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눈사람 작전으로 얻어낸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기몸살과 콧물을 획득할 수 있었다.
“으엣취!”
“아가씨 추우시죠? 제가 금방 피울게요.”
다 꺼져가는 불을 살리기 위해, 하녀는 벽난로 앞에 앉아 열심히 장작불을 들쑤셨다.
“아가씬 몸이 너무 연약하세요. 그것 좀 놀았다고 병이 나다니.”
오늘 만난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방금 온천에 몸을 담갔다 일어난 사람들처럼 개운해 보였다.
그거야 당연히 언니들은 푹 잤고, 나는 밤에 또 나갔으니까 그렇지.
내가 약한 게 아니라구, 말은 못 하지만.
“어제 다들 잘 잔 거지?”
“네, 다들 상태 최상이에요.”
“응. 정말 다행이야. 아픈 건 내가 다 할게.”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하며 하녀는 깔깔거리며 장작불을 뒤적였다.
언니가 열심히 장작을 헤집어 준 덕에 방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 똑똑
“들어와.”
하얀 편지지가 그득 쌓인 트레이를 들고 다른 하녀가 방으로 들어섰다.
황자에게 연이어 두 번이나 패배하고 감기몸살까지 걸려 몸과 정신이 다 피폐해졌음에도,
내가 쉬지 못하고 지금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기 놔줄래?”
“예.”
책상 위 오른편을 가리키자, 하녀가 그곳에 트레이를 두었다.
“와….”
산더미처럼 쌓인 편지지를 보며 놀라고 있자, 장작불을 쑤시던 하녀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게 다 아가씨께 온 편지들이에요?”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다들 좋은 신랑감을 구하고 싶어서 몸이 달은 모양이네요.”
그 말에 편지지를 들고 왔던 하녀 역시 동의를 표하며 킥킥거렸다.
몸이 달았다라.
그녀의 저급한 표현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몸이 달았다니. 표현을 가려서 썼으면 좋겠어.”
“예….”
이 상황에서 그런 단어까지 쓰는 걸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표현이 너무 저급하지 않은가.
확실히 지금 셀린 백작가 주변은 2황자의 방문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
나는 2황자가 저택에 머물러 있는 동안, 상대가 누구든 그가 호감을 느껴 정신이 팔려있길 바랐고.
때문에 고위 가문 중 적당한 가문을 골라 몇 군데에 티파티 초대장을 보냈다.
지난번 부티크에서 만난 언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사하고 예쁘게 꾸미고들 와서 타지에서 온 미남을 잔뜩 혼내주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서제국 2황자와 함께 하는 티파티를 준비 중이라는 말은 이 일대로 퍼져나갔고.
남은 몇 장의 초대장을 서로 얻기 위해, 최상급 신랑감을 두고 손가락만 빨고 있던 귀족들이 너도나도 초대장을 원한다며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마 이 주변에 혼기가 찬 여식이 있는 가문에서는 모두 빠짐없이 보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편지 양이 저렇게 많지.
내 책상 위에 있는 편지 수만큼, 백작 부인의 책상 위에도 편지가 쌓여 있으리라.
그만큼 서제국의 2황자는 군침이 도는 신랑감 후보였다.
개중에는 2황자와의 시간을 독식할 수 있는 셀린가가 왜 저럴까, 하는 시선들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남들 시선으로 볼 때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내 사정을 모르니까.
계속 모르라고 하고.
‘어디 이것부터 읽어볼까.’
편지 더미 제일 위에 올라가 있는 노란색 편지를 집어 들었다.
어디 보자… 뭐라고 써놨으려나.
- 셀린 영애! 그간 잘 지내셨나요? 소식을 통 전해주시질 않아 너무 궁금하답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뵌 지도 오래니, 제가 적절한 시기에 백작저를 방문하여 소식을 나누면 어떨까 합니다. -
아래에 내용이 더 있었는데, 편지의 주인이 제시한 그 적절한 시기는 대충 2황자가 백작가에 머무는 시기와 겹쳐 있었다.
정말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군.
대부분 이런 내용이 주를 이뤘다.
나 네 소식이 너무 궁금해, 만날까? 내가 갈게. 이런 거.
알맹이인 서제국 2황자에 대한 내용은 쏙 빼놓고.
아니 그냥 솔직하게 너도 궁금하지만 서제국 2황자는 백만 배쯤 궁금한데, 나 초대해주면 안 될까? 라고 묻는 게 더 초대하고 싶게 만들 거 같은데.
귀족들의 화법은 특히나 말이 아닌 문어체로 구현될 때 더 기름져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 편지를 개봉했다.
- 셀린 영애. 평소 셀린 영애의 기품 있는 언사를 늘 높게 생각해 왔답니다. 우리 아이도 영애처럼 품위 있는 숙녀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영애가 원한다면, 아이를 보내 영애의 우아함을 배우게 하고 싶 어쩌구 저쩌구. -
한미한 자작 가문의 부인이 보낸 편지였다.
이 집에 혼기가 찬 여식이 있던가?
아, 있었다, 9살짜리 딸.
…
‘미친 거 아냐 이 아줌마?’
아니 아무리 2황자의 황금 동아줄이 잡고 싶어도, 9살이잖아요. 아줌마.
9살을 여기다 보내서 뭐하실려구요.
서제국 황자님이 소아성애자이길 간절히 바라고 계신 겁니까?
아, 스트레스.
아침에 약 먹고 좀 살만해졌던 몸 상태가 다시 악화되는 기분이었다.
한 장만 더 읽고 좀 누워서 쉰 다음에 마저 해야겠다.
나는 더미에서 모퉁이가 빼꼼 빠져 나와 있는 편지 하나를 빼냈다.
다른 편지들처럼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한 그 편지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말로 끝나고 있었다.
- 오랜만이야 피비. 너의 까탈스러운 성격에 질려서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게 됐네.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나눴음에도 이런 편지를 보내는 걸 보면 아직도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나보다.
너도 내 편지가 반갑지 않겠지. 나도 이런 일이 아니면 네게 다신 연락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너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가길 바라기 때문이 아냐.
이 편지의 요점은 이거야.
서제국의 2황자와 가까이하지 마.
셀린 백작가가 수도로 향하는 서제국 일행의 제3 거처로 정해졌다는 걸 아버지께 들었어.
그렇다면 혹시 제1 거처와 제2 거처가 어디였는지도 알고 있니?
제1 거처는 내 사촌의 저택이었어.
서제국 영토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지.
그곳에서 내 사촌은….
사정상 모든 걸 자세히 얘기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줘.
하지만 피비, 우리가 이제 더는 친구가 아니라 해도, 나는 한때 내 친구였던 네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아.
그걸 깨달아서 편지를 써.
이 편지는 읽은 후 바로 불태워 줘.
넬라가. -
넬라?
빙의 전 기억이 없는 난, 넬라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피비한테 진짜 친구가 있었다면 바로 얘다.’
네 소식이 궁금하다며 맛있는 쿠키를 잔뜩 가져갈 테니 같이 먹자 이딴 거 말고.
미사여구 하나 없고 듣기 좋은 말 하나 없었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는 그거 한 장이었다.
나는 넬라의 편지를 불태운 후, 바로 그녀에게 보낼 답신을 작성했다.
내용은 간결했다.
- 고마워. 넬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어.
물론 네가 충분히 원한다면.
넬라 피토르.
그래도 이 주위에 있는 가문은 다 외웠는데, 편지에 찍힌 인장이 낯설어 찾아보자, 넬라라는 인물은 피토르라는 가문에 속해있었다.
‘피토르 피토르…’
가문의 정보를 확인해보니, 빌론 왕국의 서남부쪽에 위치해 있었다.
계보도를 확인해보니 그녀의 말대로 서제국 일행의 1거처는 그녀의 사촌이 속한 가문이었다.
옆에서 잡일을 돕던 하녀에게 물었다.
“넬라 피토르를 기억해?”
나이가 든 하녀는 셀린가에서 오래 일한 축에 속한 하녀였다.
“넬라 아가씨랑 요즘도 연락을 하셨어요?”
“응, 편지가 왔어.”
“어머, 수도로 다시 올라오신대요? 아가씨 좋으시겠어요.”
얘기를 모아보니, 넬라는 피비의 유년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떤 이유로 연락하지 않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편지의 경고가 한 귀로 흘려버릴 만한 내용은 아니야.’
이런 경고를 보낼 정도면 2황자에게 뭔가가 있다는 건데.
소설에서는 동제국을 주로 다뤘기에 서제국에 관한 일은 아는 것이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서제국 황자는 핏줄 좋고 외모 좋고 매너 좋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인물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어째서?
‘동제국의 공작 같은 인물인가.’
그렇다면 말이 됐다.
질투에 눈이 멀어 피비를 죽였던 그런 인물이라면, 이런 경고성 편지가 말이 되지.
하긴, 그런 높은 신분의 자들이 미친놈인 게 희귀한 일인가, 흔하지 흔해.
‘서제국의 2황자라….’
*
나일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방을 나오자,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여자가 보였다.
책상 위에는 여자에게 온 것으로 보이는 편지들과 여자가 쓴 답신들이 가득했다.
‘자는 건가.’
가까이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꽤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위에는 새로 주문한 드레스가 보였다.
옅은 하늘빛의 드레스는 분명 여자와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일은 여자가 앉은 의자 옆에 놓인 보조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자는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나일은 가만히 그 얼굴을 보았다.
오후의 변덕스러운 구름이 햇살을 가리고 드러낼 때마다, 여자가 코를 찡그렸다 폈다 했다.
그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
‘이건 예의가 아니지만.’
여자가 뭐라고 답장을 보냈는지 읽어볼까.
여자에게 온 편지들의 내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제국의 황자가 온다는 소식에 이 근방이 들썩이고 있을 테니까.
아마 빌론 왕국의 동쪽 지역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일 테지.
로건 녀석이 이끄는 동제국 일행이 비슷할 때에 도착할 것이다.
영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달려들 것이고 그놈은 인상을 찌푸리며 도망을 가겠지.
그 생각을 하니 실소가 터졌다.
여자들을 반기지 않는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자식은 좀 심하니까.
나일은 책상 위에서 구겨진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구겨놓은 거로 보아 쓰다가 잘못 쓴 답신들일 것이다.
- 그렇게 서제국 2황자님이 좋으면 이혼하고 아줌마가 오세요. -
“풉.”
나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어떤 내용에 대한 답신인지 예상이 갔다.
‘본심은 이건데 보내진 못했군.’
나일은 그렇게 구겨진 답신들을 모두 읽었다.
하나같이 속으로만 해야 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일은 이 여자가 속으로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진영에서 이탈해 혼자 이곳에 있던 자신의 정체가 궁금할 만한데 여자는 아무것도 묻질 않았다.
아마 자신을 탈영병쯤으로 생각하려나.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려나.
‘내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이 여자가 지금처럼 웃을까.’
만약에 그래 준다면.
‘데려갈까 이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