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푸흡.”
나는 그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저택 입구에 실루엣만 보면 185cm에 100kg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니 도대체.
“옷을 몇 벌을 껴입은 거예요?”
혹시 듣는 이가 있을까,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소곤소곤 물었다.
추운 날씨에 환자를 데리고 나오는 거니까, 따듯하게 껴입으라고 옷을 왕창 던져주긴 했는데.
그걸 또 다 입었네.
굉장히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가 밀면 바로 구를 수 있을 것처럼 둥글둥글해져 있었다.
보면 볼수록 웃겨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입으라면서요.”
“네. 따듯해 보이고 좋아요.”
“그쪽이야말로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거 아닙니까?”
“방금 아가씨라고 부르더니 왜 이번엔 또 그쪽이에요.”
“방금은 저택에서 너무 가까웠으니까….”
그 말을 하며 남자는 모자 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모자를 두 개나 줬었나?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들고 와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달라붙는 모자에 그 위로 털 귀마개까지 착용한 그가 그러고 있으니까, 꼭 머리 긁는 눈사람 같았다.
내가 오늘 보여줄 게 눈사람인 줄 어떻게 알고 눈사람처럼 껴입었대.
“가죠.”
목적도 모른 채 멀뚱히 서 있는 그의 옷 소맷자락을 잡아끌자, 남자가 순순히 내가 이끄는 쪽으로 끌려왔다.
*
모두가 잠든 시각, 한밤의 저택 산책로는 그와 내가 눈을 밟는 뽀드득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남자의 한 손에 초가 든 랜턴이 들려있긴 했지만, 이른 새벽의 어둠을 물리치기에는 까마득히 부족했다.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둡고 적막했지만, 딱히 무서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귀신이 나와서 옆에 있는 애 잡아가 주면 고맙지 뭐.
무작정 그의 소매를 잡아끌고 정원 산책로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물어오는 말이 없었다.
슬쩍 곁눈질로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자, 그의 숨이 하얗게 얼어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새벽빛이 내려앉은 남자의 옆얼굴은 역시 보기가 좋았다.
잘 생겼어.
“그런데 왜 여길 걷고 있는 겁니까?”
맨날 작은 방에서 볼 때는 남자가 주로 침대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고, 내가 서서 내려다보는 식이라 몰랐는데.
바로 옆에 붙어 서보니 그의 어깨가 내 정수리와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그가 갑자기 질문하며 날 내려다보는 통에,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길을 돌렸다.
“산책로를 왜 걷겠어요?”
“….”
“산책하자고 나온 거예요.”
그가 뭔 뻘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당신의 임시 보호자 아닙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지만.”
임시… 그가 작게 내 말을 따라 읊었다.
“당신이 몸은 회복되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서… 별 대단한 건 아니구요.
계속 작은 방에 갇혀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그러니까 나와서 같이 바람 좀 쐬자는 거죠. 마침 눈도 내렸고.
건강한 정신, 건강한 몸! 둘 다 챙겨야 하니까.”
헤헤, 사실은 거짓말이야.
건강한 정신은 개뿔, 너의 정신을 짓밟으려고 나온 거란다.
그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런 건 신경 안 써도 되는데.’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자, 어서 내가 만들어 놓은 목적지로 나아가자꾸나.
이쯤 왔으면 나와야 하는데,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같이 걸으니까 좋….”
“오 저기 봐요. 눈사람이다!”
저깄다. 내가 언니들이랑 만든 눈사람!
나는 눈사람이 있는 곳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혹시 그사이 누가 망가트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있었네.
“왜 안 와요?”
눈사람을 보면서 말을 해야 이야기가 진도가 나가는데, 남자가 따라오질 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남자를 향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원래 사람 말 잘 안 듣죠?”
“네??”
“아니에요. 갑니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늘 저분이 안 하던 혼잣말이 좀 많네. 왜 그럴까.
*
황자와 나는 랜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우리 앞에는 오늘 탄생한 눈사람이 서 있었다.
눈사람의 두 눈엔 까만 돌이 박혀 있었고, 코로 심은 당근은 뾰족했으며, 왼쪽 눈가엔 보일 듯 말 듯 한 눈물점까지 찍혀있었다.
디테일에 신경을 좀 썼다 내가.
“와 눈사람 진짜 오랜만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할 일 없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혼잣말인데 왜 대답해요.”
“….”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남자가 초 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말이 까칠하게 나와 버렸다.
“흠흠, 아무튼 오랜만에 눈사람 보니까 기분은 좋네요. 그렇죠?”
“네. 누구 솜씨인지 몰라도 잘 만들긴 했어요.”
“네. 정말 잘생긴 눈사람이에요. 하지만.”
일부러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였다.
이제 슬슬 집중해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저라면 절대 눈사람을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단호한 눈빛과 어투로 말하자, 그의 호기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자, 어서 이유를 물어봐 어서.
“왜요?”
그렇지!
그가 바로 미끼를 덥석 물어준 덕에, 버벅대지 않고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불쌍하고 안타깝잖아요. 눈사람의 생은.”
이다음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봄이 오면 죽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삶이잖아요.”
슬쩍 그의 눈빛을 살피자, 무표정했던 그의 눈빛에 약간의 동요가 보였다.
그래그래, 집중해.
“봄이 오면 난 녹아서 사라지겠지… 겨울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불안에 떨겠죠. 그러다 봄이 오면 정말 죽게 되고요.
그게 뭐예요. 죽음을 기다리는 삶일 뿐이잖아요. 불안에 떠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저주에 걸린 당신의 삶이잖아.
자 어서 눈사람한테 감정이입을 하라고.
너랑 쟤랑은 완전 동병상련이니까.
“그렇네요. 그런 삶은…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됐다! 됐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요놈 드디어 걸렸구나, 걸렸어.
내가 손 시려가며 눈사람을 만든 보람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리고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내 안에 잠들어 있을 연기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눈사람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지금 많이 불안하지?”
“….”
“계속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그냥 녹으면 돼. 그럼 마음이 편해질 거야.”
“….”
“혼자 녹기가 어려울 테니 누나가 녹여줄까? 그런 부탁하기 어렵겠지만 괜찮아. 그건 나쁜 부탁이 아니란다.”
준비한 대사를 모두 끝마친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그가 앉아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마지막 피날레만이 남아있었다.
그 피날레를 보이고 나면 남자의 트라우마를 확실히 건드릴 수 있겠지.
아니, 이미 지금 많이 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가까이 다가선 나는 황자의 옆에 놓인 랜턴으로 손을 뻗었다.
“뭐하게요?”
랜턴 안에 들어있던 초를 꺼내는 나를 향해 그가 질문을 던졌다.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끝내 주려구요.”
그가 내 손에 들린 초와 내 얼굴, 그리고 뒤편에 있는 눈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눈사람이 그렇게 안타까워요? 그렇다면 내게 다른 방법이 있어요.”
내 손에서 초를 뺏어 든 그는, 그 초를 원래 있던 랜턴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나 환잔데.”
어쩌라고요.
“도와줘요.”
원래 계획했던 마지막 장면을 실천해야 했지만, 남자가 다른 방법이 있다는데 그건 들을 필요도 없다고 우길 수도 없고.
결국 나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덩이 불리는 일을 도왔다.
말없이 눈덩이를 뭉치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티 나지 않게 흘끔 보고 말 생각이었는데.
‘헉.’
그의 까만 두 눈이 이미 나를 향해 있었다.
당황해서 급히 눈을 돌리는데.
“왜 봐요.”
다시 시선을 눈덩이로 내리며 그가 이유를 물어왔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듯했다.
“아니 그냥… 환자시니까… 콧물 나면 어쩌나 싶어서요.”
“풉. 그쪽 얼굴이 더 빨간 건 알아요?”
내 얼굴이 빨갛다고? 추우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코끝은 꼭 체리 같았다.
“당신도 빨개요.”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 됐다.”
황자가 눈사람의 몸통 위로 머리 부분을 올렸다.
눈코입 같은 건 아무것도 없고 딱 몸통에 머리, 기본만 있는 밋밋한 눈사람을 바라보던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 저게 좋겠네.”
산책로 구석에 세워둔 황금색 갈대 빗자루를 집더니.
- 우지끈
갈대 빗자루를 반 토막으로 아작 낸 그가 빗자루의 갈대를 죄다 뜯기 시작했다.
“음.”
눈사람 뒤통수에 갈대를 붙여서 머리카락을 만들어준 그가 턱을 매만지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좀 짧긴 하지만 그럴듯하군.”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더 주위를 돌아다녔고, 어느새 내 앞엔 새 눈사람이 만들어져 있었다.
황금빛 갈대로는 긴 머리를 표현했고, 눈 자리에는 나뭇잎 두 장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특징은 특별한 것이 없었는데, 유독 눈사람의 몸통 부분이 눈에 띄었다.
“이 눈사람은 몸통 부분이 매끈하지 않네요?”
“아 그거 뱃살이에요.”
“….”
“간식을 좋아해요. 얘는.”
“그렇군요.”
묘하게 기분이 거슬렸지만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뭐, 좀 디테일한 눈사람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게 무슨 방법이라는 거예요?”
내 말에 그가 씩, 자신감이 차오른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그가 원래 있던 눈사람의 방향을 새로 만든 눈사람 쪽으로 돌려세웠다.
거기까지 행동을 마치고 어떻냐는 표정으로 날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는데, 난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바뀐 게 없잖아요. 봄이 오면 죽는다는 사실은 여전한데.”
“그건 똑같지만.”
황자는 내가 그와 동병상련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그 눈사람 옆에 앉아, 당근으로 만들어진 눈사람의 코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이 눈사람은 봄이 언제 올까를 생각 못 해요. 왜냐하면 자기 앞에 나타난 저 눈사람을 보느라 바쁘거든요.”
“….”
“어 저 눈사람은 나랑 눈이 다르게 생겼네? 오 나랑 배도 다르게 생겼다. 저 눈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뭘 좋아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봄이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하는 건 금방 까먹어 버릴 테니까.”
“….”
“뭐 그럼 나름 행복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을 끝맺으며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눈사람만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두 눈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 정말 이제는 살고 싶어 하는 거다.
저주 따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만큼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그렇게 살고 싶은 거다.
누구를 떠올리며 저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공작이려나.
- 오빠. 삶의 의지라는 게 어떻게 하면 생길까?
- 음,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오지 않을까?
나는 오빠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결국 이 사람의 삶의 의지도 소중한 사람에게서 오는군.
이 망할 로맨티스트들. 낭만이 밥 먹여 주냐.
“이 방법 어때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물어왔다.
나는 동의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순 억지네. 무슨 눈사람이 생각을 해요. 어우 추워. 들어가죠.”
오늘도 내겐 소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