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나는 남자의 품속에서 그의 호흡을 살폈다.
남자의 호흡이 꽤 가빴다.
아무리 봐도 괜찮지 않은 건 나보다 본인 같은데, 아 모르겠다.
품 안에서 그의 호흡이 안정되길 기다렸다.
조용히 안겨있자, 들썩이던 그의 가슴이 점점 편안하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확실히 남자의 신체는 크고 단단한 감이 있구나.
이렇게 꽉 끌어안기니까 신체적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쿠션을 끌어안거나 이불 속에 파묻히는 푸근함과는 다른 안정감이었다.
폭신폭신하면서 푸근한 게 아니라 단단하면서 푸근하니까… 오 나쁘지 않네 이거?
“와 병사님 상체가 되게 튼튼하네요. 역시 군인은 군인인가.”
“모든 군인이 다 이렇진 않죠.”
“호오?”
근데 이거 은근 로맨틱한 상황 아닌가?
날 걱정하는 남자의 품속인 거잖아.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오래 머물러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처리해야 할 변태가 방바닥에 누워있었으니까.
“야! 너네들 뭐하냐!? 이거 풀라고. 내가 누군 줄… 아악!”
어느새 천 뭉치를 뱉어내고 함부로 말을 지껄이던 변태가 남자의 발길질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나를 안은 상태에서 한쪽 다리로 버티면서, 한쪽 다리로는 발차기를 날릴 수 있다니.
소설의 주인공 버프인가, 하체 코어힘이 대단했다.
“모든 군인이 저처럼 하체가 튼튼하진 않죠.”
“푸흡.”
품속에서 실소를 터뜨리자, 끌어안고 한참을 놔주지 않던 그가 팔을 풀고서 내 얼굴을 살폈다.
아, 그가 날 따라 웃는다… 웃는데 그 웃는 안색이 너무….
“이봐요 병사님!!”
희미하게 미소짓던 그의 눈이 감기면서, 남자의 손이 내 팔뚝을 타고 힘없이 흘러내렸다.
“저기요!!”
내 품속으로 미끄러진 그의 머리를 안고서 몸을 흔들었지만 그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앞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
‘죽는 줄 알았다는 그 말이 설마 진짜였냐고.’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마자, 죽은 줄 알고 놀라서 그의 코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그의 머리 밑으로 베개가 될 만한 것을 집어넣고, 남자의 상태를 지켜본 지 대략 1시간 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좌 동제국 황자, 우 서제국 황자네.’
좌측에는 동제국 황자가 쓰러져 있고, 우측 벽에는 동제국 황자의 발길질을 맞고 굴러가, 벽에 머리를 꽈당하고 기절한 서제국 2황자가 있었다.
도대체 내 방에서 이게 무슨….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감금 폭행, 성폭행 미수로 2황자를 고발한다 한들 그게 제대로 먹힐까.
나는 그제야 피비의 옛 친구가 친히 편지까지 보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게 시도했던 몹쓸 짓을 이미 여러 번 저질렀겠지.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모범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입막음을 해왔다는 소리고.
‘죽일까.’
걍 죽여 버릴까.
적법하게 응징하긴 이미 그른 것 같고, 그럴 수 있다 해도 이런 놈들은 개과천선이 안 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냥 여기서 내가….
‘그럼 가족한테 아무 영향이 없으려나.’
셀린가의 저택 안에서 서제국의 황족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면, 왕국이야 내 알바 아니지만 셀린가가 문제였다.
약소국의 백작가가 아무 타격 없이 이 일을 헤쳐 나가지는 못하겠지.
마음이야 백번 해치우고 싶지만, 이 일을 굳이 살인사건으로 키워서 내게 득 될 건 없어보였다.
“으.”
왼쪽에 쓰러져 있던 남자에게서 신음이 들려왔다.
“일어났어요?”
“어떻게….”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만 대화는 가면서 해요. 일단 일어나죠.”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일찍 일어나는 사용인들은 새벽 5시면 일어날 텐데.
“어딜 가겠다는….”
“어디긴요. 우리가 원래 함께 가려고 했던 곳이요. 나 이 저택 뜰 거예요. 움직일 수 있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창백했던 안색이 어느 정도 제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어선 그가 재킷 안쪽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단검은 왜 꺼내요.”
나는 단검을 쥔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우린 안 죽여요.”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가면 당신한테 해를….”
“이봐요.”
자꾸 기절해 있는 2황자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평화 협정을 위해 온 2황자가 여기서 죽으면 협정이 맺어질까요? 원했잖아요. 전쟁이 끝나기를.”
“….”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안 돼요. 나도 걱정되는데 이건 일을 더 키우는 일이에요. 나한테도 생각이 있으니까… 알겠죠?”
내 턱으로 내려갔던 그의 시선이 다시 올라와 내게 눈을 맞췄다.
그가 입술을 질끈 물었지만, 이내 체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아! 잠깐만요.”
책상으로 가 급하게 두 장의 쪽지를 작성한 후, 2황자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행적이 새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입막음을 해왔던 사람이다.
평화 협정을 위한 사신으로 올 만큼, 서제국에서 자기 위치를 견고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한 마디로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제가 가진 것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길 바라며, 그의 상의 주머니 속으로 쪽지 한 장을 밀어 넣었다.
*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세숫물 들일까요?”
하녀가 방을 두드렸지만, 그녀의 아가씨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일어나시는 시간이 지났는데….’
자신의 허락 없이 방에 들지 말라는 아가씨의 말이 있었지만, 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이 어쩐지 오싹했다.
잠시 고민하던 하녀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어차피 잠겨 있겠지만.’
아가씨는 방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문을 잠가 두시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에 손을 댔지만 잠겨있을 게 뻔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으신 거겠지, 확인만 하고 이따가 오자, 하는 생각으로 하녀는 문고리를 돌렸다.
- 벌컥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제 문 잠그는 걸 깜빡 잊고 주무셨나?
아가씨가 침대에 계시는 지 확인만 하고 닫자, 그녀가 문을 쭉 밀었다.
“아가씨…?”
곱게 정리된 침대 위엔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가씨가 없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어디계세요??”
방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녀는 세숫대야를 테이블 위에 두고 방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방이 지나치게 추웠다.
“여기 계세요?”
방에 딸린 작은 방까지 뒤졌지만 아가씨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가씨!!”
사색이 된 그녀가 방을 나가 계단으로 달려 나갔다.
*
“제대로 치웠어?”
“예. 2황자 전하.”
테오는 제게 머리를 조아리는 부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목 끝까지 채워진 셔츠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던 다른 부하가 손에서 얼음주머니를 떨어트렸다.
테오는 제 무릎 위로 떨어진 얼음주머니를 주워 부하의 얼굴로 집어던졌다.
“이 새끼들이…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이….”
“죄송합니다. 황자님.”
“니들 상관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던 새끼들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어제는 미리 어떤 언질도 없이 행동하신 거라 저희가….”
“안 닥쳐!??”
그는 일을 치기 전, 항상 부하들에게 알리고 준비를 시켰다.
장소를 정리하고, 입단속을 하는 등 사후에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다만 어제는 그러질 못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일을 벌였고, 그 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은 다 제각기 무도회를 즐기고 있거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
술로 엉망이 된 속을 게워내던 부하 한 명이, 테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그 방에 흉측한 꼴로 묶여 있다가 이 저택의 하녀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몇 시간 전 일이 생각 난 그는, 제 분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잡아와.”
“….”
“여자 말고 한 놈이 더 있다. 같이 있을 테니까, 둘 다 잡아와. 어려우면 남자는 죽여도 돼. 시체만 가져와.”
“여자는….”
- 쾅
테오가 날린 주먹에 부하가 뒤로 나가떨어지며 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살벌한 그의 눈빛에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내 말 못 들었어? 여자는 곱게 데려와. 상처 하나 내지 말고 내 앞에 가져다 놔.”
“알겠습니다.”
“….”
“그럼 이 일은… 이대로 덮기엔 여자가 전하께 너무 무례한 일을 저질렀는데….”
여전히 눈치가 없는 부하의 말에, 테오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게 걱정이면 정신 차리고 날 보좌했어야지.”
“….”
“이 일이 새 나가서 나대신 형님이 협정을 맡게 되면, 그래서 내 공적이 사라지면 네가 책임질래?”
“아….”
“넌 내가 황태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알면 입 다물어. 잘 들어라. 입도 뻥긋 하지 마. 조용히 여자만 데려와라.”
말을 마친 그가 제 상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쪽지를 빼 펼치자, 짤막한 문장이 보였다.
- 네놈이 나서지 않는다면, 나도 입 다물어 줄게. 너 가진 게 많잖아? 계속 지켜. 그리고 저택에서 조용히 사라져 -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똑똑
“쉿.”
테오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댔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닫았다.
“2황자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셀린 백작과 그의 식솔들이었다.
테오가 눈짓하자, 부하가 방문을 열었다.
“아이구, 2황자님….”
서제국의 2황자에게 손을 내밀며 고개를 숙이는 셀린 백작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뒤로, 역시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백작 부인과 장남이 보였다.
“우리 딸애가….”
테오가 떨리는 셀린 백작의 손을 친절하게 마주잡았다.
어느새, 노기가 가득 찼던 이전의 얼굴은 온대간대 없고, 걱정스러움과 친절함으로 무장한 2황자의 얼굴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걱정 마시오. 셀린 백작. 셀린 영애를 찾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2황자 전하….”
백작이 체면도 잊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가 한결 더 염려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사람을 풀어 찾을 겁니다. 좋은 소식이 곧 있을 테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그 말에 셀린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거듭 감사를 표했고, 그 뒤에 서 있던 백작 부인만이 2황자의 이마를 빤히 바라보며 손에 쥔 쪽지를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