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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화 (10/134)

10화

“재미있는 사람이면 다 좋아.”

“재미있는 사람이요?”

“응, 얼굴이랑 몸이 재밌는 사람.”

“꺄아~ 몰라.”

“으흐흐흐.”

재미있는 사람?

얼굴이랑 몸이 재미있다는 게 무슨 말이지.

재미있다는 건 웃음이 난다는 말과 같으니까 보면 웃게 되는 얼굴이란 뜻인가.

벽에 달라붙어 있던 나일은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이제 간단한 움직임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보면 웃게 되는 얼굴이라 하면 역시 우울한 표정보다는 웃고 있는 인상이겠지.

나일은 거울 속 제 얼굴을 바라보며 손으로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안 그래도 만족스러운 얼굴이 미소까지 지으니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문제는 몸이었다.

얼굴이 재미있다는 표현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는데, 도대체 몸이 재미있다는 건 무슨 말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즐거운 정신이란 것은 곧 바람직한 몸에 깃드는 법이 아닌가. 

그는 입고 있는 스웨터의 목 부분을 당겨, 그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평소 그의 복부 근육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갈라져 있었는데 얘들이 어느새 서로 껴안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지.

요즘 부상 때문에 누워있기만 했더니 복근의 선들이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혹시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은 또 다르지 않을까 싶어 제 배를 쓱쓱 문질러 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올록볼록이 아니라 판판이었다.

‘이놈들….’

어디로 가버린 거냐.

안 되겠군.

어차피 여자가 자신을 치료했으니, 제 몸을 쓸고 닦고 문지르며 이 판판함을 다 느꼈을 게 뻔했다.

재미를 줬어야 할 부위에서 재미를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이 스리슬쩍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과거도 판판, 미래도 판판보다는, 앞으로는 올록볼록한 게 낫겠지.

엎드려 누운 그가 플랭크 자세를 시전했다.

*

“아가씨, 저녁 드셨는데 또 드세요?”

내 손에 들린 트레이를 본 하녀가 물었다.

“어어… 나 살찌려고. 방해하면 미워할 거야.”

“호호, 요즘 잘 드시네요.”

복도에서 하녀들과 담소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책상 위에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올렸다.

‘새 드레스를 맞춘 것까진 좋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버렸네.’

드레스도 좋고, 담소도 좋은데 문제는 저녁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버렸다는 것이다.

낮에 나갈 때 백작 부인과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그의 점심을 챙기고 나갈 수가 없었다.

즉 작은 방 안에 있는 그는 아침 식사 후 지금까지 쫄쫄 굶었다는 얘기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가기 전에 한 끼라도 더 챙겨 먹여야지.

나는 트레이를 들고 작은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저 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배고팠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황자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어느덧 몸을 회복한 그의 혈색이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잘 다녀왔어요?”

“어디 다녀왔는지 알아요?”

이래저래 해서 식사를 못 챙기고 나갔다, 미안하다 얘기를 하려는데 그가 대뜸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건넸다.

“그럼요. 문이 얇아서 다 들리던데.”

“….”

에이씨.

결국 뱃살 아웃팅 당한 거 맞구나.

침대 옆 협탁 위에 식사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할 말이 있긴 했지만, 식사는 혼자 편하게 하는 게 좋겠지 싶어 나가려는데 그가 날 불러 세웠다.

“혼자 먹기 심심해서 그런데… 옆에 있어 줄래요?”

“어, 그럼….”

밖에 나와서 먹죠.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녁들도 다 먹었고 늦은 시간이라 3층에 사람이 많이 돌아다닐 것 같진 않았으니까.

내 방 테이블에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그 옆에 마주 앉아서, 나는 발가락만 꼼질거렸다.

먹는 중에 말시키기도 뭐하고, 또 먹는 걸 빤히 들여다보기도 뭐해서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괜스레 꼼질거리는 발가락이 든 슬리퍼 끝부분만 멍히 바라보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레스는 마음에 드는 걸 샀어요?”

“네? 아 네.”

“서제국 2황자의 취향은 알아요?”

첫 번째 질문과 달리 두 번째 질문에선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까슬까슬한 느낌이었다.

“제가 왜 그분 취향을 알아야 해요?”

왜 뜬금없이 그걸 묻지?

영문을 몰라서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와인을 들이키며 날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제가 궁금해서요.”

무표정한 얼굴로 벌써 다른 남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공작님 앞에서 그러면 큰일 나, 당신만 더 힘들어진다고 알겠어? 어차피 그를 외면하지도 못할 거면서.

대놓고 사방팔방 이 남자 저 남자한테 관심 뿌리고 다니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딱히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풀 쪼가리를 씹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설마….’

설마 2황자를 쓱싹 하려는 건 아니겠지?

동제국의 황자인 그가 어쩌면 이 상황을 기회라고 여길지도 모른단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서제국군의 2황자나 장교들이 저택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있을 때 제거하려는 시도를 한다든가, 하는 등의 것들 말이다.

이 남자 아직 환자지만 사람이 방심하고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혹시나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상한?”

“2황자가 저택에 머물 때 암살하려 든다든가 하면.”

나는 살벌한 표정으로 남자의 목 부근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절대 안 돼요. 내 가족한테 피해 주는 건.”

살벌한 표정을 한다고 해 보였는데 어째 그가 웃는다.

스킬이 부족했나보다.

“내가 당신을 구해서, 그래서 내 가족이 피해보는 일은 못 봐요. 그땐 가차 없을 줄 알아요.”

“지금 날 신고해버리면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나 신고해요?”

내가 당장 신고하러 갈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그가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전쟁을 끝내고 싶은 건 동제국도 마찬가지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겨우 협정까지 왔는데 그걸 엎을 순 없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 신고 안 할 거죠?”

그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신고했다가 황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죽이는 것 대신 인질로 잡고 더 큰 이득을 보려하겠지.

그래서 동제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면 원작대로 흘러가는 거고, 난 죽는 거고.

‘안되지, 넌 내꺼야.’

내 옆에만 붙어 있다가, 내 손에 죽는 거라고.

“협상이 끝날 때까지 내 옆에 있어요. 당신은 내가 지켜줄 테니까.”

“….”

“그리고 때가 되면.”

죽.일.거.야.

“돌려보내줄게요.” 

“….”

“그 무튼… 서제국에서 오고 있으니까… 어차피 당장은 말을 탈 수 없잖아요.”

상처가 회복되어 움직임이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몸이 멀쩡하다면, 서제국 일행이 오기 전인 지금 떠나는 게 그로서는 가장 좋을 테지만.

결국 그는 협상이 끝나고 양 제국의 병사들이 왕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얌전히 숨어 있다가 떠나요. 들키지 말고.”

“그럴게요.”

그는 묵묵히 마저 밥을 먹었다.

음식이 가득 찼던 그릇이 싹싹 비워지는 걸 보니까 내 배가 다 부른 느낌이었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어색해하지 않고 잘 먹고 좋네.

식사가 거의 다 마무리되었을 무렵, 나는 묻고 싶었지만 내내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 말을 끄집어냈다.

“혹시… 내가 오지랖 부린 건 아니죠?”

내 말에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던 그가 동그란 눈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저 까만 눈에다 대고 ‘너 사실 죽고 싶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라는 말을 하려니 마음 한구석에서 털이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내가 당신이 원치 않았는데 내 멋대로 당신을 살린 건 아닌가 해서.

그 왜 우리 처음 숲속에서 만났을 때 말이에요. 자기가 한 말을 떠올려 보라구요.”

혹여나 내 더럽고 끔찍한 본심이 들통나면 어쩌나.

나는 그게 두려웠던 것 같다.

속내를 감추면서 말을 하려니 괜히 쓸데없는 부연설명이 늘어나고 말은 버벅거렸다. 

“사실 그때 죽으려 했던 거 아니냐, 그 말인가요.”

“네.”

남자는 꽤 한참을 침묵했다.

그는 왜 한참을 침묵하고 있을까.

나처럼 꽁꽁 싸매 숨겨야 할 더러운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네, 맞아요.”

맞아? 정말? 그럼 난 아싸지!

근데….

생각보다 안 기쁘네.

엄청 기쁠 줄 알았는데.

애초에 죽고 싶다는 대답이 나오리란 기대를 별로 안 해서 그런가.

원했던 대답이 남자에게서 나왔는데 내 기분이 왜 이럴까.

손 안 대고 코 풀면 좋잖아? 좋잖아!

너무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면 오히려 이렇게 가라앉아 버리는 걸까.

“맞죠? 그렇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역시.”

내 기분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목적하는 걸 이루어야 하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 돌렸던 대사를 다다다 뱉어냈다.

“나는 그거 나쁘게 생각 안 해요. 태어나는 것도 내게 선택권이 있었던 게 아닌데, 죽는 거라도 선택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살리고 싶어서 당신을 구조했지만, 당신의 의지는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내가 당신을 존중한 게 아니니까 이제라도 존중을 하고 싶다... 뭐 그런 거죠.”

남자는 그 블랙홀 같은 까만 눈으로 열변을 토하는 내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때문에, 말을 하는 내내 내 눈동자는 애먼 천장이나 방구석 모서리에 모여있는 먼지만 열심히 쫓았다.

나도 사람은 사람인가보다.

눈 보면서 저런 몹쓸 말을 하려니 영 힘이 들었다.

그런 내게 그가 불쑥 꺼내놓은 답변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신경쓰고 있었구나... 이제 괜찮아요.”

“네? 왜 괜찮아요?”

“당신이 멋대로 날 살렸으니 멋대로 책임지면 되죠. 그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제국의 황자라는 분께서 그렇게 주체적이지 못한 태도를 가지시면 어찌합니까.

나는 손 안 대고 코 풀고 싶다구요!

“아니 그게 왜 그렇게….”

“….”

“자기 삶은 자기가 직접 선택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아니 내가 죽고 싶으면 죽는 거지 남이 괜히 살려줬다고 해서 걍, 살지 뭐~ 이러는 게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병사님? 누가 살려준다고 갑자기 없던 삶의 의지가 뿅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황해서 말을 두두두 내뱉고 숨을 몰아쉬는데, 그가 그런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생길 수도 있죠.”

진짜? 거짓말이라고 해줘.

“생겼다구요?”

“네 진짜.”

“그럼 열심히 살겠다고요?”

“네 진짜.”

“아니 그게 왜 생겼을까?”

“네?”

헙, 독백으로 처리해야 할 대사를 대화로 뱉어버렸네.

머쓱해진 나는 괜히 내 정수리를 한 번 쓸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니 좋다구요, 생겨서… 당신한테 삶의 의지가….”

“그게 왜 좋아요?”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능글능글한 웃음을 남자는 짓고 있었다.

“좋은 거죠. 사람이 잘살아 보겠다는데 그게 좋, 좋은 거죠….”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살려준 이 목숨. 소중히 할 겁니다.”

손 안 대고 코를 풀어보겠다는 선택지가 내 손을 훨훨 떠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분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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