ‘라울 호수의 식인 식물.’이었다.

“너 같은 건 죽어. 왜 멀쩡한 사람들을 죽여? 너나 죽어!! 흐어어엉.”

“얘가 진짜 못 말리는… 아악!”

나는 울면서도 여자를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야무지게 주먹 쥔 손으로 엎어져 있는 여자의 날갯죽지를 퍽퍽 두들겼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오늘이 네 날갯죽지가 사망하는 날인 거여.

내가 깔아뭉개고 올라타 있는 여자의 팔이 초록빛 줄기로 변했다.

몸을 타고 올라온 줄기가 손목을 휘감았고, 결국 나는 양팔과 두 다리가 식물 줄기에 휘감긴 채 공중에 떠서 눈물만 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우… 삭신이야….”

내게 신나게 밟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제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너 내가 몇 살인 줄 알아? 나 900살이야. 900… 910살인가 아무튼.”

“흑, 흐윽… 흐엉….”

9살이건 900살이건 내 알 바냐.

“얘… 할머니가 미안한데… 어린애 속상한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도 설명 좀 하자.”

뭐 그러든가, 안 들을 거니까.

당신 같이 나쁜 행동하는 사람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리 없다.

때리는 것도 못 할 일이다.

신나게 때렸더니 팔다리에 있던 힘이 다 빠져나갔나 보다.

나는 공중에 매달려 팔다리를 축 늘어트렸다.

“얘! 너 자니? 얘!”

“….”

“어우 애가 뭐 이렇게 망아지 같아?”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굵은 줄기로 이루어진 식물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자가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그릇을 줄기 사이로 들이밀었다.

“먹어. 먹고 얘기하자.”

그러고 보니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지.

밥 생각을 하자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공복감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저 여자가 주는 걸 먹고 싶지는 않았다.

“기껏 살렸더니 안 먹고 굶어 죽게?”

“….”

“꼬마야 난 네가 반갑거든? 그러니까 웬만하면 너도 날 반가워 해줬으면 좋겠다.”

“어우 네, 어쩌라고요. 혼자 많이 반가워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돌려 누운 몸을 다시 돌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꼴 보기도 싫다, 저 여자.

“아직도 화가 많이 났구나. 그럼 그거 다 먹고 나면 또 나 때릴 시간 줄게.”

그 말에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켜 앉아 수프 그릇을 집어 들었다.

오늘 사람 때려보니까 이게 사람 때리는 일에도 힘이 참 많이 들어간다 싶었다.

먹고 힘내서 또 때려야지, 아직 분이 덜 풀렸으니까.

여자는 조용히 내가 수프를 퍼먹는 걸 지켜보더니, 수프가 든 그릇이 비워질 때쯤 다가와 수프를 한 국자 더 부어주었다.

“그거 먹고 몇 대나 더 때리겠니? 더 먹어.”

“….”

나는 거부하지 않고 여자가 부어준 수프를 마저 싹 비웠다.

“자 이제 나 기운 났어. 이거 열어. 너 더 때릴 거니까.”

여자는 에효효…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저 파베라라는 여자가 날 많이 봐주고 참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녀가 호수에서 얼마나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는지 경험하지 않았나.

마음만 먹었으면 이미 나는 상·하체가 분리되고도 남았겠지.

난감해 죽겠다는 표정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왜 살렸을까?”

“남자는요? 남자는 살았어요? 나랑 같이 물속에 빠졌던 남자요.”

“….”

“당신이 날 왜 살렸는지 당신 의도 따위야 눈곱만치도 안 궁금하고요, 당신 덕분에 죽을 뻔한 그 남자가 살았는지 봤냐구요. 아까부터 자꾸 설명한다 얘기하자 하는데, 나랑 각 잡고 얘기하고 싶으면 그것부터 말해요.”

“주변에 큰 신성력을 가진 사제가 둘인가 있었으니까 살려냈을 거야.”

그랬구나, 다행이다.

내 위에서 정신을 잃고 눈이 감겨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이 아파왔다.

됐어, 살았으니 된 거야….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 바라보는데, 내 앞으로 걸어와 볼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얘야, 이제 내가 널 왜 살렸는지도 들어줄래?”

뻔뻔하긴.

“이봐요 언… 아니, 900살이라 그랬나, 이봐요 할머니. 댁이 날 살렸다는 가증스러운 표현 쓰지 말아요.”

애초에 내가 왜 물어 빠졌는데, 왜 죽을 뻔했는데.

자기 때문에 죽을 뻔한 건데 누가 누굴 살렸대?

그 말을 하고는 내 볼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꺾었다.

“흠… 알겠다. 싫다면 그렇게 말 안 하마. 이 할머니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거든?”

그녀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왜 널 죽이려다 죽이지 않았는지 들어 줄래! 부탁이니까?”

“….”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감옥 안에서 애먼 천장이나 실컷 바라보았다.

파베라라는 이름의 저 여자와 눈빛을 섞는 것조차 싫었으니까.

*

“흐어엉 파베라 할머니… 허어엉.”

파베라의 길고 긴 과거사를 듣고 난 나는, 또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파베라의 삶은 너무나 기구해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날도 그랬어. 조용히 있고 싶은데 애들이 와서 난리를 피우더라? 그럴 때 몇 놈 잡아다 물속으로 던져버리면 조용해지거든.”

파베라는 호수에서 내가 물에 빠졌던 그 날을 회상했다.

말을 끊고 잠깐 숨을 고르며 그녀가 날 쳐다보았다.

“그때 널 본 거야. 내가 여기 100년 동안 있었는데, 자기 목숨 끊으러 오는 애들이나 남의 목숨 끊으러 오는 애들은 많이 봤거든. 근데 남의 목숨 구하는 영혼은 참 오랜만이라.”

“….”

“이제 태어난 지 며칠밖에 안 돼 보이는 어린애가 다른 사람 살려보겠다고 물속에서 몸을 뒤집어 가면서 애쓰는 게 참….

내가 또 그런 거에 약하거든.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너 같은 애들은.”

“할머니, 저 태어난 지 20년도 넘었어요.”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머 그러니? 아기 같은데 벌써 20년을 살았어? 그게 내 기준에선 며칠밖에 안 된 거나 다름없단다.”

하긴, 900살도 더 사셨다고 했으니…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베라.

본인이 기억을 잘 못 해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충 910살쯤 먹은 할머니였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는 알려진 것처럼 식인 식물이 아닌.

“세계수. 나 세계수야.”

“제가 아는 세계수는요. 세상을 수호하는 희생정신 넘치는 신성한 나무인데요.”

“나도 그랬어, 옛날엔.”

“….”

“근데 꼬마야, 세상을 지키는 것도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거야.”

내가 소설 속에서 봐 왔던 세계수들은 다 알아서 사랑이 탑재되어 있던데.

그녀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고치고 살려놨더니 치고받고 싸워서 죽고, 전쟁해서 또 죽고, 살려놓으면 또 전쟁하고. 얘야, 그럼 사랑이 남아날 것 같니?

세계수라고 뭐 사랑이 심장에 붙박이 되어있는 줄 아니? 인간 얘들은 아주 살 의미가 없는 새끼들이거든.”

“하, 할머니….”

그녀는 사람 얘기를 하면 할수록 단어 사용이 거칠어져 갔다.

“그래서 다 지겨워서 100년 전에 이 호수에 들어앉은 거야. 그리고 100년 만에 널 본 거야, 나랑 똑 닮은 너를. 아이구 예뻐.”

파베라 할머니가 귀여운 아가를 본다는 듯 내 양 볼을 손으로 비볐다.

“제가 할머니랑 닮았어요?”

도대체 어디 가요? 라는 뒷말이 있긴 했지만 꼭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만 할 때 나한테도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세계수가 된 거란다.

그러니까 딱 떠오른 거야. 그 남자를 지키려는 널 봤을 때 내 빛나던 그 시절이.”

그녀가 한껏 추억에 잠긴 표정을 해 보였다.

“그 사람은요? 할머니가 살리고 싶었다던 사람….”

분위기만 봐도 물어봐선 안 될 질문 같았지만 그런 후회를 해봤자 이미 말을 쏟고 난 다음이었다.

“아 그 사람? 살렸지. 네가 살린 것처럼.”

살렸다는 말을 하며 그녀가 씩 웃음 지었다.

입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갔는데 눈빛은 어쩐지 공허해 보여서, 묘하게 가슴을 아리게 하는 웃음이라 나는 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뚝 끊겨버려서 나는 입속으로 혀를 굴렸다.

그러다 꺼낸 이야기는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게 만들 만한 내용이었다.

“그래도 할머니, 저는 잘 이해 못 하겠어요. 할머니 때문에 그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죽었는걸요.”

저도 그 남자도 죽을 뻔 했구요.

그녀를 비난하는 이야기라 주저하며 말했는데, 슬쩍 쳐다본 파베라 할머니의 표정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쁘지. 아마 예전의 나라도 너처럼 생각 했을걸? 그래서 이게 이렇게 변해버린 거니까.”

“…?”

회한에 젖은 얼굴로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에메랄드빛 보석이었다.

어? 그냥 보석이 아닌가?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은 보석을 향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보석 중심부가 시커먼 연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생명의 정수란다. 내가 이 호수에서 식인 식물로 살면서 세계가 망가져 가는 것을 보고도 방관했더니 이렇게 혼탁해져 버렸지 뭐니.”

“아….”

뭐 그런가 보구나 생각했다.

저런 걸 보여주니까 진짜 세계수 같긴 하네.

“그래서 얘야, 이걸 네가 가지고 있어라.”

“예?”

“넌 자격이 있는 아이란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한없이 신뢰감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쓰는 걸, 난 간파하고 만 것이다.

나는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이거 지니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살릴 때마다 혼탁해진 게 정화돼서 보석이 다시 깨끗해지고 뭐 그런 거죠?”

“얘가 귀엽기만 한 게 아니고 똑똑하네.”

“저 호구 아니에요 할머니.”

이 할머니가 어디서 약을 팔라구 지금.

“그리고 제가 그걸 가지고 있어봤자 지금 그대로일걸요? 저 사람 구하는 일에 별 흥미 없거든요. 그 남자한텐 빚진 게 있어서 어쩌다 흔치 않게 구한 거라서.”

“하지만 나처럼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감해지진 않았잖니.”

“그건 그렇지만….”

무감한 할머니가 이상한 거죠.

내가 말끝을 흐리는 동안 파베라가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니 어느새 내 손바닥 위엔 생명의 정수라 불리는 그 에메랄드빛 보석이 놓여있었다.

“그럼 네가 가지고만 있어.”

“네?”

“내가 가지고 있다간 점점 더럽혀져서 결국 부서지고 말 거야.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더 혼탁해지진 않겠지.

가지고 있다가 사람 살리기 좋아하는 호구가 나타나면 걔한테 주면 돼.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호구 한 명 없겠니?

젊었을 때의 나 같은 호구가 어딘가엔 반드시 또 존재하기 마련이란다. 넌 그 전까지 그냥 가지고만 있으면 돼.”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생명의 정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싫으면요?”

파베라는 밝게 웃었다.

“여긴 호수 밑바닥에 있는 동굴 속이야. 네가 여기를 나가려면 내 힘없이는 불가능하단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니?”

하하. 이 할머니도 호구 스타일은 아니네.

나는 그녀에게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제가 잘 가지고 있을게요. 할머니. 저 집에 가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