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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21)화 (21/134)

21화

‘와, 얼굴에서 향수 냄새나는 것 같아.’

분명 코가 막혀서 냄새를 못 맡는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향수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생김새였다.

앞에서 일부러 엎어지고 넘어지고 잘못을 저지르고 싶어지게 만드는 얼굴이랄까.

뭔가 섹시하게 혼내줄 것만 같은 느낌?

내 인사를 받기 위해 살짝 허리를 굽히는 그의 어깨에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짙은 머리카락 색에 비해 눈동자는 굉장히 연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다소 차가운 느낌의 은테 안경과 보라색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걸, 이란 감상평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별로 특별한 미소는 아니었다.

내 앞에 선 이들에게도 저와 똑같은 미소로 일관된 인사를 했으니까.

‘내 방에 있는 황자는 정수리 냄새났는데.’

아, 왜 또 떠오르는 거야, 그 얼굴이.

물론 이제 씻어서 뽀송뽀송한 냄새가 날 테지만.

그 이후로 그와 나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말을 걸면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내내 일관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비엘 소설 안이 좋긴 하네.

내 앞에 선 2황자는 은테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수학 문제를 막힘없이 가르쳐 줄 것 같은 미인이요, 비록 내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소설의 남주인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3점 슛을 맨날 쏴대도 피부는 전혀 안 탈 것 같은 미인이었으니까.

‘이 얼마나 눈 호강 밭이냐.’

내가 죽을 예정만 아니라면 말이지.

아, 너무 오래 그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나 보다.

2황자의 미소에 슬며시 의아함이 깃들고 있었다.

나는 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예의를 차렸다.

“2황자님께서 계시는 동안 부디 편히 머무시길 바랍니다.”

그가 내 인사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뭔 재미?

서제국에 비해 쥐똥만 한 왕국의 백작가가 그에게 무슨 재미를 줄 수 있겠느냐마는.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그도 그냥 예의상 한 대꾸일 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라 생각을 마무리했다.

나는 딱히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쪽으로 가시죠, 2황자님. 지내실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를 끝으로 모두와 인사가 끝나자 백작이 그를 안내했다.

서제국 일행을 위한 거처가 서관에 마련되어 있으니 일단 그곳으로 안내해 짐부터 풀게 하겠지.

셀린 백작가 건물이 ㄷ자형 건물인 탓에, 지난번 확인했던 것처럼 서제국 일행이 묵는 서관은 동관과 마주 보고 있어서 동관에 있는 내방이 자칫하면 보일 수도 있었다.

1층과 3층이라는 높이차가 있으니 창가 쪽만 주의하면 방 안쪽까지 깊게 시선이 들어올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일행이 머무는 동안에는 커튼 잘 치고 살아야겠군,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잠깐.”

준비된 미소로 앞장서 가는 백작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보랏빛 눈빛이 인파 속에서 나를 찾았다.

“셀린 영애의 방은 어디입니까?”

*

내 방?

지금 2황자가 내 방 위치를 궁금해 한 거야?

‘왜?’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 나와 같은 물음표가 생긴 모양이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 ???

저런 표정이었다.

왜 이분이 아직 자기 방을 안내받기도 전부터, 이제 막 통성명을 한 사이일 뿐인 여인의 방  위치를 궁금해 할까.

상대가 잘생긴 것과 상대를 잘 아는 것은 다른 것이기에, 이제 막 인사를 나눈 남자에게 내 정보 따위 알려주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서제국 황족이었고 나는 쪼끄마한 왕국의 백작 영애였다.

“제 방은 동관 3층에 있습니다… 만.”

“아.”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2황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병사들에게 될 수 있으면 동관 쪽으론 가지 말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낯선 이들과 가깝게 마주치면 영애께서 불편하실 테니까요.”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아까의 담백한 자기소개도 그렇고,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세심한 부분도 배려할 줄 알고.

배려심 많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이 났다더니, 2황자는 정말 그 소문에 적합한 자로 보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작은 것까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닙니다. 그럼.”

말을 마치며 돌아선 그는 셀린 백작을 따라 거처로 이동했다.

그의 찰랑거리는 장발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백작 부인이 내게로 쓱 몸을 붙여 왔다.

“딸.”

“네?”

백작 부인이 찡긋 윙크를 날렸다.

“엄마는 찬성이다.”

“네?”

“꼭 가까이 사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물론 우리 딸을 가끔 봐야 하는 건 아쉽겠지만.”

“….”

“딸보다 머릿결이 좋은 사위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백작 부인이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고 계셨다.

글쎄요, 어머니. 저게 과연 먹어도 되는 떡일까요. 떡을 줄지도 모르겠지만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어머니 곁이 좋아요.”

*

서제국 일행의 첫날 일정은 이러했다.

일단 도착 후 피로를 풀 겸 한낮의 오수를 즐기게 둔다.

그다음부터는 쭉 빽빽한 일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두어 시간 자고 난 다음에는 티파티가 있었고 저녁에는 근처 무도회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만큼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막 티파티를 시작했는데도, 저택의 정원은 벌써 사람들로 복작복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제국 일행, 특히나 2황자가 있었다.

바글바글한 인파 속 가운데에, 갈색 정수리 하나가 우뚝 솟구친 게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좀 거리가 있는 위치에 서서 내내 그쪽을 지켜보았다.

‘계속 봐도 딱히 이상한 점은 모르겠단 말이지.’

티파티에는 이 근방의 인사들이 다 모여 있었고, 그들을 결집하게 한 원인은 2황자였다.

2황자의 곁에는, ‘내 사업아이템이 이렇게 좋은데 투자해주십시오.’로 시작해서 ‘와 2황자님의 이상형은 어떤 타입인가요? 저는 황자님인데 헷.’이런 분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밀집해 있었다.

‘피곤하겠다.’

제게 바라는 것이 있는 인간들을 계속 상대하는 일은 무척이나 진 빠지는 일이니까.

어느새 나는 2황자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그를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백작 부인과 내가 열심히 준비한 티파티에는 맛깔나 보이는 음식들이 참 많았다.

티파티를 하자고 말한 것은 나지만, 파티 준비 경험이 전혀 없다 보니 사실상 준비를 도맡아 한 건 백작 부인이었다.

그중 큼직한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눈에 띄었다.

‘저거 잘 먹으려나.’

입맛이 워낙에 담백하셔야지.

포크로 한 입 먹어보자, 달지 않은 생크림에 상큼한 딸기 과육이 잘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이 정도면 그렇게 달지 않으니까 잘 먹을 거 같은데.

어제저녁은 굶었는데 아침은 먹었으려나.

나는 마침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하녀를 붙잡았다.

“있잖아, 이거 안에 더 있니?”

“네 아가씨. 여러 개 구워서 아직 남아있어요.”

“그럼 하나만 손대지 말고 포장해서 식당에 놔둘래?”

“어머~~”

왜, 왜 그런 능글맞은 요상한 소릴 내니 너.

하녀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2황자님 앞에서 조금씩 예쁘게 먹는 모습만 보이고 싶으신 거죠?”

하녀는 내가 2황자 앞에서는 양껏 먹을 수가 없으니, 따로 두었다가 더 먹으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오해긴 했지만 역시 따로 변명할 거리를 떠올리긴 귀찮으니, 나는 대충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2황자에게 별생각이 없었다.

잘생겼고, 내 취향에 부합하기도 했지만 딱 그뿐.

보기 좋은 무언가가 내 앞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가 다 결혼하고 싶어져서 엉덩이를 흔들게 되는 건 아니잖아?

이 타피티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나 또한 셀린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우리의 손님이니 잘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대접할 의무가 내게도 있었으니까.

마침 떠오른 질문을 하나 더 하녀에게 물었다.

“있잖아, 누가 2황자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내게 얘길 했다면 말이야, 이유가 뭘까?

“이유요? 그냥 보면 알겠는데요?”

그렇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댄져러스한 외모시잖아요. 오호호홓.”

아니 그거 아냐.

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하녀는 재빨리 다른 대답을 내놨다.

“2황자님 인기가 너무 많으시니까 경쟁자를 줄이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아가씨가 너무 예쁘시니까 2황자님이랑 잘될까 봐 그런 거죠.”

넬라.

그녀와 내가 어떤 이유로 연락이 끊긴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정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만큼 미운 대상이란 말인가?

하지만 편지의 내용이 꽤나 와 닿았는데 말이지.

하 모르겠다. 영애들이랑 즐겁게 떠들고 있는 거로 봐서, 저 사람이 뭐 여기서 테러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지켜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지었을 때였다.

“왜 포장해 달라고 하셨는지 알겠네요.”

“응?”

“하긴 저렇게 쳐다보는데 저 같아도 입에 묻을까 봐 생크림 케이크는 편하게 먹기 힘들 거예요.”

쳐다본다고?

나는 무심결에 2황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쪽에 있는 사람 중 나를.

어머나, 저분이 왜 그러실까.

그러시지 말았으면.

왜냐하면 2황자의 시선의 행방이 궁금한, 주변 영애들의 눈빛도 그를 따라 내게 꽂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눈빛들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야 뜨겁다.

한낮의 햇볕보다 더 뜨거운 시선을 경험하고 있는데, 어라.

2황자가 주변에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가볍게 숙이더니, 인파를 헤치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분이 정말 왜 저러실까.

따가운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 생크림 케이크를 노려보고 있는데, 시야에 그의 구두 앞코가 들어왔다.

“셀린 영애.”

“2황자님.”

그를 앞에 두고 나는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저리가라 뜨겁다.

너의 팬들에게 돌아가라.

그러나 내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황자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도와주십시오.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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