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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2)화 (22/134)

22화

나일은 소란스러운 정원을 내다보았다.

3층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정도로는, 저 아래에서 자신이 보일 리 없었다.

점점 나빠지는 시력 때문에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달걀귀신처럼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찾았다.’

그래도 나일은 금방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오늘 입으려고 새로 맞춘 드레스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푸른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홀로 서 있었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아….’

여자가 서 있는 장소는 차와 디저트를 진열해 둔 기다란 테이블 앞이었다.

그녀의 하늘거리는 드레스 자락이 늘어선 디저트들 앞에서 팔락거렸다.

그녀와 좀 떨어진 곳에 몰려 있는 인파 가운데에 크게 솟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주변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득실거렸다.

‘2황자겠지.’

이 티파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일 테니, 사람들에 둘러싸인 실루엣만 봐도 그가 2황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2황자가 자신의 저택에 있건 말건, 여자가 차(tea)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고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내심 기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만족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 나일의 고개도 돌아갔다.

간단한 추측만으로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상황이었다.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방금 본 실루엣의 남성이 서 있었다.

한번 돌아간 여자의 고개는, 누가 고정이라도 해 놓은 듯 움직일 줄 몰랐다.

정지된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도 저곳에 속하고 싶은데 다가가질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일은 내심 가슴이 저렸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겠지.

혼기가 찬 여성들에게 주어진 이런 흔치 않은 기회의 티파티에서, 디저트를 고르는 일에 더 열심인 여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비정상일 테니까.

당연한 일에 신경 쓰지 말자, 그가 자신을 다독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 그다음 날을 보내고 나면 헤어져야 했다.

그는 그녀와 동행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딱히 나눠야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고, 이제 헤어지면 아마 평생 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저 시시한 대화가 하고 싶었다.

티파티에 낸 차는 어머니가 고른 게 인기가 많았나요, 당신이 고른 게 인기가 많았나요?

디저트는 역시 엄청 단것만 주로 골라 먹었나요?

어제는 왜 내게서 그렇게 돌아선 건가요.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자신을 둘러싼 여럿의 여자들과 대화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2황자의 고개가 어느새 멈춰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저 자식 저거.’

여기가 자기네 집 안방인 줄 아나?

얌전히 옆에 있는 사람들이나 쳐다볼 것이지, 어디다 함부로 눈알을 굴려?

그때, 무리에 속해있던 남자의 실루엣이 여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제게 말씀해주시면….”

“쉬고 싶습니다.”

2황자는 내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땅굴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애써 끌어올린 듯한 그의 눈가에 피로감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이 티파티의 주인공으로서 일찍 자리를 뜰 수는 없으니, 나를 빌미로 고요함을 얻어내겠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혼자서 이동해봐야, 그에게 GPS를 달아둔 뭇 여성들이 그를 따라오겠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라.

너무 예의 바르고 멀쩡해 보이는 2황자의 모습에, 편지의 내용이 점점 가볍게 생각되던 차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의심을 다 거둔 것은 아니었다.

단둘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무리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이 어디일까.

“저와 정원을 산책하시겠어요?”

“바라는 바입니다.”

티파티를 위한 공간은 지상에서 반 층 정도 높은 곳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정원이 나왔다.

정원을 걷는 정도라면, 시끄러운 무리와 거리를 벌릴 수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야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나는 2황자가 내미는 손을 잡고 정원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등 뒤가 따가웠다. 영애들이 눈으로 창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산책하던 중 그가 말을 건넸다.

“영애는 평소에도 차분하신가요?”

저 대사가 설마, 다른 사람들은 나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넌 참 조용하다? 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네, 딱히 관심 있는 일이 없을 때는 차분하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덕분에 2황자님의 도피처가 되었으니, 저로서는 영광이군요.”

“그런가요?”

2황자가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요. 등이 따가울 만큼 지금 영광인데요.”

말과 함께 이쪽을 노려보는 여자들이 모인 곳을 눈짓하자, 확인한 그가,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영애가 없었다면 케이크를 들고 방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케이크가 입에 맞으셨나요?”

“네 아주요. 케이크랑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든 건 처음입니다.”

예의 바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이

‘저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여자는 한 명도 없고, 다 케이크만도 못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을 돌려서 하긴 하는데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군.

“그럼 오늘 저녁부터 있을 무도회는 케이크를 파트너로 데려가시면 되겠군요.”

“푸핫.”

그가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항상 예의가 덕지덕지 발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풀어진 표정을 보니 그것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다.

소리 내서 웃지 마라. 등이 더 뜨거워졌단 말이다.

황자가 크게 폭소를 터뜨리자, 안 그래도 뾰족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영애들은 액셀을 밟고 달려올 기세로 부릉거리고 있었다.

“영애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재미가 있었다니 기쁘다만, 이제는 걸음을 돌려야 할 때였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

“돌아갈까요?”

말과 함께 몸을 돌려세웠다.

급하게 턴하지도 않았는데, 새로 주문한 구두가 문제였다.

‘앗.’

구두가 벗겨져 나가며, 한발로 지탱하던 내 몸이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고통을 예감하며 본능적으로 눈을 꽉 감았는데, 어라?

내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아래를 보니 구두가 가까이 한 짝, 멀리 한 짝 날아가 땅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

2황자의 날카로운 턱 선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그의 품 안이었다.

그가 넘어지는 날 재빨리 안아 든 모양이었다.

근데 보통 이렇게 도와준 다음에는 ‘괜찮으십니까?’ 라든가, ‘다친 곳은 없습니까?’ 라든가.

뭐 그런 대사가 날아와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떨어진 내 구두를….

아니,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건 내 맨발이었다.

구두가 벗겨져 하얗게 드러난 내 맨발에는 보라색 물감이 발톱마다 발라져 있었다.

여기는 페디큐어 같은 건 없는 곳이니까 이런 건 처음 보겠지만… 이게 그렇게 집중해서 빤히 볼 일인가?

2황자는 그것을 묘한 시선으로 보는 중이었다.

말도 없이 물끄러미 내려앉는 집요한 시선에 수치심이 일었다.

민망함에 발가락이 구부러졌다.

그랬더니 그가 고개를 더 기울여 내 발을 따라갔다.

그 시선이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이상해.’

“이제 내려주시겠어요?”

“…예.”

2황자는 어느덧 배려심 넘치고 예의 바른, 이전의 2황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정원 벤치에 날 내려놓았다.

구두를 집어 온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신겠습니다.”

“아뇨, 다치신 것 같은데 제가 신겨드리겠습니다.”

거절의 말에도, 그는 세워놓은 자신의 한쪽 무릎에 내 맨발을 올렸다.

남자의 맨손이 내 맨발을 어루만지는 촉감에 소름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아.”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이상한 기분만은 분명했기에, 내가 발을 빼내려 하자 그가 큰 손으로 꽉 내 발을 감아쥐었다.

“아가씨!”

그때였다.

멀리서 시종 한 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다친 걸 보고 놀라서 뛰어오는 표정이 마치…?

…?

‘황자?’ 

왜 황자가 우리 집 시종의 복장을 하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일까.

놀라 대답도 못 하고 어버버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어?, 어….”

시종 차림의 황자가 서제국 2황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2황자님. 이제 아가씨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황자가 자연스럽게 내 앞쪽으로 몸을 밀며 들어오자, 2황자가 굽혔던 무릎을 피며 일어섰다.

나는 내내 시종 복장의 황자를 보고 있었지만,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2황자의 시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나 업어줘.”

“그럴까요 아가씨? 방으로 들어가서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응. 그럴래.”

바보가 아니라면 그도 이 자리를 어서 빨리 떠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안내하겠다며 그가 무릎을 꿇었다.

최대한 차분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혹여나 들킬까 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황자가 다정하게 내게 등을 보였고, 나는 그 위로 납작 몸을 엎드렸다.

뒤통수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런 사건까지 일으켰으니, 영애들의 두 눈에서 독이 흐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전에 나 홀로 목격한 2황자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싸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를 등에 업은 황자가 일어나 그곳을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셀린 영애.”

2황자의 말에 발을 떼려던 황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감히 2황자에게 등을 보인 채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까.

“네?”

“혹시 다치신 곳이 괜찮다면, 오늘 저녁 무도회 파트너로 함께 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어어….”

“….”

“발이 낫는다면 얼마든지, 저도 그리된다면 영광일 겁니다. 2황자님.”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날 업고 있는 황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등 위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내가 떠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영애들이 2황자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2황자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미 영애들이 곁에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그가 나를 업고 저택을 향해 걸었다.

내 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나는 그의 등에 업힌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쳤어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그는 내 비난을 픽 웃어넘겼다.

“그런가 봅니다.”

“허.”

“꾸지람은 방에 가서 듣겠습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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