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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7)화 (25/134)

27화

“우리의 계획은 말이지.”

2황자의 머릿속 필터링은 내가 알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진 게 분명했다.

나는 분명, “날 어떻게 할 거니” 라고 물었는데 왜 돌아오는 대답에서는 우리가 되어 있을까.

“우리는 오늘 밤 함께 있을 거야. 그래서 단숨에 친해지는 거지.”

자기식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마무리하며 2황자는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는 신박한 대답에, 누가 자꾸 후라이팬으로 내 머리를 때리는 것처럼 정신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계획을 세운 거야?”

정말 궁금해서가 반, 질의응답 시간이라도 가져서 누가 나를 발견해주길 원해서가 반인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냐니, 네가 원했잖아?”

그리고 난 곧 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만다.

사이코를 이해하려 들다니, 참으로 쓸모없는 짓을 하였구나.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대번 의아함이 떠오른 것이다.

“너는 날 원하면서도 어쩔 줄을 몰라 하니, 내가 기민하게 행동해야지 안 그래? 난 배려심이 많거든.”

2황자가 말을 이어가며 쑥, 내 발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등줄기가 빳빳하게 서며 살갗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 X맨의 울버린 아저씨처럼 발가락 사이에서 아다만티움 칼날을 나오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 부드럽다, 너.”

2황자가 내 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발을 너무나 애정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사이코가 왜 내 입에 아무것도 물리지 않은 거지?

“아아아악!!! 악!!!!!!!!!”

“….”

궁금한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겨버린 나를 보며 2황자가 웃음 지었다.

“안 와, 아무도. 3층에 방음 마법을 걸어놨거든. 1, 2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거야.”

아니,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나랑 황자는 왜 매일 그렇게 속삭여야 했단 말인가.

문제는 방음 마법의 존재를 이 X끼 옆에서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큰소리를 내서 날 도와줄 이를 깨운다는 선택지는 날아가 버린 거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데.

나는 내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내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폭신폭신 이불 베개 세트, 방바닥에 놓여 있는 핑크핑크 슬리퍼 이따위 것들뿐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깃펜 촉을, 사람 목에 찔러 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저긴 너무 멀었다.

내가 하하호호, 2황자님앙~, 우리 책상 가서 하는 게 오~오때? 하고 제안한대도 그가 ‘오케이, 가자.’라고 하지는 않겠지.

“방음 마법은 말야, 3층에만 걸려있는 게 아니야.”

…?

“오늘 일을 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테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 사이코한테 빚을 진 게 있었나.

왜 저렇게 당당하게 예언한담.

“불미스러운 잡음이 생기면 평화협정은 물 건너가고, 왕국과 네 가문은 피해를 보겠지.”

나는 애국심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빙의 후 내게 따듯함을 베풀어 준 이 가족이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나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역시 악당도 멍청하면 못 해 먹지, 그는 내 약점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 우리는….”

“….”

“평화의 초석이 되는 겁니다. 셀린 영애. 아무도 모르게 말이죠.”

*

나일은 정원 한쪽에 서서, 여자가 잠들어 있을 3층 방의 창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제 코밑을 쓱쓱 문질렀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뭐라고 말하지.

“….”

가는 길에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동네에 아는 화장실이 이 집뿐이라, 화장실만 쓰고 다시 떠날 겁니다.

이 코딱지만 한 왕국에는 뭐 이리 화장실도 없는 겁니까.

역시 약소국인 겁니까, 동제국의 공공복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먼 것 같군요.

‘으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이건 패스.

자고 있을 테니, 일단 작은 방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그녀가 내일 일어났을 때, 서로가 약속했던 방법으로 제 존재를 알리면 될 것이다.

똑똑, 끼긱 하고.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방금 생각해낸 화장실 얘기 따위를 꺼내면 표정이 참 볼만할 것 같은데.

‘비상식량 좀 더 받아가려고 왔다고 할까.’

여자가 챙겨준 짐꾸러미엔 보관이 쉬운 비상식량이 몇 가지 들어있었다.

수중에 돈도 좀 있으니 동제국 가는 길에 굶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핑계거리가 필요했다.

챙겨준 짐꾸러미를 보니 육포가 20개 밖에 없던데 너무 짠 거 아닙니까?

가다가 배고파 쓰러지란 말입니까? 이왕 베푸는 거 넉넉히 베풀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없어 보여도 너무 없어 보이는 대답이군.’

이렇게 말했다간,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남아있을지 모를 호감도 단박에 증발시켜버릴 것 같았다.

부끄럽지 않으면서도 아주 그럴싸해서, 여자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 만한 이유가 필요한데,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혹, 드디어 짐 덩이를 치웠나 했는데 아 저놈 저거 또 왔네 하….

이런 표정으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며, 입에서 작은 한숨이라도 내쉰다면.

‘오…….’

나일은 싸늘해지는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친절한 사람이니까 얼굴에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는 않겠지만, 분명 나는 그 미세한 얼굴과 기분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말 것이다.

“….”

일단 올라가자, 올라가면서 생각하자.

그는 테라스를 통해 저택을 기어오를 생각이었다.

상처는 다 나은 지 오래였고, 테라스의 구조물들이 비교적 타고 오르기 쉽게 되어 있어서 올라가기는 수월할 것이다.

동제국을 향해 나아가던 나일은,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오른 순간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에 가까이서 얼굴을 봐서 다행이라고 여긴 게 금방이었는데도, 떠올린 여자의 얼굴은 선명하지가 않았다.

‘이게 낫지.’

아니 그렇지 않은가.

동제국까지 갔다가 아 기억이 안 나다니, 하고 먼 길을 돌아오는 것보다 조금 갔을 때 되돌아오는 게 훨씬 현명한 행동이다.

‘한 번만 더 눈도장 찍고 돌아가야지.’

자길 구해준 은인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될 순 없었으니까.

나일은 건물을 오르기 시작했다.

*

작은 방 창문으로 들어선 나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불이 좀 어질러져 있긴 했지만, 방을 나설 때와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선반 위에 살포시 짐을 내려놓고, 나일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잠깐 누워있을까.’

어차피 여자는 자고 있을 테고.

지금 침대에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그저 눈만 감고 있을까.

어차피 잠을 자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떠나고 그사이, 여자가 하녀들에게 언제든 방을 출입해도 좋다고 말을 해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녀가 무심코 방에 들어왔다가 여자보다 먼저 자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아, 방문이 잠겨있나?’

혹시 모르니 방문만 잠가놓고 있자.

침대 위로 몸을 뉘었던 나일은 그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xxx… xxx….”

말소리가 들려온 건 나일이 방문을 잠그기 위해 문 가까이 다가섰을 때였다.

“우리x 계획은 xxx.”

맙소사.

들려온 음성은 분명한 남성의 것이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기 위해 뻗었던 손이, 문고리에 살짝 닿았다가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자가 남성과 함께 있었다.

나일은 제 얼굴 근육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속까지 완치된 것은 아니었나, 상처를 입었던 부위가 쓰라렸다.

목 끝까지 차올라온 숨이 터져 나오지 못하고 그 아래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분출되지 못한 숨들이 아래로 낙하하며 심장으로 고여 들기 시작하자, 가슴이 답답하게 옥죄여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고통스러움에 나일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혹여 저쪽에서 눈치챌 수도 있으니, 조심조심 제 가슴을 짓누르던 숨들을 소리 죽인 한숨으로 길게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선반 위에 올려둔 짐을 챙겨 들었다.

나갈 생각이었다.

“….”

2황자와 함께 있는 것이겠지.

귀족들은 쉬쉬했지만,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결혼 전에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게 오늘, 이곳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지만.

만약 이 상황에서 그가 발견된다면 여자를 정말 곤란하게 만들 게 뻔했으니, 올라왔을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저택을 내려가야만 했다.

그리고 나일 역시 어서 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정확히 들려오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으니까, 그게 서로 속삭이는 남녀의 대화라는 것을.

대화의 내용까지는 차마 알고 싶지 않았다.

가자.

나일이 열린 창틀 위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아아아악!!! 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나일은 창문 밖으로 빼내던 몸을 돌려세웠다.

무슨 일이지.

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저렇게나 큰소리를 질렀으니, 곧 잠에서 깬 사용인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들에게 노출된다면….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여자를 더 힘들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비명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나일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람들이 급히 초를 켜고 복도를 달려 계단을 뛰어 올라올 것이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저택의 서관을 살폈지만, 불빛이 흔들리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렇게나 큰 비명이 있었는데 깬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무언가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나일은 즉시 달려가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투명한 막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로 이루어진 투명한 결계가 여자의 방을 감싸고 있었다.

‘젠장.’

그건 물리적인 힘으로 찢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일은 오른손에 힘을 집중시켰다.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파동이 깨어나며 전신을 휘감았다.

‘눈이 멀겠군.’

능력자임에도 능력을 쓰지 못하고 살았던 것은, 지겨운 저주 때문이었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그에게 걸린 저주는 가속화되어, 더 빠르게 그를 잡아먹을 테니까.

아마 지금 능력을 쓰고 나면 나일은 더 빠르게 시력을 잃어갈 것이 분명했다.

- 파직파직, 파지직

몸을 돌던 전류가 그의 오른손으로 모이기 시작하며, 그의 팔이 점점 푸른빛을 띠었다.

아.

진짜 저 여자가 뭐라고.

눈도 삐어서 사람 대신 지렁이를 선택하는 여자한테 내가.

“빠진 거네.”

그가 푸른 스파크로 파지직거리는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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