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가씨, 요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진짜 맛있는 빵집이 있대요.”
상가 거리의 흙바닥이 영 고르지 못한가보다.
작은 돌멩이들이 마차 바퀴에 갈려 나가는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라면 국가사업으로 도로정비부터 할 것 같은데.
빌론 왕국은 특히나 관광으로 먹고산다면서 길바닥이 이렇게 울퉁불퉁해서 쓰나 이거.
“최근에 개업한 곳인데, 서제국 출신의 제빵사여서 신기한 빵이 엄청 많다네요? 들렀다 가실래요?”
마차 바퀴가 작은 돌멩이 위를 굴러갈 때마다, 그 진동이 배가 되어 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소중히 품에 안은 유리병의 바닥을 손으로 감쌌다.
중요한 물건인데 혹 깨지기라도 하면…
“아가씨?”
“어?? 아, 미안.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래?”
“아가씨 빵 좋아하시니까, 가는 길에 새로 생긴 빵집에 들르는 건 어떠신지 여쭸어요.”
“아, 빵 좋지. 너무 좋아,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하녀가 내 품에 소중히 안겨 있는 보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새로 산 화장품이 되게 마음에 드시나 봐요.”
“아, 이거….”
그녀의 말대로, 내 손에 들린 물건 중 대다수는 화장품이 맞았다.
피비는 옷뿐 아니라 화장품도 다 예전 것들뿐이어서, 새 화장품을 구매한다는 이유로 밖으로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품속에 있는 것 중 하나는 화장품이 아니었다.
“화장품이 너무 오래된 것들이라 바꿔야 할 것 같아서. 마침 중요한 행사도 있고 하니까.”
“역시 아가씨도 기대되시죠?”
“응, 두근두근해.”
이전 생에선, 무단횡단도 몇 번 해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난데 말이야.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를 가슴에 품고 있으니까 막 심장이 뛰어.
“그것 봐. 아가씨는 이렇게 설레어하시는데 다들 몰라서 그런다니까요.”
“뭐를?”
“2황자님하고의 시간을 독식할 수 있는데 티파티를 여시는 거요. 그 이유가 아가씨가 2황자님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얘기들을 하거든요.”
“그럴 리가. 나 관심 많아~”
대답하며 구두에서 한쪽 발을 꺼내 하녀 앞에 내밀어 보였다.
내 발톱 위엔 곱게 칠해진 보라색 물감이 굳어있었다.
발이 너무 심심해 보이는데 여긴 매니큐어가 없으니 대충 물감으로라도 바른 것인데,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관심이 있으니까 이런 것도 신경 써서 발랐지.”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미남이 집에 온다는데 관심이 없을 리가.
다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지.
“나도 2황자님이 매우 궁금해. 이제 곧 보겠네. 기대된다.”
나는 품속에 보따리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유리병 속 액체가 찰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
하녀들이 한바탕 다녀가고 나면 남겨진 나는 늘 정신이 혼미했다.
부티크에서 맞춘 옷들도 도착했고, 새 화장품도 샀겠다, 하녀들은 내 스타일을 미리 점검해 보겠다며 몰려들었다.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화장품을 발랐다 지웠다 하고 나니,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다 끝나고 실내복으로 다시 갈아입혀 주겠다는 것을 물리고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내일이 지나 그다음 날이면 서제국 일행이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2황자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있었다.
그리고 동제국 황자님을 살해하기 위한 내 준비도 함께 끝이 났다.
그와 함께 서제국 병사로 위장해 이동하기 위한 서제국 군복과 이동수단을 준비했고, 그를 살해하기 위한 도구들도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왜 총이 없냐고.’
내게는 급소를 공격해 상대를 즉사시킨다는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급소도 모르거니와 그럴 힘도 없고.
팔다리를 살펴보면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의 모양새였다.
총이 있다면 가장 고통 없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총을 들고 다니는 병사는 떠오르질 않았다.
이 세계가 총기류가 없는 세계였나 보다.
총기류를 구하려 암암리에 알아보았지만, 총기류 비슷한 물건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내가 구한 물건은 마비약이었다.
마시면 짧은 시간이지만 신체가 마비되는 독극물이다.
마비 말고 마시면 바로 깔끔하게 저승으로 보내주는 독극물을 구하려 했지만, 그 정도의 물건은 내 선에선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황자와 동행해 라울 호수로 향하고, 향하는 길목에서 범죄를 행하기에 좋은 장소를 만나면 그에게 마비약을 먹인다.
그럼 그는 잠시나마 팔다리가 굳어 허수아비 같은 상태가 될 테고.
뭐 그다음은….
“우욱.”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계획한 살해 장면을 상상하자 안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테이블 위에서 집어 든 빈 물컵 안에 급히 올라온 것들을 게워냈다.
내 안에서 나온 더러운 토사물이 투명한 물컵 안에서 출렁거렸다.
나는 더럽다.
나는 마치 저것과 같지 않나.
차츰차츰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이 명확한 형태를 갖추어 갈 때마다 내 안에서 저런 더러운 것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나는 저런 토사물로 만들어진 인감임이 분명했다.
‘그래, 맞아. 그게 어때서.’
저런 것들을 계속 토해내더라도 나는 살래.
입고 있는 드레스의 팔을 걷어 올렸다.
이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 낸 상처들이 팔뚝 안쪽에 가득했다.
‘정신 차려. 제대로 해야 해.’
다시 생각해보자.
어차피 라울 호수까지 가니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엔 익사라는 방법도 존재했다.
익사시킨다면 시신을 회수하기도 어렵고, 회수해도 그 시체가 황자인지 알아보기 힘들 테니 완전 범죄로서 적격이었다.
‘익사는 시체가 너무 끔찍하게 훼손되는데….’
그의 중간 목적지가 라울 호수이니만큼, 따로 동선을 짤 필요도 없고 시체처리도 알맞았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현대사회면 과로사라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맨날 생수통 100통씩 배달시키는 거지.
“….”
어쨌든 할 거야. 약한 소리 하면서 밍기적거릴 때가 아니야.
해, 한다고. 못할 거 같아?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나는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그 몇 단어만으로 오해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는 어젯밤, 내가 적어놓은 몇 단어만으로, 내가 자신과 호수까지 함께하려 한다고 오해를 했다.
함께하려는 건 맞았다. 문제는 그 동기가 완전 다른 것이어서 그렇지.
그 당시에는 내 본심을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좀 찜찜한 느낌이 계속 남아있었다.
‘내심 내가 함께해주길 원하고 있었던 건가?… 고의인가?’
혼자보다는, 나처럼 이 왕국에서 확실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옆에 있어 주면, 호수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난 내 신분을 밝힐 생각도 없는데?
호수까지 동행하게 된 건, 그의 의도 보다는 내 의도에 훨씬 가까웠지만,
소설 속에서 보았던 황자의 면모를 은연중에 본 듯해, 내심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상대방도 모르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조종하곤 했지.
실제로 만난 그가 너무 아이처럼 느껴져 방심하고 있었지만.
‘나 완전히 소설 내용은 잊어버리고 있었네.’
하긴,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런 나쁜 성격 같은 건 다 날아가 버린단 말이지.
엄청 교활한 성격이었는데.
“까먹지 말자. 나쁜 놈이야.”
“누가요?”
*
이 황자놈, 소리 없이 방에서 나와 사람 놀라게 하는 일에 맛 들였나 보다.
침대에 대짜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 시야로 그의 얼굴이 쑥 들어왔다.
“왜 함부로 나와요? 여긴 내 방이에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안 그래도 그를 어떻게 죽일지, 뭘 더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하던 중이라 양심이 아팠나 보다.
말이 말릴 새도 없이 뾰족하게 나갔다.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던 중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생각이 없어요?”
“….”
“아니… 날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지금 당신을 보호하고 있는 건 맞지만 우리가 친구인 건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냥….”
그냥….
말을 이어가려던 나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이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지.
황자가 편하게 행동하도록 둔 건 나 아닌가.
어차피 며칠 후면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일도 더 없을 테고.
“얌전히 있으면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요.”
“그게 궁금해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허겁지겁 말을 꺼냈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만면했다.
“당신은 귀족 영애고 나는 일개 병사일 뿐인데, 왜 당신이 날 이렇게까지 돕는지 그게 궁금해졌거든요. 그걸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나와 버렸네요. 미안해요.”
스스로 말을 하면서 안정을 찾은 것인지, 당황해서 살짝 거칠어졌던 그의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도리어 당황스러워진 건 침착하게 그를 쏘아붙이던 나였다.
아아.
범죄자가 되기 위해서는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만 한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가 이런 질문을 혹시 할까 봐, 미리 생각해둔 답변이 이미 있는걸?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 말에 어울리는 표정만 지으면 되는데,
어째 내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만 갔다.
“당신은 내가 구한 첫 번째 사람이에요.”
“….”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겠죠.”
“…?”
의문을 띄운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의사도 아니고, 전쟁에 나가는 병사도 아니고, 당신 말대로 그냥 평범한 귀족가 여식이에요.”
“….”
“그런 내게 사람을 구할 기회가 또 주어지겠어요? 또 주어진다고 해도 이번처럼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까
“어쩌면 생에 단 한 번 주어진 사람을 구할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란 말이에요. 내 만족을 위해서라구요. 다른 여자들은 쉽게 못 하는 일, 나는 해냈어. 그런 거라구요. 그러니까 딱히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군요.”
내 답변을 들으며 내내 떨리던 그의 눈동자가 지금은 바닥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내가 죽일 사람에게 은인으로까지 인식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아니니까.
그런데 울적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니까 왜 저절로 내 입이 열리는 걸까.
“그래도….”
“…?”
“그래도 당신이 회복되는 걸 보면서….”
“….”
“그게 고맙고….”
내 입에서 뱀이 기어가듯 그를 달래는 말이 술술 나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당신이 내가 구해준 목숨을 소중히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건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는 위선자의 기질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뻤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겠으니 들어가 줄래요? 2황자님 접객용으로 특별히 맞춘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안 되거든요.”
그에게선 딱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