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멱살을 잡고 불빛이 있는 복도로 그를 끌어내자, 끌려 나온 그는 열쇠를 주고 간 종업원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여자가 이렇게나 울음을 터트려버린 걸까.
촛불이 매달린 벽 가까이 남자를 끌어당기자, 그림자가 사라지며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누군갈 닮았는데.’
장발의 남성은 어디서 본듯한 착각을 일으켰지만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외모였다.
닮은 이를 떠올리려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던 나일은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더군다나 들어야 할 말이 있다면 놈의 입에서 나오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나일은 복도 벽에다 그를 패대기쳤다.
벽에 몸통박치기를 한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윽….”
“너 이 새X 뭐했어.”
나일은 팔뚝으로 놈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벽과 나일의 팔뚝 사이에 갇힌 그가 숨을 컥컥거렸다.
“아, 아무것….”
“뭐?”
“아무것도, 아무것도 전 안 했어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판단한 나일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힘으로 그를 들어 올렸다.
제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 시작하자, 들어 올려진 남자가 발끝으로 선 채 몸을 좌우로 버둥거렸다.
나일의 팔 위로 눈물이 묻어있는 여자의 작고 흰 손이 드리운 것은 그때였다.
돌아보자 여자가 울먹이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만.”
“…?”
“하지 말아요. 그 사람 말이 맞아요.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이에요.”
기다렸다는 듯, 의문의 남자의 입에서 억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맞아요! 저는 그냥 여기 종업원이라구요! 방에 물을 두고 나왔을 뿐이에요!!”
그제야 멱살을 틀어쥔 나일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 찰나를 놓칠세라, 자신을 남자 종업원이라고 주장한 그가 나일의 손을 급하게 풀고 도망쳤다.
순간 도망치는 남자의 뒤를 따르려던 나일이, 뒤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미약한 힘에 걸음을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여자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옷깃을 당기고 있었다.
“으흑….”
분명 제 눈앞에서 사람이 울고 있는데도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 여자는 울 때도 큰 소리를 낼 줄 모르는구나.’
여자가 제 안으로 꾹꾹 소리를 삼키며 흐느끼고 있었다.
큰 눈에서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방울 때문에 두 볼이 엉망이었다.
나일은 여자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뒷머리를 제 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기자, 여자가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아왔다.
“저 사람, 흑… 똑같은 보라색 눈이라… 순간 착각해서… 흐윽….”
그랬던 거구나.
여자가 훌쩍이며 그 말을 뱉은 후에야 나일은 도망친 남자 종업원이 누구를 닮았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긴 생머리와 보라색 눈동자가 서제국의 2황자와 똑 닮아있었다.
그는 그들이 도망쳐 온 셀린가의 방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을 찬찬히 훑었다.
- 나 다리 괜찮은데. 헤헿.
- 이것 봐요. 나 괜찮아요. 당신이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괜찮냐는 질문에 여자는 제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게 웃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다친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며 되물어올 뿐이었다.
내가 뭘 했더라, 내가 여자에게 뭘 물어봤더라.
여자가 다친 곳은 없는지 팔다리는 멀쩡한지 살폈고, 얼굴은 괜찮은지 들여다봤고 턱이 부었길래 내내 그것을 살폈다.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중에 마음도 괜찮냐는 질문이 있었나.
한 번도 물어보질 않았구나.
마음이 다친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다쳤고 얼마나 무서웠는지는 한 번도 묻질 않았어.
제 목에 감겨 우는 여자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보고 놀라 이렇게 겁먹을 정도인데도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으려고 일부러 밝게 웃었던 거구나.
그래서 일부러 더 제게 장난치고 농담하고.
여자는 애쓰고 있었는데 나는 멍청하게 그 웃음에 속아 넘어가 버린 거다.
목에서 느껴지는 가는 팔의 떨림이 멈출 줄을 몰랐다.
이렇게 계속 떨다가 톡 부러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지만, 그의 양손은 여자의 등을 감싸 안지 못하고 허공에서 맴돌 뿐이었다.
미안하다고 말을 하기 전에는 손을 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가슴팍이 축축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나일은 제 입술을 짓씹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입을 막 벌렸을 때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죄 없는 사람한테 폭력을 쓰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을 뱉은 것은 자신이 아닌 품속의 여자였다.
공포에 질려 이미 둥글게 말린 어깨가 아직도 들썩이는데, 여자가 고르지 못한 호흡을 눌러가며 얘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빨리 말해야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아서….”
“….”
“이래서 내가 눈물 짜는 걸 싫어해요. 할 말이 있어도 목이 메서 말이 안 나와 말이….”
“….”
“아니 무슨 종업원이 변태 놈이랑 똑같이 생겼을 줄 내가 알았냐구… 근데 또 다시 보니까 그렇게 닮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근데 놀라서….”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막 늘어놓는다.
이게 이 여자의 특기인 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쉬이 농담하고 여러 말을 쉼 없이 늘어놓으면서 상대에게 자신을 괜찮은 상태로 포장하는 것.
그녀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려니 가슴이 저렸다.
그가 질세라 말을 뱉었다.
여자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는 또 바보처럼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나도 미안해요.”
“흑, 네? 나는 미안한 일을 해서 사과하는 건데 그쪽은 왜 사과해요?”
“나는, 나는 다요. 다 미안해요.”
제 표정이 궁금한 것인지, 품속의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나일은 여자의 뒷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꾹 줬다.
“아, 좀 놔 봐요. 왜 미안하냐구요. 아 숨 막혀.”
“….”
“나 모르게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괜찮죠. 망할 놈 때문에 내 소중한 눈물 흘린 게 아까워서 그렇지.”
“그럼 다 운 거예요?”
“다 울었죠 그럼. 이깟 일로 더 울겠어요?”
그 질문에 여자가 고개를 가만가만 끄덕였다.
그는 여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더 울어요. 그럼.”
“다 울었다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다 울었다니까요.”
“….”
“다 울었….”
목이 멘 여자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중간에서 말을 삼켰다.
여자가 흐느끼는 것을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체하지 말고 다 토해내라는 듯, 여자의 등을 쓸면서.
*
작은 방엔 한 개의 침대와 그 옆에 낮은 협탁이, 낡은 소파와 테이블이 다였다.
나일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은 채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세상에 고민 한 점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던 그는 침대 옆 협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가 먹다 남은 육포가 남아 있었다.
여자는 쓸데없이 우느라 소모한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며 열심히 육포를 뜯은 후 잠이 들었다.
- 울고 나서는 먹어야 해요.
- 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왜 내가 아니라 육포인 거지?’
도대체 이 여자는 속이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길래, 왜 멀쩡히 옆에 있는 사람을 놔두고 고기 말린 것 따위에게서 위로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 여자 실은 지독한 인간 혐오를 가진 사람인가?
내가 마네킹도 아니고 두 팔 벌려 안아줄 수도 있고 얼마든지 위로도 해줄 수 있는데 왜 육포 따위에게 밀리… 하….
정말 기분이 더 나빠질 것 같으니까 밀렸다는 말은 되도록 쓰지 말아야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인상을 쓰며 제 이마를 짚었다.
여자가 지금 저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이 아닌 말린 고기에 있었다는 생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일은 여자가 너도 배고프지 않냐며 좀 먹으라고 건네준 육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을 거칠게 집어 벽난로 속으로 내던졌다.
장작불 속에서 활활 타는 육포를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게다가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좀 불편한 대상으로 인식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열심히 울고 방에 들어온 여자는 육포를 뜯는 것에 남은 온 힘을 쏟아 부은 후.
- 침대가 한 개라 어쩔 수 없네. 그쪽은 소파서 자요.
하더니 정말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숙면에 들어갔다.
‘어쩜 저리도 편안한 얼굴이란 말인가.’
내일 말 타고 오래 달려야 하니 푹 자라고 제가 말은 했지만, 진짜 저렇게 푹 잘 줄은 몰랐네.
“으….”
그때, 침대 위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내자, 소파에 있던 나일의 몸이 그녀 옆으로 튀어나갔다.
악몽을 꾸는 건가, 여자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일은 여자 옆에 앉아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아, 다시 펴진다.
불편해 보였던 얼굴이 다시 편안함을 되찾는다.
그는 여자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침대 위에 누웠다.
슬슬 해가 뜰 시각인가.
창밖에서 들어온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여자의 얼굴 위로 내려앉는 것을, 턱을 괸 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잘 자면 된 거지.’
나일은 여자의 머리카락 끝을 제 손끝에 넣고 비볐다.
밝은 금발이 새벽의 희미한 빛에도 제 몸을 빛내며 그의 손가락으로 말려들었다.
그는 다시 여자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선연한 녹색 눈망울이 들어있을 여자의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가, 살짝 벌려진 탐스러운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언젠가.
지금은 육포에 밀리는 신세지만, 옆에서 계속 맴돌다 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이 여자가 내게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오지 않을까.
이 여자가 먼저 손 내밀어 나를 끌어안고, 먼저 입 맞춰주는 때가.
그러려면 동제국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날이 밝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 위 드리운 빛에서 점점 푸른 기운이 빠져나갔다.
조심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소파로 돌아갔다.
*
자객비는 계속 벽에 귀를 붙이고 있는 자객에이를 쳐다보았다.
열심히 귀를 대고 있어봤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쓸데없는 것뿐인데, 뭐 하러 팔 아프게 저러고 있담.
자객비가 자객에이를 향해 말했다.
“걔네 오늘 아무 일도 없어.”
드디어 벽에서 귀를 뗀 자객에이의 얼굴은 몹시도 실망 가득한 표정이었다.
“얘네 그냥 자나 봐….”
어쩜 이래, 자객에이가 볼멘소리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