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 아까 복도에서 저 여자 우는 거 봤지.”
자객비의 말에 자객에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객에이의 얼굴이 마치 죄인처럼 푸석했다.
둘이 있는 곳은 피비와 나일이 묵고 있는 방 바로 옆 방이었다.
원래 이 방에 묵고 있던 자는 금화 한 닢을 건네주니, 자기는 노숙이 취향이라며 즐거운 얼굴로 그들에게 방을 내주고 사라졌다.
“우는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어.”
“어, 엄청 슬프게 울더라.”
“….”
“그거 다 테오님 때문에 우는 거야.”
“응….”
자신들이 모시는 상관의 쓰레기 같은 행동 때문이라 생각하니, 둘은 멀쩡한 팔다리가 저리는 기분이었다.
“테오님께 답신 왔어?”
“어, 똑같아. 발견하는 즉시 데려오래. 남자는 죽이고.”
사실 둘은 피비와 나일을 찾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로 보아 남자는 말을 꽤 잘 다루는 측에 속하는 것 같았는데, 여자 때문인가? 달리는 속도가 굼벵이와 같았다.
그들을 발견한 둘은 잠시 고민한 끝에, 자신들의 상관인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계속 추격하겠습니다. -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돌아오라는 답을 살짝 기대했으나, 테오님께서 그럴 리 없지.
그들에게 날아온 답신은 처음의 명령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둘은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며 셀린 백작 부인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딸과 남자를 발견했고, 둘은 서제국 군인으로 변장을 한 채 동쪽으로 도망 중이다, 2황자님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편지 했으니 그리 알아라, 라는 내용이었다.
부인의 답신은 빠르게 날아왔다.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딸과 딸이 동행 중인 남자를 보호해 준다면 약속했던 금액의 두 배를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여자랑 남자 둘 다 놓쳤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자객에이의 물음에 자객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능력 없는 친위대면 내치시겠지.”
“응, 아마… 그럴 거 같아.”
입술을 깨물며 한동안 고민하던 자객에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여자는 놓친 걸로 해도, 남자는 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시체라도.”
백작 부인의 요청은 두 명 모두의 안전이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한 건 딸의 안전이었다.
딸과 함께 있는 남자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은, 그 남자가 제 딸을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으니까.
어차피 딸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남자는 효용성을 잃을 것이다.
“너도 알지, 우리 취향이 쓰레기인 거.”
자객비가 제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닌 갑자기 취향을 언급하자, 자객에이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쓰레기 같은 짓을 일삼는 사람을 사랑하면 그게 쓰레기 취향인 거다.
그에게 반했던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자객비가 낮게 자조하며 말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 사랑이 그를 더 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
“테오님이 쓰레기 같은 명령을 한다는 걸 알지만, 그러면서도 우린 그를 돕고 그의 명령에 따르잖아.”
“모르겠어 난….”
자객에이가 괴롭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에게 다가온 자객비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빨리 고민해야 해, 시간이 없어.”
“….”
*
테오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구겼다.
추격대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아직 셀린 영애와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잔뜩 예민해진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그가 왼편에 앉은 부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추격대를 더 짜, 더 보내.”
대답이 들려온 것은 오른쪽에 앉아 있던 부하였다.
“하지만 2황자 전하, 그 둘은 친위대 내에서 가장 빠르고 실력이 좋은 자들입니다. 그 둘이 찾지 못했다면 다른 팀을 보낸다 한들….”
제 의견을 열심히 피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2황자의 날 선 눈빛이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다 놓치면, 네가 책임질래?”
테오의 기분이 매우 저조하다는 것을 눈치챈 왼쪽의 부하가 오른쪽 부하에게 급히 눈짓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시선이었다.
본전도 찾지 못한 오른쪽 부하가 입을 다물었다.
“신입 중에 발이 빠르고 활을 잘 쏘는 이가 있습니다. 그를 보내겠습니다.”
왼쪽 부하의 말에 테오의 표정이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보내. 다 보내서라도 잡아 와. 내 앞에 꿇려.”
“알겠습니다. 2황자 전하.”
*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하늘 높이 치솟은 백주대낮이었다.
어우 눈이 안 떠져.
도대체 얼마나 퉁퉁 불었길래 아예 잘 떠지지도 않는 거지?
침대에서 굼적굼적 일어나 방을 둘러 보았지만 허름한 여관방엔 거울 비슷한 것도 달려있질 않았다.
내 얼굴 상태 좀 봤으면 싶은데.
그때, 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찾아요?”
“….”
“여기 거울 없어요. 내가 봐줄게요.”
얼굴 상태를 봐준다는 말에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앉았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아 보이려, 이마에 잔뜩 힘을 줘서 떠지지 않는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저 남자 왜 내가 아닌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거지?
“얼굴이 아주 뽀얗고 잡티 하나 없는 게 숙면한 사람의 얼굴이네요.”
황자는 내 얼굴 쪽으론 고개도 안 돌려놓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부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얼굴도 안 봐놓고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네요?”
내 말에, 남자의 입에서 큰 실수를 했다는 듯 ‘아차!’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천연덕스럽게 미소지었다.
“아, 여기가 영애고 거기는 개구리인 줄. 미안해요.”
그가 아주 뽀얗고 잡티 하나 없는 흰 베개를 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불 속에 감춰져 있던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냥 이제라도 죽일까?
원래 나 결정 번복하는 거 잘하는 사람인데.
마비독도 없고 아무 도구도 없지만, 지금 같아서는 맨몸으로도 가능할 것 같았다.
“누가 잘 모르는 병사의 얼굴을 신경 쓰겠어요. 괜찮아요.”
그게 괜찮다는 말이니?
너는 말끝에 괜찮다는 말만 붙이면 괜찮다는 의미가 되는 줄 아나 보다?
남자는 괜찮지 않다는 말을 웃으면서 내뱉고 있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자식.
앞으로 내 이상형은 거짓말을 잘하는 남자다.
분노로 몸을 떨며 황자의 얼굴을 바라보니, 상앗빛 그의 얼굴 위로 피곤한 기색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침대가 하나인 게 뻘쭘해서, 그냥 내가 침대에서 자겠노라고 막무가내로 선언해 버렸으니 어제 소파에서 구겨져 자거나 바닥에서 잤겠지.
“잠은 좀 잤어요?”
“덕분에.”
분노를 제어하며 물은 말에 들려온 대답은 딱 세 글자였다.
덕분에 잘 잤다는 말인가 덕분에 잘 못 잤다는 말인가.
뒤에 무언가 더 말을 해줬으면 싶은데,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입가에 미소만 띠고 있었다.
그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
지도 위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사선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해야 할 곳이 여기.”
남자의 손가락이 도착한 곳엔 라울 호수라는 명칭이 달려있었다.
‘생각보다 크구나.’
지도에 표시된 라울 호수는 크기가 이 마을보다도 훨씬 컸다.
이곳이 워낙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라울 호수는 내 생각보다 꽤 큰 호수였다.
“이곳에서 호수까지 작은 마을이 두 곳 더 있는데, 중간에 들리지 않고 곧장 호수로 향할지 들릴지는 가면서 정합시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쭉 가면 좋겠지만 한나절이나 말을 타는 일은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한나절을 꼬박 달려야 할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달리다 천천히 가다 할 거예요. 전속력으로 달리면 반나절이면 가능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말을 타는 건 힘든 일이니까.”
헤에, 그렇다는 말은, 황자 혼자서 말을 타고 달리면 3시간이면 가능한 걸 나 때문에 6시간에 걸쳐 간다는 말이네.
“그냥 나 여기다 두고 가는 거 어때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당신의 짐 같은데.
물론 황자와 함께 호수를 건너 왕국의 동쪽 지역으로 가면, 내가 서제국 2황자에게 잡힐 가능성은 현격히 줄겠지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꺼내자 그가 나를 가소롭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누구 좋으라고 그쪽을 여기 두고 갑니까?”
‘누구긴, 너.’
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내뱉진 않았다.
같이 가준다는데 뭐 조용히 있어야지. 헤헤.
*
천천히 걷는 말 위에 올라탄 서제국 일반병사 두 명을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은 그저 평소처럼 제 할 일을 하기에 바빠 보였다.
마을 사람이건 돌아다니는 서제국 병사건 그들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서제국 병사 복장이 아니라 동제국 병사 복장을 하고 있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은 태평한 모습이었다.
건초를 잔뜩 먹은 말의 발걸음은 가볍게만 느껴졌고, 나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식사거리를 구입할 수 있었다.
“뭐 샀어요?”
그가 말에 오르는 나를 거들며 물어왔다.
“체리랑 크레페요. 말을 안 해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맛으로 샀는데 괜찮죠?”
“달아 보이는 거로 산거에요? 체리 잘못 사면 신데.”
내가 골라 산 과일의 당도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매번 내가 고른 과일은 잘못 고른 과일이라 말했던 우리 할머니 같은 모습이라 소름이 돋았다.
“그럼 달아 보이니까 샀지 시어 보이는 걸 샀겠어요?”
“하나 줘 봐요. 맛보게.”
“하참.”
나는 남자의 등 뒤에 앉아서, 고개를 돌린 그의 벌어진 입으로 검붉은 빛이 먹음직스러운 체리 한 개를 쏙 넣어주었다.
“맛있네.”
“...”
“말 위에서 먹으면 위험해요. 일단 마을을 빠져나가서 잠시 세워두고 먹고 갑시다.”
“좋아요.”
황자가 말등자를 디딘 발로 가볍게 말의 몸통을 치자 푸르릉거리며 검은 말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날은 화창했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수상한 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순조롭게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대로 순탄하게 길을 가서 호수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저 순조로워 보였으니까.
허나 위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추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