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의 이름이 호수에 울려 퍼진 순간, 내게 안겨 있던 남자가 날 밀어 넘어트렸다.
그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지면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까 보았던 그 불타는 화살 수십 발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 위로 엎어지며 날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나일!!”
“황자님!!”
“빨리 황자님을!”
누군가가 멀리서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동제국 병사들이 달려오며 연신 그를 불러댔다.
“이봐요.”
왜 호수 한가운데서 날 덮치고 그래요 남사스럽게, 저기 사람들 많은 거 안보여요?
난 허락한 적 없는데.
빨리 일어나요.
“이봐요 병사님.”
내가 계속 대답을 회피해서 삐진 거예요? 왜 안 일어나요.
아 알았다구요.
“기다릴게요. 인제 그만 일어나요.”
“….”
“제발….”
숨 막히니 그만 좀 일어나라는 의미로 남자의 등을 두드리려 했는데, 뻗은 손이 등에 닿기도 전에 손에 무언가가 먼저 닿았다.
화살 끄트머리에 달린 화살대의 날개였다.
“이봐요. 황자님.”
“….”
“살아있잖아요. 겁주지 말아요. 이런 거 싫으니까.”
“….”
“저기요 좀!!!”
내 어깨 위에서 남자의 머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흥분하지 말자, 침착해야 해.
의식을 잃은 거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 몰라.
어깨 위에서 미약하게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어. 동제국 병사들에게 그를 넘기기만 하면 그들이 어떻게든 해줄 거야.
내 힘으론, 내 위에서 축 늘어진 남자를 밀어낼 수가 없어, 고개만 살짝 들어 전방을 살폈다.
동제국 병사들이 거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다 왔어, 다 왔어요. 살 수 있어요, 조금만, 조금만요. 조금만 버텨요 나일.’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며 남자를 구조해 갈 병사들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데, 그때.
얼어붙은 호수 바닥이 갈라지며, 호수 안쪽에서 전봇대 굵기만 한 짙은 녹색의 식물 줄기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으악!”
뱀 같은 식물 줄기에 몸을 휘감긴 병사들이 허공에서 손발을 휘저었다.
그렇게 하나둘 공중에 떠올랐던 병사들이 식물 줄기에 의해 얼음 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지는 걸 지켜보는데,
호수 전체를 집어삼킬 듯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식물 줄기들이 하나씩 얼어붙어 가기 시작했다.
어떤 줄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어떤 줄기는 저 멀리서 날아온 얼음 조각에 몸이 베여 수면 아래로 사라져갔다.
공작인가, 그가 능력을 쓰고 있는 거겠지.
그럼 이 아수라장도 금방 수습이 될 것이다.
“정신 차려요. 당신의 사랑이 왔다구요. 좀만 버텨요. 이제 곧… 어?”
등 뒤에서 쩌억 쩌저적 얼음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나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날렸을 얼음 조각에, 형태가 두 동강이 난 거대한 식물 줄기가 우리 옆으로 떨어졌다.
- 풍덩
금이 갔던 얼음 바닥이 반으로 쪼개지며 등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정신을 잃은 남자를 꽉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나온 핏물이 우리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물속에서 그를 흔들어보았지만 그의 감긴 눈이 뜨이는 일은 없었다.
호수 안의 상황은 처참했다.
이미 숨이 끊긴 자들이 물속을 부유하고 있었고, 식물 줄기에 몸이 감긴 병사들은 호수 저 아래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 둘 다 죽겠어.’
두 발을 미친 듯이 휘저었지만 아무리 휘저어도 그와 내 몸이 떠오르진 않았다.
내 힘으로는 나와 그 모두를 살리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물 밖에서 손이 쑥 들어왔다.
“황자님!!”
아, 동제국 병사들이다.
그들이 이 사람을 찾고 있어.
나는 내 몸을 지지대 삼아 그를 있는 힘껏 밀어 올렸다.
‘쿠륵, 끅.’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힘을 쓰느라, 입속으로 거세게 물이 밀려들었다.
내 코와 입에서 나온 공기 방울들이 상승하는 남자의 몸과 함께 호수 위로 떠 올라갔다.
됐다, 남자의 몸이 뜨기 시작했어.
그러나 아직은 남자의 몸을 수면 위로 완전히 상승시킬 만한 추진력이 부족했다.
나는 물속에서 몸을 회전시켜 남자의 몸을 발로 차듯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남자를 밀어낸 반작용으로 내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됐어 뜬다!’
황자를 찾기 위해 병사들이 물속을 향해 랜턴을 비추는 모양이었다.
목표물을 찾지 못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빛줄기들이 조금씩 황자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리베르 황자님입니다!”
“끌어올려!”
수면 가까이 다다른 그의 몸을 향해 여러 손이 물속으로 들어왔다.
아… 됐다.
그 손들이 남자의 몸을 낚아챘다.
여러 손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끌어 올려지며 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 눈이 물속에서 건져지는 남자의 축 늘어진 신체를 쫓았다.
이제 내 눈은 수면 밖으로 보이는 그의 흐릿한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살아요.’
내가 말했었나?
나는 이득이 확실한 일에만 에너지를 쏟는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당신이 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리면 정말 화가 날 거 같거든.
그러니까 꼭 살아요.
호수 안을 비추던 랜턴들의 빛이 하나둘 사라졌다.
목표물을 찾았으니 더 이상 비출 이유가 없겠지.
“숨이 붙어있습니다!”
“사제를 불러와 어서!”
‘다행이다. 살겠구나.’
“근데 황자님과 같이 말을 탔던 병사 한 명이 보이질 않습니다.”
“뭐? 황자님께 중요한 분인지 모른다! 더 찾아봐!”
“예!”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들의 말소리도 점점 작게 들려왔다.
와… 잘하면 나도 사는 건가.
절호의 기회이니만큼 내가 여기 있다고 애를 써야 하는데, 체력이 이미 다 고갈된 모양이었다.
이제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릴만한 힘조차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폐로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작열감으로 홧홧했다.
내 폐 연약하구나.
물 좀 먹었다고 이렇게 따갑다니, 좀만 더 버텨주면 안 될까.
“으… 으악!”
가라앉는 내 몸 옆으로 호수 바닥에서 올라온 식물 줄기들이 거세게 수면을 향해 솟구쳤다.
저놈의 식인 식물, 좀 잠잠하다 싶더니 다시 난리구나.
“식물이 다시 공격해옵니다!”
“지금 다시 수면을 얼린다. 황자를 한시라도 빨리 육지로 옮겨야 해.”
“하, 하지만 아직 다른 한 명을 찾지 못했는데…!”
“나일이 먼저다.”
브라보.
박수 칠 힘이 내게 남아있다면 로건 후페이의 냉철한 결정에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많은 사람 중에서 황자의 이름을 저리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면 아마 공작이겠지.
그래, 괜히 잘 모르는 사람 구해보겠다고 황자까지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보다 그런 결정을 내려야죠.
역시 당신은 나일밖에 모르는 집착광공이 맞았군요. 수를 사랑하는 공의 태도로서 합격점 드리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멀어진 수면이 다시 어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함께 완벽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죽는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고 어쩌면 기쁜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그 날들 동안, 하루도 편하게 잠든 적이 없었는데.
이제 물속에서 편하게 발 뻗고 자면 되겠다.
어? 근데 내가 죽으면 치료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치료제 예정자가 죽었으니 그대로 치료제는 영영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내가 죽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치료제의 문양이 나타나려나?
와, 후자면 좋겠는데, 그럼 이게 불행 중 다행인가.
그렇게 되면 공작님하고 예쁘게 백년해로할 수 있겠네.
….
‘마지막에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그가 들었으려나.
시간이 지나, 저주가 치료되고 나서 다시 나를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그의 말에.
끝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엔 기다리겠노라, 나도 당신이 보고 싶을 거다, 그리 말했는데.
들었으려나.
그냥 끝까지 꾹 참고 입을 닫았어야 했는데.
그가 결국 듣지 못했길 바랐다.
제 병사들의 목숨이 아까워 저주에 걸린 몸으로 전쟁까지 나왔던,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그인데.
후에 다시 빌론 왕국으로 찾아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남자는 마음 아파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내가 끝내 거절한 것으로 알고 영원히 이곳엔 다시 발을 들이지 말았으면.
그렇지만 가끔은 날 생각하는 날도 그의 남은 생에 가끔은 찾아왔으면 좋겠다.
해가 맑은 날마다 생각하는 건 너무 자주니까,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정도면 소박하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가끔 날 떠올려 줬으면 좋겠어.
예전에 어디서 주워듣기로 사람이 죽는 순간에 다량의 엔돌핀이 분비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마음이 평온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는 죽지 않으려고 왜 그렇게 발버둥을 친 거냐고.
백작 부인에게 서제국 2황자가 저택을 뜨면 연락하겠다고, 안전하게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밖에 쪽지에 안 썼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망할 놈의 못난 집구석 내 다신 안 온다, 라고 쓸 걸 그랬다.
예쁜 얼굴의 엄마가 생겨서 기분 너무 좋았는데.
아, 기다란 무엇이 내 발목을 휘감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날 호수 바닥으로 빠르게 잡아당겼다.
나는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
“이 새X야 정신 차려!”
누군가가 제 볼때기를 사납게 때리는 통에 볼이 다 따끔거렸다.
어떤 자식이 내 볼을 이렇게 겁대가리 없이.
겁 없이 구는 그 낯짝을 봐야겠구나.
나일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몸의 구석구석도 마찬가지였다.
“고, 공작 각하. 사경을 헤매는 황자님의 볼을 그렇게 때리는 것은….”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하십니다! 정말 돌아가신다고요!!”
그래도 그는 제 볼을 때리는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양 볼이 얼얼했다.
“야! 나일!! 죽을 생각이냐? 아니겠지.”
들리는 목소리가 평생 들어왔던 지겨운 놈의 것이었다.
“아… 씨….”
그가 힘겹게 연 입으로 앓는 소리를 내자 주위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깨, 깨어나셨다!”
“살아나셨어요 진짜! 지옥에 가신 줄 알았는데?”
“황자님이 왜 지옥엘 가? 돌아가셔도 천국으로 가시겠지! 이 무엄한!!”
그 후에 들려오는 목소리들도,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자들의 것이었다.
잘 살아 본국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곤 있었지만, 제가 실종되는 탓에 그들의 생사를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살아들 있었군.
다행이다, 이 질긴 목숨들 같으니라고.
나일이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 이 자식 웃음이 나오냐.”
제 친우의 목소리였다.
“후페이 공작님의 경박한 언사를 들으니 살아있다는 게 실감이 나는군요.”
“이 자식….”
한가득 안도를 담은 로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근데 여자는? 어딨어?”
“여자요??”
수하들의 표정이 동시에 어리둥절해졌다.
아, 겁 많은 그 여자 아직도 남자 행세를 하고 있나 보군.
겁을 잔뜩 집어먹고 동그랗게 눈을 뜨던 여자의 얼굴이 생각 나버린 나일이 픽 실소를 흘렸다.
“아, 그 황자님 뒤에 있던 서제국 병사의 복장을 한 자 말입니까?”
“어, 그래. 지금 어딨지? 가봐야겠다.”
그가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의 수하들이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만류했다.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황자 전하.”
*
나는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가 떴다.
어둡고 침침하고 눅눅하기까지 한 습한 동굴 안이, 아무리 둘러봐도 천국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 혼자 허우적거렸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상황에서, 내 목숨 버려가며 남자 살리고 온 건데 지옥인 거야? 와 짜다 짜.’
아니 나같이 이타적인 행동을 한 인물을 천국행 티켓 안 주면 누굴 주는 거야?
도대체 저세상의 인원선별 시스템을 알 수가 없네, 진짜.
육신의 감각이 생전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긴 지옥이 맞는 것 같았다.
이제 계속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 울부짖으라고 이렇게 감각이 생생한 거겠지.
발목을 돌려보니 삐었던 발목이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와 진짜 납득이 안 되는데….”
살면서 나쁜 짓 크게 한 것 없고, 거기다 마지막 가는 길에 큰 거 하나 했잖아.
그럼 뭐 천국은 못가도 새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시 살게 해주든지, 왜 바로 지옥인데?
“이해가 안 되네. 아주 화가 잔뜩 나려고하네 그냥?”
설마… 남자를 살리지 못한 건가.
그래서 지옥으로….
저세상 돌아가는 시스템 역시 과정주의가 아닌 결과주의였던 건가.
내가 남자를 살리려 했든 말든 상관없이 결과가 죽었으면 그냥 지옥인 거야?
이런 썩을 놈의 결과 지상주의.
이러면 현실하고 저세상하고 다를 게 뭣이여.
“무슨 화가 나니?”
“…?”
뒤에서 들려온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