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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30)화 (30/134)

30화

성치 않은 몸 상태로, 말을 타고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더니 몸이 한계에 달한 듯했다.

너무 오랜만에 능력을 사용한 충격으로, 거의 멀어버리는 수준까지 갔던 시력은 다행스럽게도 짧은 기절 후 이전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몸에서 능력을 방출한 후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

등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여자의 팔이 미약하게 느슨해졌다.

그런 큰 사건을 겪고,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말을 탔으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할 게 뻔했다.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눈 붙일 곳이 필요했다.

야영을 할 수 있을 만한 장비도 갖추지 못했고, 이런 날씨에 여자를 밖에서 재울 수도 없었다.

이 정도 달렸으면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어 불빛이….’

길 끄트머리에서 미약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때, 여자가 자신의 등을 콩콩 두드렸다.

“워워.”

나일이 달리던 말을 멈춰 세웠다.

“저 앞에 불빛 보여요? 바로 이 앞이 마을이에요.”

“어디요?”

제 몸이 여자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서, 그녀가 앞을 보기 위해 고개를 밖으로 빼는 모양이었다.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기 위해 여자가 그의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을 주는 통에, 나일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와 피곤하니까 앞이 안 보인다 와.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여자가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좌우로 몸을 왔다 갔다 해댔다.

등에 닿아 있는 여자의 몸이 자꾸 움직일 때마다, 붉어진 그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분명 서로의 신체가 닿아 있는 게 이렇게나 느껴지는데….

‘이 여자 피부 신경이 강철로 되어있나.’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무신경하게….

“오~ 있네 있네. 와, 이제 좀 쉴 수 있겠네요.”

저 덤덤한 말투로 봐서 역시 그녀는 강철 피부가 맞는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하죠?”

“1분 달릴 때마다 엉덩이가 1밀리씩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럼 지금 엉덩이가 없는 거예요?”

“그럼요. 지금 허리로 앉아있는 건데?”

등 뒤로 꺄르르 넘어가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바삐 숙소를 찾는 게 먼저였다.

“허리 다시 잡아요. 빨리 가서 쉬어요, 우리.”

“잠깐만요.”

말과 함께 여자가 폴짝 아래로 뛰어내렸다.

말에 매달린 짐꾸러미 안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꺼낸 물건은 서제국 일반 병사들이 입는 군복이었다.

“귀족 영애와 남자로 이루어진 팀을 누군가 추격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드레스 입고 돌아다니면 더 눈에 띌 테고.”

“아….”

“마을 들어가기 전에 갈아입게, 망 좀 봐요.”

여자가 군복을 들고 폴짝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

수풀 속을 헤치고 들어간 나는, 엄청 오래 산 듯한 기둥이 굵은 나무를 찾아 잔가지에 마나전구를 걸었다.

그가 푸르릉대는 말을 이끌고 뒤를 따라왔다.

황자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는 것을 확인 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으.”

추워 죽겠는데 서서 스타킹을 벗으려니 굳은 몸이 휘청거렸다.

이 망할 놈의 드레스는 벗을 게 너무 많았다.

다시 집중해서 열심히 벗는데, 주변이 참 조용하기도 하지.

잔바람에 풀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가 가끔 들렸고, 풀벌레 울음소리도 가끔 그 속에 섞여 들려왔다.

그 외의 소리라고는 내가 옷을 스륵스륵 벗는 소리뿐이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은근 농담도 잘하고 엄청 무뚝뚝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꼭 이렇게 잡음이 필요할 때 남자는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말해주는 게 어때요.”

“…뭘요?”

“아까 물어봤는데, 말 위에서 얘기하면 혀 깨문다고 대답 안 해준 거요.”

그와 저택을 빠져나오며 물어본 것이 있었다.

동제국으로 향하고 있어야 할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며, 왜 다친 건지.

“날씨가 추워요. 얘기할 정신이 있어요? 옷 빨리 갈아입어야 감기 안 걸릴 것 같은데.”

헤에. 저거 봐 저거. 또 피한다.

뭐 그래. 내게 자신의 정체를 다 털어놓은 게 아니니까, 그 나름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숨기는 게 이해가 가면서도 그것이 못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천연덕스럽게 회피해 놓고, 그가 내 몸 상태를 물어왔다.

“턱은요? 안 아파요?”

“글쎄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빈정대는 내 대답에, 나무 기둥 뒤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곳은 어때요. 말을 정확히 안 하면….”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매몰차게 대답했다.

“내 몸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 정말.”

“으악.”

이 남자가 미쳤나.

나무 기둥 뒤에서 남자가 갑자기 걸어 나오는 바람에, 옷을 미처 다 갈아입지 못했던 나는 급하게 드레스를 내던졌다.

머리에 드레스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시 얌전히 기둥 뒤로 돌아갔다.

“미안합니다.”

“알면 됐어요.”

마저 옷을 갈아입는데 기둥 뒤에서 황자가 혼자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 되게 작네.”

“이게 들어가나?”

“어?”

대충 옷을 다 갈아입고 기둥을 돌자, 그가 내 드레스의 팔 부위로 제 팔을 집어넣고 어쩐지 즐거워하고 있었다.

팔 부위의 천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뜯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해요?”

“아, 이 옷 다시 입을 거 아니죠?”

“그렇긴 한데….”

“다행이다.”

주섬주섬 드레스를 구겨 가방에 넣은 그가 내 앞에 서서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내 목 부근으로 손을 뻗었다.

당황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데, 그의 손이 내 셔츠 깃을 잡아채는 게 더 빨랐다.

“여기 셔츠 잘못 넣어 입었어요.”

그야, 군복을 직접 입어본 건 처음이니까.

그가 알아서 셔츠 깃의 모양을 바로잡길래 나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셔츠 깃의 모양을 내는 게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가 내 뒷목 부분의 모양도 잡기 위해, 내 어깨 위로 슥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화가 났어요?”

남자가 귓가에 대고 물어오는 통에, 상체가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난 화낸 적이 없는데? 대답을 피하는 당신이 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내가 언제 화가 났어요?”

“지금 난 것 같은데.”

내 어깨 위에서 히죽 웃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얼굴이 있는 쪽을 흘깃 보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눈을 맞춰왔다.

“아 이게 모양이 잘 안 잡히네.”

그는 셔츠 깃의 모양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내 어깨 위로 제 턱을 올렸다.

“장난치지 말아요.”

“아닌데, 그럼 직접 할래요?”

“….”

“…어깨 되게 가냘프다.”

“가냘픈 어깨에 얼굴이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무겁겠어요?”

내 말에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몸 상태는 정확히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자기는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하는 게 없으면서.

“병사님 되게 공평한 사람이네요?” 

“됐다.”

깃을 만져보자, 각이 딱 선 게 잘 보이진 않지만 제대로 만진 듯했다.

옷도 다 갖춰 입었으니 이제 가볼까, 몸을 돌리는 데 그가 휙 내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세웠다.

“봐요. 나는 팔뚝이 이만하잖아요. 그쪽은 요만하구요. 그럼 누가 더 몸에 신경을 써야겠어요?”

그가 제 팔뚝을 굽혔다 펴 보이길 내 눈앞에서 반복한 후, 내 소매를 잡고 내 팔과 자신의 팔을 나란히 했다.

내가 무슨 그림 그려줘 가면서 설명해야 하는 유치원생이냐.

“….”

“아픈 데 없는 거죠?”

“아 없어요. 없으니까 말을 안 하지.”

“가죠. 그럼.”

그가 가볍게 내 소맷자락을 잡고 끌었다.

자기는 핏물을 토해놓고 입 닫았으면서, 하여튼 오늘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피비와 나일이 있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 가장 큰 나무 위였다.

풍성한 나뭇잎 속에 몸을 숨긴 두 남자가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검은 자객의 복식을 갖춰 입은 자객에이가 자객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악!”

나무 위에서 위태롭게 졸던 자객비가 제 옆구리를 만지며 물었다.

“쟤네 얘기 다 끝났냐?”

“어, 이제 이동할 것 같아 일어나.”

옆구리를 찔렸는데도 여전히 졸음이 가시지 않는지, 자객비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객에이에게 질문했다.

“네 생각엔 쟤네 둘 지금 저기서 뭐 하는 것 같냐.”

“사랑놀음.”

“….”

“둘 다 쫓길지도 모른다는 심각성이 전혀 없어.”

혀끝을 끌끌 차는 자객에이의 말에 자객비가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현실이 눈에 안 들어오지. 우리도 그랬잖아.”

“….”

둘은 나무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둘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모양새가, 복사한 듯 닮아있었다.

“어쩔래.”

“….”

“너도 안 내키지?”

“쟤네 되게 풋풋한 거 보니까 되게 옛날 생각나고 그런다.”

“나도 그래. 지금 한창 좋을 때 아니냐.”

자객에이와 자객비, 그 둘은 서제국 2황자의 친위대 멤버였다.

2황자가 지금 같은 권력을 갖기 전부터 그 둘은 2황자 밑에 있던 이들이었다. 

테오 세리에는 그 잘난 얼굴로 둘을 각각 유혹했고, 둘은 2황자를 연모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2황자의 유일한 상대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수집하듯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점점 2황자는 변질되어 갔고, 자신들을 그의 도구처럼 함부로 사용하는 그의 행태를, 이제는 점점 용서하기가 어려워졌다.

오늘도 2황자의 명령에 따라, 여자를 쫓아오긴 했으나, 역시 내키지 않았다.

그들의 상관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부인이 준 돈이면 내려가서 편하게 살 수 있어.”

“응.”

그래도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저택을 나서는데, 그 둘의 앞을 셀린 백작 부인이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면서.

- 내 딸을 발견하면 2황자가 아닌 내게 먼저 알려줘요.

그들 손에 거액의 돈을 쥐여 주면서 말이다.

“그 부인 참 예리한 사람이지?”

“그렇지. 보통 모르잖아, 아니 보통이 아니라 100명 중 99명은 눈치도 못 채지.”

“….”

“어쩔래.”

“부인의 요구에 남자는 없었어.”

자객비의 말에 자객에이가 복면 안쪽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지켜보자.”

그 말과 함께, 나무 위 두 인영이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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