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일은 제 배를 쓱 만졌다.
상처는 성실하게 낫고 있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는 아물 것이다.
그럼 이제 보지 못하겠구나.
흔한 여자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특별할 것 없는 이 여자를 이곳에 두고 가기가 싫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여자와 계속 소소한 대화를 하고 흔해 빠진 음식을 나눠 먹고.
데려가 내 방에 앉혀 놓으면 어떨까.
이 여자의 삶과 제 삶을 고르게 펴서 포개놓으면 어떨까.
‘불행해지겠지.’
어차피 자신은 썩어가는 망령이고 곧 땅에 묻힐 것이다.
그 황량한 황궁에서, 저주에 걸려 죽어가는 남자 옆에서는 이 여자도 웃지 못 할 것이다.
나일은 고개를 돌려 침대 위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도 다른 여자들처럼 서제국 2황자가 온다는 소식에 설레고 있을 터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나일은 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금발이 햇살에 반짝였다.
평범하게 행복한 사람이 계속 그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여자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제가 빼앗을 권리는 없다.
그게 옳다.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거절해요.’
가능한 빨리 떠나주는 게 모두를 위하는 일이었다.
이 여자의 삶과 제 삶이 겹치는 순간은 이 한순간뿐이리라.
그리고 그게 옳았다.
*
손 안 대고 코 풀기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후,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그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에이씨.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물어보지 말고, ‘그래 저놈은 원래가 죽고 싶어 하는 놈이다.’라고 계속 생각할 수 있었다면,
지금 책상에 앉아서 황자 살해 계획표를 작성하는 내 기분이 이보다는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아니다.
누굴 죽일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평안하고 안녕하길 바란다는 게 말이 되냐.
내 마음에 얹어질 짐 하나 견디지 못할 거면 그냥 내가 콱 죽는 게 낫지.
‘하지만 난 살 거니까.’
응.
살아서, 짧디짧고 허하기만 했던 지난 생은 싹 잊고, 풍족한 이번 생으로 보상받을 거니까.
나는 꿋꿋하게 계획표를 적어 내려갔다.
황자의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서제국 일행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은 내 수호 아래 얌전히 몸을 숨긴다.
그 후 서제국 일행이 떠나면,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마자 라울 호수로 간다고 했다.
라울 호수라면 빌론 왕국의 정 가운데에서 아랫부분에 위치한 호수였다.
지금 왕국은 서쪽은 서제국, 동쪽은 동제국이 들어와 있는데, 그 가운데 영역은 공동경비구역으로 라울 호수도 그 공동경비구역의 일부분이었다.
- 공동경비구역 중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이 라울 호수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라울 호수는 딱히 경비를 세우지 않아도 그곳을 넘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호수 안에 식인 식물이 사니까.’
근데 호수를 어떻게 건너겠다는 거지?
호수를 넘으면 바로 동제국군과 만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문제는 호수를 넘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비가 허술하다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배를 띄울 수도 없고, 식인 식물 때문에 헤엄쳐서 갈 수도 없는데.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아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골머리를 앓았다.
계획서를 착착착 써 내려가기 위해 이미 펜촉에 잔뜩 묻혀 놓은 잉크가 말라가고 있었다.
‘어쨌든 넘어갈 방법이 있으니까 호수로 간다고 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황자가 호수를 넘기 전에 그를 쓱싹해야만 했다.
그가 호수를 넘어 동제국군과 합류해 버리면 내 손을 떠나게 되니까.
좋아, 호수를 넘기 전까지로 기한은 정해졌다. 그럼 다음 생각해야 할 것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였다.
‘어떻게….’
낙사? 높은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뒤에서 밀기만 하면 되니까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내게 현실성 있는 선택지였다.
아, 하지만 호수까지 가는 길에는 낙사 시킬만한 높은 지형이 없었다.
교사? 이것도 안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살하는 인물들이 이 방법을 사용해 죽는 것을 자주 접할 수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목매달아 죽는 것이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서 주워듣기로 목에 줄이 조여오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안 돼 안 돼.
질식사? 지금부터 100초만 숨 참아봐라. 미친다.
교사보다는 덜하지만 이것 역시 영상매체에서 편한 자살 방법으로 보여지곤 했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다. 혈중 산소농도가 0이 되었을 때부터 3분이나 참아야 하는데, 그 3분 동안 미치는 거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과다출혈이었다.
마취 후에 상처를 내면 아픔이 적을 테니 가장 적합해 보이지만, 내가 과연 흉기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어허... 방법 고르기가 너무 어려운데, 언제 할지부터 정해볼까.
내일, 모래? 그가 저택을 떠나기 바로 전날은 어떨까.
아니면 나도 같이 호수로 향하는 길에 동행해서 으슥한 숲에서 그냥?
‘아,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도 언제 하느냐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어디서’ 하느냐였다.
나 혼자 힘으로는 시체를 멀리 옮겨서 묻을 수가 없으니, 최대한 범행 장소와 유기 장소를 일치시켜야만 했다.
그럼 1번.
저택에서 그를 쓱싹한다고 해보자.
저택은 보는 눈도 많아서 어렵기도 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내 방 아래 내가 죽인 시체가 묻혀 있다고 생각을 해봐.’
지져스.
이 저택에서 계속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응가도 싸야 하는데.
나는 아마 식욕 부진에 수면 부족, 변비에 걸리고 말겠지.
저택은 안 된다. 패스.
그렇다면 2번.
저택이 아닌 곳.
근데 저택이 아닌 곳을 어떻게 가지?
갑자기 황자한테 가서, 몸 나았으면 나랑 같이 으슥하고 살해당하기 좋은 곳으로 나들이나 갈래요? 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아니 그렇잖아.
황자는 지금 숨어있는 상태인데 밖으로 동행하자고 한다는 게….
“….”
우선 범행 장소가 결정되지 않으면 범행 방법과 날짜도 정하기가 어려운데 생각을 거듭해도 적당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늙는다는 게 이런 건가.
답 안 나오는 애들 둔 부모들이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던데.
내가 지금 딱 황자 때문에 늙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더 돌아가지도 않고, 나는 책상 등받이에 깊게 등을 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리 좀 식힌 후에 다시 묘수를 생…
“뭐해요?”
“흐와이앗씨!!!!”
이 자식 내가 지 죽이려는 걸 어떻게 알고 나를 심장마비로 보내려구 아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내 얼굴 위로 갑작스럽게 드리운 남자의 얼굴 때문에, 놀란 내 두 발은 방바닥을 세게 걷어찼고.
그 덕분에 무게 중심이 뒤로 가 있던 나는 그대로 의자에서 떨어져 버렸다.
“아야야….”
엉덩이를 비비는 내게 그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집중하는 뒷모습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장난치고 싶어져서 그만…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여전히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비볐다.
하필이면 카펫이 깔리지 않는 곳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가 뻐근했다.
“전 괜찮아요. 엉덩이가 아프긴 하지만.”
그 말에 그가 시선을 쓱 아래로 내렸다. 너 지금 어딜 보는 거냐.
“그럼 엉덩이한테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엉덩이?”
“이봐요. 병사님.”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쓰자, 그가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헤실거리며 웃었다.
웃으면 다냐.
“초범이니까 선처해 준다고 전해달라네요.”
“감사합니다. 엉덩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내 엉덩이에게 인사하는 그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가 여전히 선 채로 날 보고 있었다.
사람을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게 하면 쓰나, 책상 옆에 있는 보조 의자를 가리켰다.
“환자가 서 있지 말고, 거기 보조 의자 가져와서 앉아요.”
넘어지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는데, 침대로 다가오던 그가 오다 말고 멈춰 서서, 책상 위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남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라울 호수 건너기 가능? 나랑 같이 가자고 하면 갈까??”
“우와이씨!”
내가 방금 종이에 끄적거린 황자 살해 계획에 관한 메모를 무덤덤하게 읽는 그의 목소리에, 내 성대가 비명을 내질렀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적혀있는 단어가 몇 개 없어서 더 읽을 것도 없는 그 종이를 남자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남자가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생명의 은인이라 여겼던 상대가 실은 자신을 살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들켰다, 들통나 버렸다, 라는 생각보다 먼저 찾아든 두려움은 분노와 혐오로 일그러졌을 그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왜 이렇게까지….”
그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까 비명을 지를 때 성대가 나가버린 걸까. 목구멍에서 무슨 말이든 끌어 내려 했지만 나오는 말이 없었다.
변명을 해볼까.
내게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그러니 미안하게 됐다고.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입을 닫았다.
뻔뻔하게 변명하며 미안하다는 같잖은 사과를 하는 상상 속의 내 얼굴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제가 어떻게 보답할 수 있죠?”
어떻게 복수 당하고 싶은지... 에? 방금 내가 들은 단어가 복수였나, 보답이었나.
“보답… 이요?”
“네, 저를 동제국까지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저와 동행할 생각까지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동제국까지 안전하게….”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눈치 없는 황자님이시여, 당신은 최곱니다.
“네, 저와 함께하시죠. 안락한 귀환 길을 보장하겠습니다.”
*
자신의 자랑스러운 점을 공유하는 것과 수치스러운 점을 공유하는 것 중, 사람의 사이를 더 빠르게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상 그것은 후자였다.
나는 그에게 뱃살도 아웃팅 당하고, 내 엉덩이와도 인사시켜서 그런지
이전보다 우리의 사이가 사뭇 친밀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 그러니까... 영지를 빠져나갈 때 남동쪽 직선코스가 지름길이긴 한데, 서제국 병사가 가장 많아서 위험해요.”
한바탕 놀라고 넘어지고 소리를 지른 우리는 하하 호호 웃으며 그의 동제국 귀환 계획을 함께 짜고 있었다. 황자가 내가 던지지도 않은 미끼를 덥석 물어준 덕분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위로 돌아서….”
- 꾸륵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던 중, 공기 방울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출처는 그였다.
“배고파요?”
어머 뱃속에 거지 들었나 봐, 벌써 소화가 됐다구요? 놀리려고 하는데.
- 꾸륵
내 배에서도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도 씩, 나도 씩 웃었다.
너도 그래? 아이참 나도 그래. 하는 웃음이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야식 먹고 하죠. 뭐 먹고 싶어요?”
“브로콜리만 아니면.”
“브로콜리만 아니면 뭐든 좋다?”
“어... 오이도 좀.”
“알겠어요. 다녀올 테니까 문단속 잘해요.”
기다려 봐요. 푸짐하게 먹여 줄라니까.
나는 식당으로 살금살금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