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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7)화 (17/134)

17화

그 후로 그는 행동을 조금 조심하는 듯 보였다.

전처럼 내게 가볍게 말을 걸거나 장난치는 행동들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서먹하게 있다가는 마지막 준비물을 갖출 수 없기에, 나는 그를 방에서 불러냈다.

- 똑똑

“할 얘기가 있는데 나올래요?”

노크를 한 후 책상에 앉아서 기다리자, 그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열리는 문을 빤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햇살도 잘 안 드는 작은 방에서 지내서 그런가.

그렇지 않아도 허여멀건 그의 피부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어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참 사람의 눈을 지나치리만큼 뚫어져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였는데.

문을 열고 나오는 그의 시선은 뻔히 내가 앉아있는 위치를 알면서도, 내가 아닌 방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나 역시 그와 눈이 마주칠까, 그의 안색을 살피자마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앉아요.”

내 옆에 있는 보조 의자를 가리키자, 터벅터벅 걸어온 그가 자리에 앉았다.

싸워서 책상에 선 긋고 냉전 중인 짝꿍처럼, 그와 나는 각각 책상의 끝에 앉아있었다. 

“어….”

원래 평소 내 성격대로라면 딴말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냈을 텐데, 영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괜히 책상 위에 놓인 빵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서제국 출신 제빵사가 만든 빵이래요. 맛있더라구요. 먹어봐요.”

절인 과일과 커스터드 크림이 파이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밀푀유였다.

그가 밀푀유를 한 번 보더니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자기 앞에 앉은 여자가 왜 이러는 건지,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가 날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껌벅였다.

세상에 사람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그는 먹겠다는 말도 안 하고, 그렇다고 안 먹겠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동상처럼 굳은 얼굴로 그 자리를 지켰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어설프게 빵이나 권했던 나는 그 끈질긴 시선을 받으며 빵칼을 집어 들었다.

상대가 한마디도 하질 않으니까 어색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이게 한입에 먹기엔 좀 크죠?? 걱정 마요. 내가 잘라줄게요. 하하핳….”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밀푀유를 포크로 콕 집어 그의 손에 쥐여 주자, 그가 포크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맛있죠?”

“너무 답니다.”

“단 거 안 좋아해요?”

그가 취향에 안 맞는 단 디저트를 먹고 나서 옆에 놓인 홍차로 입을 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그럼….”

아니 입은 뒀다 뭐해, 단 거 싫어하면 얌전히 주는 대로 받아먹질 말든가.

“단줄 알면서 먹은 거예요. 그쪽이 권하는 거면 아마 평균보다 단 음식일 테니까.”

“….”

“단 음식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열심히 입에 사탕 넣어줄 때부터. 쓴 거 잘 못 먹죠?”

자신이 파악한 내 입맛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늘어놓던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평소 그가 자주 짓던 실없는 웃음이었다.

웃어 놓고 자기도 놀랐는지 다시 표정을 굳히려 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하품은 전염된다고 하던데.

내 생각엔 하품보다도 전염성이 강한 건 앞에 앉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굳어 있던 그에게서 평소와 같은 웃음이 흘러나오자, 내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그의 올라간 입매를 흉내 내고 있었다.

“왜 웃어요.”

“바보 같잖아요. 뻔히 단 음식인 거 알면서 주는 대로 먹는 게. 자기주장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부는 바람에, 커튼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나부꼈다.

커튼에 달라붙어 있던 오후의 햇살이 이때다 싶어 그의 얼굴로 옮겨갔나 보다.

창을 바라보며, 입을 환하게 벌려 웃는 그의 얼굴이 따사롭게 빛났다.

“바보라고 하지 말아요. 이미 스스로 넘치게 바보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자기한테 바보라는 말을 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그가 연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같은 오후가 계속되었으면.

그가 싫어하는 단 음식이나 계속 먹이면서 그를 놀리는 지금 같은 때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바람처럼 시간은 멈출 리 없고, 내일이면 서제국 일행이 온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의 마지막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럼 이건 인제 그만 먹고.”

나는 책상 끝으로 먹던 빵을 슥 밀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새하얀 종이와 펜을 그 자리에 올렸다.

“내가 나와서 여기 앉으라고 한 이유는….”

나를 위해섭니다.

속으로 그렇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유언을 적어두기 위해서예요.”

*

“유언이요?”

“네 당신의 유언.”

내 말에 황자의 눈이 위아래로 커졌다.

혹여 내 본심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갈까, 나는 황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에이 에이~ 심각한 거 아니구 혹시나, 세상에는 혹시나 하는 상황들이 있으니까요.”

혹시나, 내가 당신을 해하고 나서 당신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공을 들여 꼼꼼히 시체를 땅에 묻거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황자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동제국 측에서는 그를 살해한 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수사에 나서겠지.

물론 그 전에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겠지만, 내가 무슨 범죄 장인도 아니고 모르는 일이잖은가.

하지만 유서가 남아있다면 어떨까.

그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어 수사가 시작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당신을 라울 호수까지 잘 데려갈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왕국의 동쪽 지역을 지나 동제국으로 넘어가겠죠. 이제 그게 99퍼센트라면….”

사실 그거야말로 1퍼센트겠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당신에게 불운한 일이 생긴다면, 내가 당신의 지인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다거나 그럴 수 있으니까요.”

“아….”

황자는 이해했다는 투로 짧게 탄식했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써야 해요. 알겠죠?”

그에게 유언을 적도록 하는 이유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였지만, 그의 유언 중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알고 싶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에 내 손으로 이뤄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걸 이루려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 당신을 죽인 대가로 내게 남아 나를 괴롭힐 살인의 기억을 완화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떠안게 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 미리 발버둥 치고 있는 거다.

누구한테 남기려나, 당연히 공작이려나.

나는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손에서 깃펜을 굴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당신은요?”

“네?”

“나를 돕는 일은 당신한테도 위험한 일이고, 그럼 당신도 유언이 필요하잖아요.”

“전 안 죽을 건데요?”

너만 죽을 건데 내가 왜?

아차차.

너무 확신해버렸다.

가끔 이렇게 헷갈린다니까. 거짓말쟁이들은 피곤해서 어떻게 사나 몰라.

“… 안 죽고 싶지만 저, 저도 죽을 수 있겠죠? 사,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하하핳… 음 그럼….”

가족들한테 남길만한 말을 떠올려 봤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진짜 피비로 태어나 이 삶을 누려왔다면 당연히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이 떠오를 테지만.

“음… 잠깐이었지만 고마웠다고 할래요.”

“잠깐이었지만 고마… 그게 뭡니까?”

내게서 펜을 빼앗아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나가던 황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요? 뻔하지 않아서 이상해요?”

“그게 답니까?”

“아! 아빠 술 진열장에서 위스키 한 병 훔쳤다고, 그것도 추가해줘요. 그리고 오빠는 방에 흰 가루 진통제 있는 거 내가 아는데, 기분이야 좋겠지만 적당히 먹으라고 말해주고…

엄마는… 엄마는 같이 손잡고 쇼핑 갔던 거 너무 즐거웠다고 얘기할래요.”

“하.”

황자는 김빠진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아 적었다.

고개를 빼 종이 위를 보니 반듯한 글자가 쭉 적혀 나가고 있었다.

글씨체가 예쁘네.

그리고 또 누구에게 할 말이 있을까.

나는 깃펜을 쥐고서 내 말을 기다리는 남자의 이마를 보았다.

이마 위에서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또….”

“….”

“당신에게 남길게요.”

그 말에 황자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지목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건지, 동그랗게 뜬 까만 눈이 더 댕그래져 있었다.

내가 만약 호수에서 이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그는 살아서 동제국으로 돌아가겠지.

그럼 그는 적어도 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내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를 죽이고 내가 사는 것.

두 번째는 그를 안전하게 동제국으로 도망치게 돕고, 그에게 자신을 열심히 도왔던 꽤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나는 백이면 백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르겠지만, 만약 내가 몹쓸 일을 당해 죽게 된다면…

그래서 내 의지는 아니지만 두 번째 선택지가 골라진다면.

‘그렇게 기억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당신을 구해준 사람으로 날 기억해줘요.”

당신에게 살인자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그렇게 기억되고 싶거든요.

그럴 수 없겠지만.

어?

왜 앞이 까맣지.

그 말을 뱉은 순간, 시야가 갑자기 암전됐다.

아니 그건, 코앞에 다가온 남자의 얼굴이었다.

*

나일은 여자의 뒷목을 감싸고 있는 제 손을 뒤늦게 발견했다.

여자의 잔머리가 손에 닿아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우악스럽게 여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긴 제 손에도 놀랐지만, 지금 문제는 손이 아니었다.

제 입술에 닿아있는 여자의 말캉한 입술이 느껴졌다.

입술을 벌려야 하나, 다물어야 하나.

아아 아니지 입술을 떼야 했다. 그게 맞지.

여자의 입술 역시 정지한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놀랐겠지? 당연히 놀랐겠지. 지금 여자는 놀라서 정지해 버린 것이다.

‘뒷목을 감싼 손부터 먼저 떼야 하나, 아니 입술을 먼저….’

아무것도 생각할 틈 없이 튀어나간 제 손과 입술 때문에 나일 역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아있는 상태로 손만 떼면 이상한데? 역시 이, 입술을 먼저 떼야….

아니지 아니지.

둘 다 동시에 떼야지. 그러자.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떼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실행하려는데 쿵쿵쿵쿵 달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내 심장 소린가?

자세히 들어보니 두 개가 같이 달리고 있었다.

심장 한 개가 이렇게 뛰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까 자신과 그녀 둘 다 빨리 뛰고 있는 게 맞았다.

“저기….”

“으악!”

입술이 닿아있는 상태에서 여자가 말을 내뱉자, 마치 자신의 입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나일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나일이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 두근두근두근두근

너무 놀라서 그런가, 제 호흡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여자가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며,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저를 올려다본다.

“이거 뭐에요?”

“….”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몰랐으니까.

계획하고 실행한 게 아니라고, 제 손과 입이 그랬다고 말을 하면 미친놈처럼 보겠지.

“미안,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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