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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8)화 (18/134)

18화

황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표정만 보면 그의 얼굴은 기습뽀뽀를 한 쪽이 아니라 당한 쪽의 얼굴이었다.

아니 지금 예비 사망자한테 뽀뽀 당해서 놀란 건 이쪽인데.

“어….”

이런 상황은 내가 뺨을 세게 때려줘야 되는 상황 아닌가.

지금 남자 쪽에서 갑자기! 동의 없이! 예고 없이! 내게 스킨쉽을! 그것도 뽀뽀를! 한 거니까.

뽀뽀면 어디 보통 스킨쉽인가.

맞지, 난 때리고 저놈은 넙죽 제 볼을 가져다 대어야 하는 상황이 맞지.

그런데 뺨을 올려치기엔 남자가 서 있어서 팔이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일어나서 때려야 하나?

다리가 후들거려서 못 일어나겠는데.

“저기… 일단 앉아 봐요.”

뺨 좀 때리게.

일단 맞고 나서 대화를 해보자.

“….”

황자는 여전히 입을 가린 채로 굳어있었다.

지금 누가 이 장면을 보고 “자 뽀뽀를 당한 쪽은 어느 쪽일까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둘 다 당한 사람의 얼굴이었으니까.

넌 손 내려! 내려!

당한 건 나잖아!

“미안합니다.”

“….”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 말을 끝으로 황자는 뒤돌아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았다.

아직 뺨도 안 맞았는데 어딜 들어가냐.

그나저나 남자가 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는데도 내 가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예비 송장이랑 입 맞춘 거다 뛰지 마라. 며칠 후면 세상에 없는 놈이다. 예비 송장, 예비 송장….’

설득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

저녁이 되어도 황자는 방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방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

왜?

왜 사고는 지가 쳐놓고 방에 들어가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지.

‘내가 빈틈을 보였나?’

그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 같이 가겠다, 지켜주겠다,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 말해왔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부족해 보였나?

말뿐인 것처럼 느꼈나?

그래서 말로만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돕게 하려고 이런 행동을 한 건가.

원작에서 그의 성격이 어땠더라.

황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몸을 굴려 대는 수였다.

그가 마음이 아플 때마다 택한 방법이 뭐였는가.

정신없이 몸을 굴려서 잊는 거였다.

‘그래서 피비와 처음 만났을 때도 엄청 능숙하게 꼬셔냈지.’

몸을 잘 다루고 야리꾸리한 분위기도 잘 형성하고, 절대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보기엔.

‘되게 어설펐는데.’

마치 아까 전의 그것은 요염수에게 스킨쉽을 당했다! 라기보다는, 초콜릿을 시식만 하게 해주고 본품은 팔지 않고 가버리는 요상한….

‘어머 미쳤나 봐.’

내 표현 봐 초콜릿이래. 손발과 시공이 오그라든다.

나는 접혀버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쫙 폈다.

역시 그는 소설대로 쉽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쟤는 미래의 시체, 며칠 후엔 이 세상에 없을 예비 사망자!’

나는 원작의 피비처럼 네게 빠지지 않아.

그때,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녁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 내려갈게.”

오늘 저녁은 가족과 함께 식사할 예정이었다.

내일 서제국 일행을 맞아 준비한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백작 부인이랑 점검도 해야 했으니까.

식당으로 가기 전, 나는 작은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 번 두드리고 한번 손톱으로 긁었다.

서제국 일행의 방문에 맞춰 혹시 몰라 그와 맞춰둔 신호였다.

“테이블 위에 식사 둘게요.”

- 똑똑, 끼익

“맛있게 먹고 와요.”

내가 낸 소리와 똑같은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

‘미친 X낀가?’

나일은 침대 위에 구겨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여자는 제게 마음이 없었다.

그저 생명을 구하고픈 순수한 마음이 다인데, 허락도 구하지 않고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것도 그렇게 갑자기, 강압적으로.

아….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공간이 문제다.’

이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여자에게 신경이 쏠렸다.

이 망할 작은 공간에서는 제 시선을 잡아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나일은 이 공간 안에서, 저 밖의 보이지 않는 여자를 보려고 애썼다.

그랬다.

여자는 밖에 있었지만 동시에 이 방에도 늘 있었다.

“하하.”

아니 미친 새끼 진짜.

멋지게 뭔가를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해놓고 놀라서 방으로 쪼르르 도망 와 문을 닫아버렸다.

‘그냥 등신 새X지.’

“아아.”

“등신.”

나일은 제 머리를 감싸고 쥐어뜯었다.

도무지 머리를 흔들어 봐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지.

- 파렴치한!

- 파렴치한!

- 변태!

머릿속에서 쳐다보기도 싫다는 표정의 여자가 계속 제게 변태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줘….”

나일은 베개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

방에 돌아온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나도 안 먹었네.’

테이블 위엔 저녁으로 준비해 둔 음식이 아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흠.”

작은 방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어색함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서제국 황자가 오기 전 하기로 마음먹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 그 일들을 해야 할 때였다.

터벅터벅 걸어가 작은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

“나예요. 들어갈게요.”

문을 열자, 그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어요?”

이쪽은 보지도 않고 그가 대답했다.

“밖에 음식 있는 거 알면서 왜 안 먹었어요.”

“혹시 누가 들어왔을 때, 방에 주인이 없는데 음식이 비어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조심스러운 성격이면서 나한테 왜.

속에서 뭔가가 벌컥 올라왔지만 나는 그것을 다시 쑥 밀어 넣었다.

이럴 필요 없지.

원작의 황자의 성격은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화낼 것도 없고 마음 상할 것도 없다.

원래 그런 인간이고, 그가 조심스럽게 행동한 건 현명한 거니까.

“나 없을 때 아무도 안 왔죠?”

“네.”

“….”

“….”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황자였다.

“아까 그건….”

“이제 얘기하지 말죠. 그건.”

“….”

“별로 중요한 일 아니잖아요.”

더는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어 기분이 나빠지기만 했으니까.

내 말에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목욕물 준비했으니까 목욕이나 해요.”

*

“음.”

나는 내 방 한가운데 놓인 욕조를 바라보았다.

하녀들이 가져다준 욕조는 사람 둘이 들어가도 될법한 사이즈였다.

이걸 어떻게 옮겼대.

아무래도 욕조를 작은 방으로 들이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저 괜찮….”

“아니요, 제가 안 괜찮아요.”

너 지금도 정수리 냄새나요.

닦으라고 물수건하고 대야에 담긴 물을 제공했으니 씻긴 했겠지만, 몸도 불편하고 혹여 들킬까 걱정돼 제대로 각 잡고 씻은 적은 없었다.

서제국 일행이 저택을 돌아다니면 아무래도 더 씻기 어려워질 텐데, 내 코한테 버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움직이는 게 불편해서 제대로 못 씻었잖아요. 서제국 일행이 오면 더 조심해야 하니 씻기 더 어려워질 거예요.”

그는 내 옆에서 나와 같이 둥그런 욕조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김을 쫴서 그런가, 얼굴이 벌써 벌겋네.

“욕조를 옮길 수는 없으니까, 제가 작은 방에 가 있을게요. 씻어요. 아, 아직 다 아물지 않았으니까 들어가지는 말구… 알겠죠?”

내 방문으로 가 문단속을 철저히 한 후, 나는 쪼르르 작은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벽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씻으라고 욕조에 물 받아줬더니 왜 허수아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을까.

그나저나 나는 왜 긴장되고 난리람.

긴장될 만하지.

지금 내 방에서 외간남자가 옷을 훌러덩 벗을 건데.

나는 왼쪽 가슴 부근을 쓸어내렸다.

‘진정해 친구.’

멋대로 남의 입술에 스킨쉽이나 하는 파렴치한에게 가슴이 뛰는 건 부끄러운 일이란 말야. 

가슴이 하도 콩콩거려 등을 통해 기대고 있는 벽이 울릴 것만 같았다.

바깥이 조용하니 더 그랬다.

“아, 이 문도 닫아줄게요. 편하게 씻….”

혹시 내가 있는 작은 방문을 열어놔서 안 씻고 있는 건가.

내 방문도 닫아놓았고,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누가 들어온다면 빨리 뛰어오라고 작은 방문을 열어둔 것인데.

역시 불편하겠지?

닫아주려고 문 쪽으로 팔을 쭉 뻗었을 때였다.

방문으로 쓱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팔을 뻗기 위해 숙였던 상체를 팍 들어 올렸다.

“악.”

짧은 타격음 소리와 함께 머리가 무언가와 꽝 부딪혔다.

아파서 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드는데 황자가 방 한구석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어? 괜찮아요?”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턱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들어 올린 내 머리에 턱을 맞은 듯싶었다.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모르고…”

“압니다.”

그런데 왜 목욕하라 했더니 방으로 왔나요? 하는 얼굴로 쳐다보니 그가 입을 열었다.

“갈아입을 옷을 어디 두었는지….”

“아! 저쪽에….”

옷을 개어둔 쪽으로 턱짓하자, 그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작은 방으로 들어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펴, 편하게 씻어요.”

그 말과 함께 스르륵, 벨트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자락이 사라락 몸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퐁당, 하는 물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내 침도 넘어갔다.

나는 흥분한 내 목젖을 쓰다듬었다.

‘정신 차려, 목젖아. 시체시체 예비 시체.’

그는 내 말대로 수건을 적셔 가며 몸을 씻는 중인 것 같았다.

물속으로 수건을 넣었다 짜내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혹시 몰라서 서제국 군복을 두 벌 준비해 뒀어요.”

“인원은 몇 명이랬죠?”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는 인원은 셋이랬어요.”

장교들이 내 방에 쳐들어올 일은 없지만, 그래도 적군의 장교가 셋이나 같은 저택에 머문다는 건 역시 위험한 일일 것이다.

“내일이라… 어? 어 이거 왜 이러지.”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어… 팔이 안 올라가요. 아까 턱 맞아서 굴렀을 때 팔을 뼜나 봐요.”

“….”

“아직 상체를 다 못 씻었는데.”

그래서요.

“도와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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