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늦은 점심을 가볍게 먹고 나서 우리는 내내 너른 들판을 달렸다.
다 큰 어른 둘을 태우고 계속 달리기만 했으니 지칠 법도 한데, 우리가 탄 까만 말은 여전히 쌩쌩하기만 했다.
정작 지친 것은 나였다.
엉덩이가 뻑적지근했다.
‘아니, 내 엉덩이가 이렇게 아픈데 말은 허리가 안 아픈가?’
내 엉덩이가 아픈 만큼 내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말도 허리가 아플 것 같은데 나와는 다르게 말은 너무 신나게 달리기만 했다.
말을 오래 타는 것에 익숙지 않은 내가 힘이 들까 봐, 남자는 계속 내게 천천히 갈까요를 물어왔지만 그때마다 나는 아니오를 외쳤다.
평화롭긴 하지만 놀러 나온 것도 아니고 빨리 목적지로 향하고 싶었으니까.
그 때문에 우리는 계획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대신 내 엉덩이가 갈려 나가긴 했지만.
“워워~”
들판이 끝나고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가 말을 천천히 몰기 시작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잦아지자 엉덩이로 전해지는 충격이 덜해지며 나는 앞에 앉은 그의 등을 버팀목 삼아 몸을 축 늘어트렸다.
“견딜 만해요?”
“….”
‘아뇨 힘들어요.’
속으로 힘들다를 100번 외치고 있었지만, 뒤에 타고 있는 나보다 앞에서 말을 모는 그는 더 힘들 테지.
내가 찡찡거릴 수야 없지.
그의 등에 이마를 처박고 힘들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남자가 특유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어차피 숲길은 들판처럼 달리기 힘들어요. 천천히 가죠.”
“좋아요. 너무 반가운 소식이에요.”
“그래도 쉬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왔어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제 천천히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호수가 보일 것이라 했다.
이 숲이 끝나는 지점에 라울 호수가 있었다.
‘어둡네….’
숲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가뜩이나 계절이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데, 빽빽한 숲속에 들어오자 햇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 우리가 들어온 숲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들판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안으로 해가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가방에 매달린 마나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은은하게 우리의 길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이 숲도 편백나무 숲이네.’
황자를 주웠던 셀린가 저택 뒷숲도 편백나무 숲이라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곧고 길게 뻗은 편백나무들이 빽빽했다.
빽빽한 만큼 빛도 숲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길 위에 눈이 하나도 녹질 않았구나.
그의 등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앞을 보니, 우리가 가야 할 길 위로 하얗게 눈이 쌓여있었다.
“왜요?”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숲 말이에요. 편백나무 숲이에요. 내가 당신을 발견했던 숲과 똑같은.”
“….”
그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좀 뭐랄까, 감상에 젖어 있었다.
화끈거렸던 엉덩이도 점차 가라앉고 있었고, 어둡고 조용한 눈길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중이라 그랬던 것 같다.
눈은 참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니까.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죠?”
“….”
“그 숲에서 당신을 구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당신과 내가 말을 타고 여길 지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
“내가 그때 당신을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없었을 테니까… 사실 원래 나는 남의 인생에 별로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땐 내가 확실히 이상했던 것 같아요. 평소 같았으면 에휴 안타깝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 이러고 그냥 갔을걸요?”
“너무 잘생겨서 못 지나친 거 아니에요?”
“하….”
남자가 제 입으로 정답을 말해버렸다.
이 지나치게 자기객관화가 잘되어 있는 놈 같으니라구.
근데 뭐 저 정도 얼굴이면 스스로 잘생긴 걸 모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
황자도 눈이 달려 있어서 자기 얼굴을 맨날 볼 텐데 그걸 왜 모르겠어.
그렇지만 저렇게 뻔뻔하게 얘기하니까 왠지 인정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
맞다고 대답해주기 싫어서 묵묵부답으로 버티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침묵은 긍정으로 생각할게요.”
어우 짜증 나.
황자 얘 짜증 나.
나는 말없이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등에 콧기름이나 묻어라.
빛이 들지 않는 숲속이라 온도가 더 낮아서 그런가.
남자의 너른 등에 얼굴을 부비자 볼이 따듯하니 기분이 좋았다.
크고 단단한 데다 꺼지지도 않는 핫팩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외형도 멋진 핫팩이라니.
잘나긴 잘났다 요놈.
이 정도로 잘났는데 인정해주기로 할까?
어차피 본인도 잘 알고 있는데 뭐.
“맞아요. 긍정이에요.”
“….”
대충 ‘이미 압니다.’라거나 ‘그럴 줄 알았어요.’ 등의 대답을 기대했는데, 남자는 의외로 입을 다물었다.
“…?”
그러더니 천천히 등을 돌리고 고개를 꺾어 뒤에 앉은 나를 바라본다.
그가 제가 들은 말이 진짜냐는 표정으로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눈이 둥그레져서는 운전 중에 왜 뒤를 보고 난리람, 위험하게.
“아, 이보세요. 앞을 봐요 앞을. 나무에 박을 일 있어요?”
“….”
이미 자기 얼굴 잘난 거 아는 놈이 저 반응은 도대체 뭐람.
“남자 보는 눈 더럽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다 들렸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서 차마 반박을 못 하겠다.
“내가 보는 눈 없는 건 맞죠. 서제국의 2황자가 그런 놈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좋게만 생각했으니.”
“좋게만 생각했다구요?”
그가 이번에는 말과 동시에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그럼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단 겁니까?”
“아~~ 앞을 보라고요!!”
소리를 빡 지르자 그가 성난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았다.
좋게만 생각했다는 말이 그 의미가 아니잖아요.
왜 혼자 내 말을 곡해해서 듣고 화를 내고 그러실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 변태에게 마음이 있었다니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아무튼 그 얘긴 됐어요.”
“….”
이런 건 또 말을 잘 듣는다.
잠깐의 적막이 지나간 후, 조용히 앞을 보며 말을 몰던 그가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내 이름 알아요?’
“ㄴ… 네?”
와… 순간 나도 모르게 나일 리베르! 라고 소리칠 뻔했어.
나야 당연히 소설의 남주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모르는데.
내가 지금 그의 등 뒤에 앉아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버버했던 방금의 표정을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피터의 형이니까 음… 피터슨이려나?”
“진짜 이름이요.”
농담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그가 난데없이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름은 모르지만 당신이 동제국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이란 건 알죠. 나한테 얘길 했었으니까.”
“그것만 알고 진짜 이름은 모르잖아요.”
“...”
“당신은 질문이 너무 없어요. 그게 신기하고... 음.”
그의 이름을 알고 싶은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다.
“진짜 이름은… 내가 병사님 진짜 이름을 알아서 뭐해요.”
우린 호수를 넘으면 바로 헤어질 건데.
그리고 그 이후로 영영 안 볼 예정이라구요.
그가 말을 꺼내기 전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괜히 날 긴장케 했다.
“함께 동제국으로 가려면 적어도 이름은 알아야 하니까요.”
“….”
이별을 코앞에 두고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함께 어딜 가자구? 동제국? 내 목숨을 가져갈 저승사자가 있는 곳 말이야?
“왜 말이 없어요.”
“….”
“이 침묵도 긍정으로 생각할게요.”
그의 말에 놀라 빠르게 대답했다.
“아니요. 부정이에요. 난 안 가요. 당신이랑 같이 동제국엔.”
황자가 천천히 숨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내 팔을 통해 전해져왔다.
“왜 그렇게 동제국에 가길 꺼리는지 모르겠는데 이곳보다 훨씬 안전해요. 적어도 거기선 내가 당신을 지켜 줄….”
“안! 간다구요.”
“….”
그가 또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웠다.
남자가 줄줄이 말을 이어나가는 걸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급히 말을 잘랐다.
대충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당분간 서제국 2황자를 피해 숨어있으려면 동제국보다 안전한 곳은 없겠지.
남자가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한 친절은 필요 없어.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것도 안다.
하지만 괜찮아.
당신의 도움을 받는 건 호수를 지나 왕국의 동쪽으로 건너가는 것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까.
“왜 동제국에 가길 원치 않냐면요.”
말을 하는 내내, 그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내게 귀 기울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숲이 지나치게 조용한 탓이겠지.
“난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랐잖아요. 동제국엔 내가 원하는 게 없어요. 내가 해왔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은 다 여기 있다구요.”
“….”
“그런 내가 거길 혼자 가서 뭘 하죠? 솜인형처럼 우두커니 당신이 마련해준 방에 앉아있으면 되나요? 마음은 고맙지만 불필요한 친절이에요.”
이 정도면 그를 과하게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제대로 거절한 거겠지?
목구멍에 불편한 이물감이 들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는 이 짧은 시간이 불편해, 일부러 헛기침을 컥컥거렸다.
그가 조용히 목소리를 낸 것은 그다음이었다.
“왜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지금 깨달았어요.”
“….”
말투가 그답지 않게 너무나 건조했기 때문인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지만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헤어짐의 장소인 호수가 바로 이 앞에 다다라 있었다.
마지막을 그가 섭섭한 감정을 품게 한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있잖아요. 그쪽이 싫어서 안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알죠? 이건….”
제대로 이야기를 할 테니, 말을 멈추고 날 돌아봐 달라는 의미에서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으려 할 때였다.
- 쉬익
나는 팔을 마저 들어 올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소리를 들었을 땐, 이미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귀를 지나쳐 그의 오른쪽 어깨에 꽂혀있었으니까.
“으윽.”
순간 황자의 상체가 휘청였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으나, 화살을 쏜 사람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남자의 손이 허리에 감겨 있는 내 왼손을 세게 억눌렀다.
“허리 꽉 잡아요. 달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