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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4)화 (24/134)

24화

누구지?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쉿.’

그를 바라보며 입에 손을 올리자 그도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셀린 영애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럼 일단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외부인이란 소리였다.

저택 내에서 나를 셀린 영애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방문 앞을 서성이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그냥 숨죽여 있으면 돌려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나가서 어떤 대처를 하는 게 좋을까?

방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던 나는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와 같이 벽에 바짝 몸을 붙인 채 내게 근접해 있었다.

손을 살짝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가 숨소리조차 지운 채 나를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급작스레 찾아든 긴장감 때문인지, 벽 너머를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가, 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나가서 상황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

그럼 흔들리는 저 눈동자가 다시 편안해지겠지.

지금 이 방을 나서면 그와 영영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를 피해 동제국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나는 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가 자세를 낮춘 덕에 그의 이마가 딱 내 코 정도 높이에 와 있었다.

손에 감기는 까만 머리칼이 부드러웠다.

방 밖에 사람이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소리 내지 못하고 입만 벙끗거렸다.

‘잘 가요.’

그가 내 입 모양을 제대로 읽어 주었을까.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한테 지은 죄가 좀 있답니다.

내가 계획한 것들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이렇게 몽땅 실패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당신이 말했던 대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요.

내 목숨도 그 안에 있길 빌어도 될까요?

쪽.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건 뭐랄까, 몸 다치지 말고 건강히 잘 가라는 부적 같은 행위였다.

그의 앞머리가 코끝에 닿아 간지러웠고, 입술이 닿아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분 좋은 향유 냄새가 풍겨왔다.

역시 어제 무리해서라도 씻긴 건 정말이지 최고의 선택이었다.

“진짜 안녕이에요.”

그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며 작게 소리 내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 인사만큼은 소리 내서 말해주고 싶었다.

조금 전 시종 복장으로 나온 그에게 위험하게 미쳤냐고 말할 땐 언제고, 나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피비 방에 있니?”

아 오빠 래빌의 목소리였다.

“네 있어요!”

방문으로 향하며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잘 가요 황자님. 잘 가요 나일.

*

방을 나오자 오빠 래빌과 2황자가 서 있었다.

내가 넘어졌을 때의 그 이상한 눈빛은 어딜 가고 멀쩡하고 잘생긴 내 취향의 장발 미남으로 돌아와 있었다.

“넘어졌다면서? 괜찮은 거니?”

래빌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왔다.

“발목은? 다른 데는 다친 데 없고?”

“네 저 멀쩡해요.”

나는 래빌의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활기찬 동생의 모습을 보자, 그의 표정에 안도감이 돌았다.

“정말 다행이구나. 나는 또 크게 다친 줄 알고. 정말 감사합니다. 2황자님.”

래빌이 2황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다치신 곳이 없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2황자는 래빌의 인사에 답을 하면서도 그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뻘쭘한 나는 그 시선을 피해, 고개 숙인 오빠의 정수리만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눈을 맞추기가 부담스러웠다.

‘이건 호감인가?’

원래 상대방을 저렇게 빤히 보는 사람인가.

아니다. 저건 명백한… 호감인가, 호감이 맞겠지?

생각해보면 조용히 있고 싶다는 핑계로 내게 말을 걸어온 것 하며, 내 행동이나 몸짓 하나하나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부담스럽기만 할까.

근데 래빌의 정수리가….

아니 왜 저렇게 벌써 비었어? 아직 저 정도로 빌 나이가… 오빠야….

오빠의 정수리를 보며 잡생각을 하던 나는 들려오는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방에 누가 또 있습니까?”

2황자의 물음에 오빠까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방음이 안 된 건가, 내가 하는 말이 들려버린 건가.

몇 시간만 있으면 황자가 이곳을 나갈 수 있는데 여기서 그를 잡히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방문 가까이에 서 있는 2황자 앞으로 몸을 스윽 움직였다.

등으로 문고리를 가려버린 나는 일단 잡아뗀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귀도 밝은 자식.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바로 취소해야 한다니.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그들이 들은 건 내 목소리 하나뿐이야.

“아니 맞아요. 있었어요.”

“혹시 아까 영애를 데리고 간 시종인가요? 그럼 제가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제대로 처치를 한 것인지 물어야….”

“으아아…! 아니, 아니에요. 시종 아니에요.”

으이씨.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할수록 목소리가 떨리고 불규칙해져 갔다.

나는 등 뒤에 있는 문고리를 손으로 꽉 말아 쥐었다.

2황자를 내 방에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차, 참새가.”

“참새요?”

“네, 작고 귀여운 참새가 들어왔길래. 여긴 내 방이니까 부디 나가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참 고맙게도 창문으로 나가길래… 안녕히 가라고 인사를 해줬어요.”

미… 믿어주려나?

사실 이걸 믿는다면 내가 좀 헷까닥 했다고 믿는 거나 다름없는 건데.

그러나 두 남자의 표정은 마치 귀여운 생물을 본다는 듯 해맑아져 있었다.

“우리 피비가 이렇게나… 작은 생명도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아이입니다. 2황자님.”

“네, 정말 흔치 않은 여성입니다.”

이 자식들이 사람 앞에서 욕을 하네.

그래도 두 남자를 내 방에 들이는 것보다야, 내가 살짝 미쳤다고 오해받는 게 백배 낫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제 요청에 대한 답을 지금 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렇게 된 김에 발이 다쳤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와 좀 더 이야기도 하고, 2황자의 파트너 요청도 거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 그러지 말자. 이미 한 바퀴 돌아 보이면서 발목 멀쩡한 거 다 티 내기도 했고.

내가 2황자를 데리고 주변 무도회를 돌고 돌다 늦게 돌아오면, 그가 편하게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2황자님의 파트너가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그에게 예를 갖췄다.

뒤에서 래빌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는 발가락에 그런 걸 칠하는 문화가 없으니까 신기해서 쳐다본 거겠지.

나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고.

아까의 집요한 시선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별일이야 있을까, 이렇게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데.

“그럼, 가시죠.”

2황자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려면, 등 뒤에서 잡고 있는 문고리를 손에서 놓아야만 했다.

머뭇거리던 손의 힘을 빼어 그의 손에 올리자, 2황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2황자를 단단히 붙들고 있을 테니,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떠나요.

*

나일은 제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여자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부분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잘 가라면서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이게 가라는 의미인가 가지 말라는 의미인가.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다.’

아마 그녀는 마지막 인사이니만큼 더 신경 써서 한 것뿐일 터.

여자가 하는 작은 행동을 하나하나 따져봤자, 제겐 별 소득이 없을 것임을 나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자는 그저 선하고 친절한 사람이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을 곱씹는 건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헤어질 사람이다.

이제 안 볼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거절하다니.’

은근슬쩍 운을 띄웠는데 단박에 사연 있는 남자는 싫다는 소리가 나왔다.

나일은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벽 너머로 방문객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제 요청에 대한 답을 지금 들을 수 있을까요?

방 벽에 기대에, 두근대는 가슴을 짓누르며 여자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지만.

- 2황자님의 파트너가 되어 영광입니다.

들려온 것은 한 쌍의 보기 좋은 커플이 맺어지는 소리였다.

그녀 또한 2황자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은 여기서 그만 사라져 주는 것이 옳았다.

여자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다.

귀한 신분, 그녀를 사랑하는 부모와 앞으로 그녀가 만나게 될 좋은 남자. 어쩌면 지금 만난 것일지도 모를.

나일은 그 순간, 시종 복장을 하고서 마주친 서제국의 2황자를 떠올렸다.

‘말라비틀어진 갯지렁이처럼 생겼던데.’

눈은 야비하게 생겼고, 흘러내리는 머리를 자꾸 귀에 꽂는 행동은 토를 유발했다.

여자들에게 주목받고 있는 걸 아는지, 점잖아 보이려는 표정은 사람의 내장을 뒤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얼굴이 좋은가?

거 취향 참, 알 수가 없군.

나일은 뒤돌아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누가 봐도 엄지척을 하고 남을 외모의 남자가 들어있었다.

허름한 시종의 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런다고 이게 어디 가려질 외모란 말인가.

도대체 여자는 왜…!

날렵한 코, 섹시한 입술, 잘 벼려진 턱선.

이런 게 다 눈에 안 들어왔단 말인가?

그 말라비틀어져 질식사할 것 같이 생긴 지렁이는 눈에 들어오고??

발이 멀쩡하면 뭐해! 눈이 삐었는데!!

황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마주 보았을 때, 빛을 잃어가고 있는 그의 두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치료제를 찾지 못했으니 이제 곧 눈이 천천히 멀어 갈 것이다.

‘그래. 죽어가는 망령보다야 건강한 갯지렁이가 낫네.’

떠나자, 그녀를 잊자.

그게 옳다,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방에서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일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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