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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3)화 (23/134)

23화

그는 무릎을 굽혀, 업힌 나를 살포시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당연히 내 방문부터 걸어 잠갔다.

“따라 올라오는 사람 있어요?”

“아뇨, 다들 정신없어 보여요.”

“어후….”

혹여 누군가의 눈에 띌까, 바짝 곤두섰던 긴장이 풀리며 긴 한숨을 내쉬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발 봐요.”

내 발을 보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에게서, 나는 확 내 몸 쪽으로 발을 끌어당겼다.

이것들이 하나같이, 내 발이 무슨 자기네들 발인 줄 알아.

“….”

그렇지 않아도 긴장으로 날카로워져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너무 거칠게 발을 뺀듯해, 혹 그가 무안해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그냥 구두가 헐거워서 벗겨진 것뿐이에요.”

그는 별 대꾸가 없었다.

그저 내 쪽으로 끌어당긴 내 맨발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예쁘네요.”

“….”

“준비를 많이 했네.”

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보니 어떻던가요? 2황자 말입니다. 기대를 많이 하고 있지 않았나요?”

이거이거 어째 묘하게 빈정거리는 말투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실까.

아, 내가 어제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갔다고 이러는 건가.

“네, 소문대로 시던데요. 잘생기고 매너 좋고 신분 좋고, 영애들이 열광할 만하더군요.”

“발이 아니라 눈이 삐었네.”

“뭐라구요?”

그가 자꾸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해댔다.

“아닙니다.”

“그것보다….”

나는 시종 복장을 하고 벽에 등을 기대어 바닥에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시종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확연히 튀는 외모였다.

“다시는 이런 위험한 짓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이지, 누군가 이상하게 여겼으면 어쩔 뻔했어요?”

나는 그때까지도 쿵쿵거리던 내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업혀서 올라오는데 누가 불러 세울까 봐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네, 앞으론 그러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을 기대하며 남자를 보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안한 감정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그러고 싶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요, 방에 얌전히….”

“오늘 떠날 거니까.”

뭐?

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자신이 앉아있는 곳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침대에 앉아있으면 밖에서 보일 수도 있어요.”

내가 앉아있는 침대 뒤로는 문제의 큰 창이 나 있었다.

서관과 마주 보고 있어서, 바깥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그 창문이.

확실히 누군가 지금 이쪽을 주의 깊게 본다면 내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황자가 앉아있는 위치는 침대에 가려 있기도 했고, 창과 반대편 벽 쪽이라 보일 위험이 적었다.

“이리 와요.”

등 뒤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황자의 얼굴을 말갛게 비추었다.

햇볕이 따스하기 때문인가.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데도, 나를 올려다보는 그 눈이 왠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발 다친 게 아니면 곧 다시 나갈 거잖아요.”

“….”

“잠깐만 있다가요.”

그의 손이 바닥에 고집스럽게 붙어있었다.

빨리 옆에 와서 앉으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고, 걸어가 툭 하고 그 옆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정면을 보고 있음에도 그의 고개가 내 쪽을 향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의식이 돼서 그런가.

나는 그가 아닌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오늘 밤 떠날 겁니다. 서제국 병사들이 하는 얘길 들었어요. 수도에 있던 군이 오늘 아침 철수했다더군요. 어차피 형식만 남은 협정이에요. 평화협정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군을 예상보다 일찍 철수시킨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오늘 떠날 수 없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이해되질 않았다.

나는 셀린가의 일원으로서 서제국 일행이 떠날 때까지 이 저택에 붙어있을 예정이었으니까.

나는 저택에 있는데 너는 떠나겠다고?

내 물음에 그가 얄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마음만 가져갈게요. 나는 혼자 갈 겁니다.”

“왜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물음이 터져 나왔다.

황자의 신분을 위장할 수 있는 여러 물건을 준비해 놨지만, 무엇보다 안전한 건 신분이 확실한 내가 함께 가주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물을 줄줄 늘어놓고, 어디를 통해 가는 게 좋을지 이야기할 때 그렇게나 환영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말을 꺼내기까지 잠시 뜸을 들였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짐이에요.”

“아….”

“….”

“그렇군요.”

그래, 짐 덩이는 내려놓고 가뿐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구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 역시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혼자 이동하는 것보다 둘이 이동하면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도 있고, 그렇겠네.

“그래요 그럼. 오늘 밤 떠난다는 거죠?”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를 죽여서 내가 살아보겠다는 계획을 어젯밤 삭제시켜버리긴 했지만, 만약 그대로 실행하려 했다 해도 어차피 실패할 계획이었네.

어쩐지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나는 벽에 등을 더 기대앉았다.

“그럼 떠나기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거네요.”

대답 대신 그가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아 맞다. 그럼 이거마저 챙겨가요.”

중요한 물건은 이미 챙겨줬고, 그 이후에 소소하게 챙긴 물건들이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었다.

그걸 꺼내서 건네주기 위해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

“그냥 이대로 앉아있어 줄래요.”

그가 손목을 낚아채는 바람에 몸을 반쯤 일으켰던 나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반대편 창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오후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왜 저렇게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남자.

나는 다시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책상 맨 아래 서랍 열어보면 이것저것 준비한 거 있으니까 이따 갈 때 가져가요.”

아마 그가 떠날 때 나는 없을 확률이 높았다.

백작 부인을 돕고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금세 밤이 될 테고, 그때 방에 돌아오면 황자는 떠난 후일 것이다.

곁에 머물던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기본적으로 기분을 센치하게 만드는 일이라지만, 얼마나 본 사람이라고, 죽일 생각까지 했으면서….

아니 나 외로워서 그런가? 기분이 대체 왜 이래.

나는 내 기분을 숨기기 위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내뱉었다.

“책상 안에 든 거 비상약이에요. 파란병은 배앓이 하면 먹고요, 갈색병은 소화제, 어 또… 아무튼 병에 다 쓰여 있으니까 필요할 때 찾아 먹어요.”

“푸흫.”

황자가 옆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놈이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왜 웃어요? 저런 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큰일을 할 때 컨디션을 챙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몸 상태가 좋아야 동제국까지 잘 갈 거 아니에요.”

“아 그럼요, 알았어요.”

“그리구….”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대충대충 내 얘기를 들어 넘겼다.

상대는 대충대충 듣고 있는데, 나는 이 순간이 황자와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별 얘기들이 다 생각이 났다.

물론 내가 그를 피해 꽁꽁 잘 숨어야 마지막 순간이 되겠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미리미리 하고 싶은 말을 해두는 건데.

“그리고 사람 함부로 믿지 말고요.”

“네.”

대답은 잘도 하네, 나한테 죽을 뻔 해놓고서.

얌마 내가 맘 안 바꿨으면 넌 큰일이 났어도 한참 났어, 임마.

“또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발….”

소설 속에서 황자는 공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엄청 오래 부정해서 공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럼 공만 미치나?

미쳐 날뛰는 공작 덕분에 황자도 꽤나 고생을 했다.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나 너 좋다. 어? 이렇게 딱, 쉽게 인정을 해주란 말이에요.”

“….”

“질투유발 그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고. 이해했어요? 난 진짜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런 거예요. 열심히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에 왜들 그러나 몰라.”

“….”

“지금은 내가 왜 앞으로 안 볼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게 인생에서 꽤 중요한 문제라니까요.”

아, 그가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너무 오지랖 떠는 사람 같다, 그만하자.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다. 못 받아먹으면 자기 인생이지 뭐.

나 혼자 계속 이말 저말을 하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뻘쭘해진 나는 슬리퍼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목을 삔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나중에….”

“….”

“… 동제국에 올래요?”

아니 내가 거길 왜 가니? 은발에 푸른 눈을 한 저승사자가 기다리는데.

“거길 왜 가요 내가.”

“오면….”

햇살에 그의 흑발이 제 색을 잃고 옅어졌다.

그는 앞머리가 속눈썹을 찌르는지, 눈을 몇 번 깜빡이곤 얼굴을 살짝 흔들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달고 짠 빵도 있고.”

“….”

“황자도 있고….”

황자라니.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너를 말하는 거니?

대놓고 뭐 씹은 표정을 짓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제국 2황자는 멋지다면서요. 저주에 걸린 동제국 황자는 어때요?”

자기 입으로 하는 자기 홍보가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그가 발을 꼬물거렸다.

“저주가 문제가 아니라….”

“….”

뭐라고 대답하지.

솔직하게 내가 너를 다시 만나면 죽을 운명이라고 얘길 할 수도 없고.

동제국 황자님은 저주에 걸려서 싫다고 말하기에는….

거 참 너무하잖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너 같은 몹쓸 병 걸린 사람 나 싫어, 이러는 건 와. 인성 쓰레기인데.

그렇지 않아도 그의 트라우마가 저주라는 것을 이미 아는데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속으로 신중히 말을 골랐다.

내가 뜸을 들이자 그가 기대에 찬 눈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사연 있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

“절대 저주가 싫은 건 아니구요,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좋거든요.”

“평범한 사람….”

그가 내가 내뱉은 단어를 따라 되뇌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 조금은 구슬프게 들려왔다.

“걱정 마요. 그분도 분명 사랑받을 테니까.”

공작님의 찐한 러브를 받을 테니 염려치 말라구, 자네.

“내 취향은 아니지만.”

“….”

보내자.

어차피 몇 시간 후면 떠날 사람이고 앞으로 더 안 볼 사람이잖아.

일어서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의심할지도 몰라요. 저 이제 일어날게요.”

그러니 잘 가요. 부디.

구겨진 드레스를 펴며 일어섰을 때였다.

“셀린 영애 방에 있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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