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6)화 (27/134)

26화

- 똑똑

“….”

만약 저 방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사용인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말이 있어야 했다.

아가씨라고 부른다든가, 방문 목적을 얘기한다든가.

그러나 지금 내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내가 방문을 잠갔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고.

황자가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습관이 된 건지, 다행스럽게도 방문을 잠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시간에 내 방을 찾아올 이가 누가 있지.’

사용인이 아니라면, 아까 하녀에게서 듣기로 부모님은 이미 잠드셨다고 했고… 도무지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소리 나지 않게 발소리를 죽였다.

카페트 위를 살금살금 걸었고,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문 앞에 설 수 있었다.

방문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동제국의 황자가 아닐까.’

문득 그가 떠올랐다.

저택을 떠났다가 어떤 연유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방문 밖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라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도록, 어떤 행동이나 소리를 내서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문밖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문 밖에 마냥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날 기다리던 사용인들도 다 잠들었을 이 시간에 누군가 이 복도를 지나가진 않겠지만….

‘먼저 소리를 내볼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상대방에게 먼저 소리를 내, 내가 깨어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세요.”

“셀린 영애, 테오 세리에입니다.”

2황자?

소르베 영애랑 춤을 추기 위해 무대로 나가는 것을 보며 먼저 저택에 돌아왔는데, 벌써 돌아왔단 말인가?

그는 정말 춤 한 곡만 딱 추고 온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돌아왔으면 자기 숙소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이 야심한 시각에 왜 내 방문을 두드린 걸까.

“2황자님, 이 시각엔 무슨 일로….”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대화는 대낮에 해도 충분하지 않니?

그의 대화요청에 대꾸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쌀쌀맞았다.

“내일 낮에 다시 대화하시죠. 지금은 시각이 너무 늦습니다.”

잠시든 오래든 나는 당신과 지금 대화할 생각이 없다고.

방 밖에서 발을 구르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춤이 끝나자마자 영애가 돌아가는 바람에 해야 할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해야 할 이야기를 내일 하자고.

너 오늘만 사는 놈이니?

“2황자님 저는 내일도 저택에 있습니다. 2황자님도 물론 저택에 계시죠.”

“셀린 영애….”

나를 부르는 2황자의 목소리로 보아, 그는 아직도 방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디 이 야심한 시각에 방문이고?

아무리 네놈이 내 취향의 안경 장발남이라고 해도, 지금이 하하호호 어서오세요 하고 방문을 열어줄 시간은 아니란 말이다.

가서 자라 이놈아. 내일 보자!

“그럼 내일 2황자님과 이야길 나누길 기대하며 저는 자러 가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방문 너머로 무언가가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2황자님?”

“….”

“테오 세리에 2황자님?

방문 밖이 조용했다.

2황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내가 꼭 이 문을 열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거지 지금?

2황자가 이 저택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것이 셀린가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확인만 해보자.’

나는 벽난로 위에 놓인 크리스탈 물병을 손에 쥐었다.

좀 더 강력한 호신용 도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내 방을 빙 둘러보아도 그런 물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긴, 소리 질러서 다 깨워버리면 그만인데. 너무 겁먹지 말자.’

오른손에 물병을 든 채로 문고리를 돌렸다.

*

- 저택을 빠져나가 약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면, 내가 미리 구입해 둔 말 한 필이 있을 거예요.

여자가 챙겨준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자, 작은 오두막이 나왔다.

인가가 모인 곳이 아닌 한적한 외곽이었다.

나일이 오두막 앞을 서성거리자,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

수염이 잔뜩 난 중년의 남성이 흘깃 나일을 훑었다.

그리고 뒤돌며 턱짓을 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신호인가, 나일은 그를 따라 오두막의 뒤로 향했다.

들어선 곳에는 검정 말 한 필이 묶여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말의 고삐를 나일에게 내밀었다.

“말 대금은 이미 받았소.”

나일은 짐꾸러미를 말에 실었다.

검은 말의 얼굴과 갈기를 쓰다듬자, 말이 기분 좋게 제 얼굴을 그의 손에 감아왔다.

익숙하게 말 위로 오르자, 그를 지켜보던 중년의 남성이 그에게 작은 펜던트를 내밀었다.

“서제국 병사 신분으로 통과하려면 이게 필요할 거요.”

나일이 그가 내민 펜던트를 받아 목에 걸며 물었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나를 돕는 겁니까.”

중년의 남성이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누구? 누구가 아니지. 나는 사람의 명을 따르지 않소. 돈을 따를 뿐이지.”

그 말에 나일은 펜던트를 목에 걸며 자캣 사이로 집어넣었던 손을 내렸다.

자켓 안쪽에는 손에 익은 단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셀린 영애의 이름이 쉽게 나왔다면 나일은 주저 없이 단검을 빼 그의 목을 그을 생각이었다.

입이 무거워 보이는 사내라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나일은 가야 할 길로 말을 몰았다.

*

나일은 마차가 다니는 큰길로 말을 타고 달렸다.

늦은 밤이었지만 큰길인 만큼 서제국 병사를 종종 마주쳤다.

상대방이 그의 신분을 의심한다면 펜던트를 보여 주고, 그것으로 안 된다면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이미 양 제국이 전쟁을 끝내길 원한다는 이야기가 한가득 퍼져서 그런가.

서제국 병사들은 이미 종전을 한 것처럼 다 풀어진 모습이었다.

단검은커녕, 펜던트를 꺼낼 필요도 없었고, 그가 서제국 병사의 차림새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지원이 없었다면 나일은 조심스럽게 숨어서 이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제국 병사들의 해이한 태도 덕분에 그녀의 계획이 과하도록 치밀한 게 되어버렸지만.

도대체 누가 은밀하게 국경을 넘으려 하는 사람한테 소화제에 배탈약까지 챙겨준단 말인가.

“워워.”

달리던 그가 말을 멈췄다.

말에 올라탄 상태로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암흑뿐이었다.

여자가 챙겨준 마나 전구가 짐꾸러미 옆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점점 시력이 나빠지는 탓에, 이런 지원이 없었으면 크게 고생을 하고 있었으리라.

나일은 뒤돌아 한동안 자신이 떠나온 곳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제 눈을 쓱쓱 비볐다.

비벼 봤자,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게 보일 리가 없었다.

곧 눈이 멀면 보지 못하게 될 텐데.

그 전에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나일은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

- 끼익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연 후, 나는 바로 나가지 않고 팔로 문만 밀었다.

천천히 한 쪽 문이 열리며, 문과 문 사이 열린 틈으로 쓰러진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허.’

익숙한 그 구두는 분명 2황자의 것이었다.

오늘 그와 질리게 춤을 춘 덕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몸 아래에서부터 긴장감이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소리 죽여 숨을 내쉬며, 나는 물병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2황자가 만약 혼자 기절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소행에 의해 쓰러진 것이라면, 그를 쓰러트린 자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2황자를 방 안으로 옮기자.’

나는 방 밖으로 걸어 나가며 조금 열려있는 문을 마저 밀었다.

문이 열리며 남자의 구두, 종아리, 허벅지가 순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끝에는.

“…!”

웃는 얼굴로 2황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쓰러진 것이 아닌, 문 뒤에서 다리만 뻗고 앉아 있던 것이었다.

왠지 오싹함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방어본능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 조각들이 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져 내렸다.

이런 시나리오는 제 예상에 없던 2황자는 머리를 제대로 가격 당했고, 그의 턱을 타고 피와 물이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큭큭큭.”

물병을 머리에 맞고 순간 휘청하는 그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내 몸을 돌려세웠다.

도망쳐야만 해.

그러나 그가 잃었던 중심을 잡고 내게 손을 뻗는 게 더 빨랐던 모양이다.

2황자가 뒤에서 내 몸을 끌어안으며 내 입과 코를 큰 손으로 짓눌렀다.

“으읍.”

포박당한 상태로 발버둥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역시 너는 재미있어.”

“으읍, 으브.”

“오~ 힘들구나, 그래 가자가자,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예의 바르고 정중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가 뒤에서 나를 껴안은 상태로 계속 내 입과 코를 짓눌렀다.

큰 소리를 낼 수도 없거니와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손을 버둥거렸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고, 의식은 흐려져만 갔다.

*

‘으으, 머리가 띵해.’

머리가 무거웠다.

엉덩이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으로 보아 내가 앉아 있는 위치는 침대 위인 것 같았다.

등 뒤에 닿은 딱딱한 것은 침대 헤드인 것 같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지만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곁에서 뚜렷하게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 떠.”

일절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는데 내 정신이 돌아온 줄 어떻게 알아챈 거지.

사이코의 감지력은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건가.

이미 의식을 되찾은 것이 들통 났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안녕, 피비.”

2황자의 코끝이 내 코끝에 닿아있었다.

“왜 숨을 안 쉬어? 갑자기 코에서 숨이 멎었는데?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건 안 되니까 숨 쉬어.”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숨 쉬는 것도 까먹게 되는구나.

나는 그의 말대로 코로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가, 흉부에 가득 들어왔던 공기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훅 내뱉은 내 날숨에 2황자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하, 간지럽네.”

그가 낮게 웃으며 내게 제 볼을 비볐다.

‘귀를 물어뜯을까?’

2황자가 눈을 감고서 내 볼에 제 볼을 비벼대는 통에 그의 귓바퀴가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지금 귀를 물어뜯어서 시간을 번다면, 그동안 손발에 묶여있는 끈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어떻게 잔인하게 귀를 깨물 수 있겠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놈의 귀를 입안에 넣고 깨물 때의 촉감과 입안에 퍼질 비릿한 피 맛을 떠올리니 구역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소중한 나를 위해서 못 해 먹겠다 젠장.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 물음에 그가 내 볼에서 얼굴을 살짝 떼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내 최애 컬러인 보라색이 이렇게 징그럽게 보이기도 하는구나.

그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샅샅이 핥고 지나갔다.

“와… 이제 말을 편하게 하시는군요, 영애. 이렇게 빨리 적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킥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