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5)화 (26/134)

25화

‘식당에 케이크 있을 텐데.’

2황자의 손을 마주 잡고, 소르베 공작가의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나는 문득 버려진 케이크를 떠올렸다.

하녀에게 하나 빼달라고 부탁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식당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테지.

맛있는 케이크가 있으면 뭘 하나, 먹을 놈은 이미 떠났는걸.

‘가져가라고 말을 할 걸 그랬나.’

숨어서 몰래 영지를 빠져나가는 처지니, 당당히 가게에서 뭘 사서 먹기도 어려울 텐데, 배고프지 않으려나. 내가 싸준 보따리에 먹을 걸 뭐 뭐 넣었더라?

역시 케이크를 가져가라고 할 걸 그랬나보다,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도망치는 도망자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됐다.

‘무슨 집들이 가냐? 케이크 상자 들고 가게.’

애도 아니고 어른인데 배고프면 어떻게든 알아서 먹거나 하겠지 뭐.

아니 그리고 가는 길에 짐 된다고 나도 버리고 혼자 간 놈 아니냐.

그런 놈한테 무슨 케이크 상자여 상자는, 내가 다 먹고 뱃살이나 찌우자.

“지루하십니까?”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살짝 드니, 안경 너머로 2황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내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엄마야 나 너무 정신 딴 데 팔고 있던 거 티 났나 봐.

아무리 그래도 2황자의 파트너로 온 것인데 정신 차려야지.

피비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었던 게 확실했다.

무도회가 열릴 걸 알고 미리 연습하긴 했다지만, 잠깐 연습한 것 치고는 너무나 부드럽게 발과 몸이 움직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표정까지 부드러울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황자님께서 춤을 너무 잘 이끌어주셔서….”

뭐라고 대답하지.

서제국이 빌론 왕국에게 호의적이고, 2황자도 내게 호의적이나, 그렇다고 그를 만만하게 보고 너무 편안하게 대답했다간 이 강대국 권력자의 태도가 언제 바뀔지 몰랐다.

“너무 잘 리드 해주셔서, 다른 춤을 추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하….”

“그렇습니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다.

사실 지루하냐고 물어볼 때도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에 가까웠지.

2황자와 주변 지역에서 열린 몇몇 무도회를 돌면서 그는 내내 인자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들이 불쾌한 표정들이어서 그렇지.

그래도 이제 끝이 보였다.

소르베 공작가는 근처에서 무도회를 연 가문 중 가장 큰 곳이었고, 그래서 이곳을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 머무르던 참이었다.

이 춤을 끝으로 난 집에 간다. 자유다!

“그럼….”

“….”

“한 곡 더 추실까요?”

안 돼에에….

춤곡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 발가락들의 비명이 넌 들리지 않니?

당장 구두를 벗어 던지고 싶었으나… 호의 호의… 호의는 호의로. 그래.

2황자님께 결례를 범할 순 없지.

“아주 느린 곡이면 좋겠습니다.”

“느린 곡이라.”

고개를 돌리지 않아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보냈다.

연주자에게 사인을 보낸 건가.

빠른 춤곡이 끝남과 동시에 느린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별로 인기 있는 곡은 아닌 모양이었다.

중앙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어느새 빠져나가 구경꾼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구경꾼 중에는 소르베 공작가의 공녀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뜨거웠다.

아니 언니... 왜 날 그렇게 봐? 우리 부티크에서 나름 친해진 거 아니었냐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나라고 언니한테 뭐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내가 티파티에 언니를 왜 초대했는데, 언니가 계속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만 일관하니까 2황자가 내 방 앞까지 찾아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나 섭섭해 정말.

2황자가 느려진 박자에 맞춰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저, 2황자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못 본 것 같은데 소르베 공녀와도 춤을 추셨나요?”

말을 해놓고서 나는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나? 생각했다.

2황자가 주로 내 곁에 있긴 했지만, 중간중간 다른 영애들과도 춤을 추었으니 그중에 소르베 공녀가 없을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지금 이 무도회를 주최한 집안의 여식이니.

예의와 매너에 빠삭할 2황자가 그녀를 빠트렸을 리 없었다.

내가 피곤해서 못 본 게 분명하다, 라고 마무리 지었을 때였다.

“아….”

짧은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있었군요.”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유연하게 턴하며 그가 대답했다.

별일 아닌 이야기를 하듯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에겐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공녀에겐 별일일 겁니다. 자, 보세요.

그가 이끄는 대로 턴을 하며 소르베 공녀 쪽을 보자, 역시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이 무도회를 연 목적이 2황자와의 춤 한 번이었을 텐데.

낮에 열렸던 티파티에서도 소르베 공녀가 2황자와 단둘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으니, 아마 둘이 춤을 추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편하십니까?”

네, 매우 많이요. 하는 의미를 담아 그와 눈을 맞추자.

“그럼 계속 저만 보고 계십시오.”

하는 게 아닌가.

그는 멋진 대사를 날린 배우처럼 뿌듯하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영 속이 불편했다.

네 얼굴을 본다고 내 불편함이 사라지겠니?

아 시원하게 콜라나 한 잔 실컷 들이켜고 싶다 진짜.

2황자가 요청한 것으로 의심되는 곡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2황자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그와 멀어지며

- 2황자님께선 신사의 예의를 다하고 오실 테니,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나를 잠시 빤히 보더니, 웃으며 소르베 공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새벽까지 이어진 긴 무도회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저택은 나를 기다리는 몇몇 사용인들을 빼고 잠에 빠져있었다.

이 밤에 나를 위해 목욕물을 데우겠다는 하녀들을 진정시키고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긴 식탁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황자가 자기 몫인 줄 알고 챙겨가지는 않았을 텐데. 누군가 치운 건가.

피곤함에 절어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내 뒤를 따르며 하녀가 물었다.

“아가씨, 목욕물이 필요 없으시면 간단히 세숫물만 올릴까요?”

“고마워. 어머니랑 아버지는?”

“두 분은 일찍 잠자리에 드셨어요.”

그렇구나.

3층에 도착해 방문 앞에 선 나는 문고리를 잡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분명히 빈방일 텐데, 그것을 알면서도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나.

문고리를 돌리고 팔을 뻗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

예상대로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장작불이 꺼진 지 한참 되었는지, 방 안의 공기가 매우 싸늘했다.

“불 피워드릴게요.”

세숫물을 가지고 따라 올라온 하녀가 테이블 위에 대야를 놓으며 말했다.

“들어온 사람 없었지?”

“그럼요. 아가씨 안 계실 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불도 미리 못 피워놓은걸요.”

행동이 야무진 하녀는 재빠르게 불을 땠다.

이제 나 없을 때 마음껏 들어와서 청소도 해놓고, 불도 피워놓으라고 말하면 되겠네.

짐덩이 하나가 없어진 덕분에 생활이 윤택해지겠군.

“그럼 주무세요.”

하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엔 정말로 적막만이 감돌았다.

책상으로 가 마지막 서랍을 열자, 텅 비어 있었다.

“잘 챙겨갔네.”

가는 길에 배앓이 할 일은 없겠네 적어도.

세수나 하고 자자, 라고 빈 서랍을 닫으며 생각했지만, 어느새 내 발걸음은 작은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 똑똑, 끼긱

그와 맞춘 신호로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잠깐 숨을 고른 후 문을 열자, 역시나 까만 암흑만이 가득했다.

침대는 잘 정리되어 있었고, 원래 있던 물건들도 제자리에 잘 놓여 있었다.

원래부터 사람이 없던 방처럼, 그가 머물렀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자로 태어나서 청소는 해본 적도 없을 텐데 정리를 잘하고 갔네.

저택을 떠나기 전 열심히 이 방을 치웠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은 침대 위에 앉아보니, 침대 머리맡에 그를 치료했던 붕대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작은 붕대를 집어 들었다.

몇 번 사용한 게 고작인데 벌써 부피가 많이 줄어든 붕대가 내 작은 손안에 다 들어왔다.

‘별일 없겠지.’

어디쯤 가고 있으려나.

“와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추워.”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잘 개어져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다.

침대에 앉아서 하체를 이불로 잘 덮었지만 영 따듯해지질 않았다.

이불이 뭐 이래 이거, 원래 하녀가 쓰던 이불은 속에 뭘 넣은 것인지 재질이 영 싸구려 같았다.

‘지내는 동안 이불이나 좀 좋은 거로 덮어줄 걸 그랬네.’

그래도 여기서 몇 밤이나 보냈는데.

근데 진짜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간 거야?

내 방도, 작은 방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편지라든가, 아니 편지까지는 아니어도 어? 작은 쪽지 정도는… 남기고 가야 하는 거 아냐?

‘못됐네?’

내가 뭐 특별한 걸 바랐니.

속으로는 아니지만, 겉으로야 내가 자기 생명의 은인인데, 이렇게 쌩하니 가냐.

내가 준 비상약이랑 물건들은 다 챙겨갔으면서.

그냥 작은 쪽지에, 고마웠습니다. 아니면, 잘 지내요. 라거나… 이런 말들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나 무슨 생각 하냐.”

잘 갔으면, 잘 가고 있는 거면 된 거지.

곧 내 몸에 치료제의 문양이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평생 꽁꽁 숨기고 또 숨기며 살아갈 것이다.

그럼 그는 치료제를 찾아 헤매다 저주에 천천히 잠식되어 가겠지.

그를 치료하겠다는, 살려보겠다는 생각은 한 톨도 없으면서 뭘 바라는 거야.

감사 인사? 웃기지도 않네.

숨을 내쉬자 입 밖으로 찬 공기가 흘러나왔다.

인제 그만 내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해볼까, 막 일어섰을 때였다.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숨이 멎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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