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시종이 내미는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쭉 돌리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봐 셀린 백작가야, 쟤가 걔야?, 성격이… 그렇다며?, 친구도 없잖아 등등 저들끼리의 수군거림에 지나지 않는 말들이 내 귀에도 확실히 들려왔다.
소문의 인물을 확인하려는 시선들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특별한 감흥은 일지 않았다.
sns도 없는 세상이니,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을 눈앞에서 보면 얼마나 신기하고 몹쓸 관심이 가겠는가.
저택을 나서면서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상황이었다.
피비로 지내면서 나는, 소설 속에 쓰여 있지 않았던 피비라는 인물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녀를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민한데 배려는 없는 성격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피비가 사교활동을 하지 않은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데뷔탕트를 통해 사교계에 입성했으나, 많은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 시즌 만에 그녀는 자취를 감추었다.
약혼이나 결혼을 해서가 아닌, 아무 이유도 알리지 않고 사교계를 떠난 그녀에게는 수많은 소문이 들러붙었고, 그래서 피비는 더더욱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소설 속에서, 자신에게 조금 친절하다는 이유로 금방 황자에게 제 마음을 줘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의 정을 모르면서도 그게 고팠던 거다.
그렇게 자신을 아끼는 가족들에게 제멋대로 군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이해가 간다고 못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백작 부인이 그렇게나 열심히 내 드레스를 골랐던 거다.
오랜만에 많은 이들에게 얼굴을 비추고, 구설수에 오를 자신의 딸이 혹여 기죽을까봐.
- 남자의 사랑은 필요 없지만, 쟤들은 이겨야 한단다, 내 딸아.
서제국 2황자와 같은 저택에 머물러 봤자, 모난 성격 탓에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피비가 그의 관심을 끌 수 있겠는가.
백작 부인이 염려하는 지점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낮은데 비해 자신감만 강한 딸이 상처 입을까 두려우신 것이다.
드레스업을 위한 빡센 준비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왼편에 서 있던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내 손을 그러쥐었다.
꼭 쥔 손과, 나를 애틋하게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괜찮아? 많이 긴장되니? 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녀의 염려대로, 피비라면 이 날카로운 시선들에 벌써부터 마음이 다치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었다.
“어머니 왜 서계세요.”
“응?”
아무래도 가게 앞이 지나치게 사람들로 북적여서, 내가 저곳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을 하시는 모양인데 난 추웠다.
“어머니 추워요. 콧물 나기 직전이에요.”
“어? 어, 들어갈까?”
“네. 빨리 들어가요.”
백작 부인의 팔짱을 끼고 조금 앞서 걷자, 부티크 앞에 모여 있던 인파가 모세의 기적으로 갈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다들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소문의 걔야. 꽤 반반하지?’
내 반반한 얼굴을 더 열심히 구경하렴.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
제일 휘황찬란한 인테리어였던 만큼, 마엘리 부티크는 개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은 부티크였다.
꼭 마엘리 부티크의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긴 줄을 서 있던 뭇 영애들은, 주인이 직접 나와서 반기는 우리 모녀를 시기와 질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티크의 안쪽엔, 줄 따위는 서지 않아도 되는 상위 귀족의 여식 둘이 쇼핑 중이었다.
소르베 공작가와 셔벗 백작가의 여식들이었다.
“셀린 백작 부인~ 어서 오세요.”
마엘리 부티크 주인의 환영 인사와 동시에, 자신들이 입은 드레스의 핏을 점검하던 두 여자의 고개가 홱 이쪽으로 돌았다.
나를 한번 쭉 훑어본 마엘리 부티크 주인은, 오랜 경영에서 나오는 그 짬바로 내가 옷 사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 듯했다.
내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녀는 신상을 소개한다며 백작 부인을 데리고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아앗, 어, 어머니….
제가 걱정되지 않으시나요? 저를 이곳에 혼자 두고 가버리시면...!
둘을 향해 소심하게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나는 허공에 뻘쭘하게 들려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마네킹의 어깨에 올렸다.
“너 몸매가 멋지구나. 뱃살도 없고.”
혼자 남아 할 것도 없으니, 마네킹의 늘씬한 몸매나 한 바퀴 감상하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날 지켜보던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금 쟤 마네킹한테 말 걸었어요.”
“역시 좀 모자란 거 같죠?”
사물을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을 의인화라고 한단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어.
모르면 좀 가만히 있으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가게를 구경했다.
가게 안은, 확실히 사교활동을 하지 않아서 다 예전에 산 옷들뿐인 내 옷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 이 물 섞인 파란색 드레스 멋지다.
“공작령만 가까웠어도 셀린 백작가가 서제국의 제 3거처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3거처가 되면 뭐하겠어요. 저런 모지리가 2황자님을 제대로 영접이나 할 수 있겠어요?”
아니 여기 사람들은 뒷담화를 모르는가.
얼굴 팔리지 않으면서 남을 깔 수 있는 뒷담화라는 좋은 방법을 두고 굳이 앞에서 왜들 그러실까.
보통 수도에서 멀리 있는 영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영지를 벗어나 수도에 머물 땐 수도 근처 타운하우스를 이용했다.
하지만 셀린 백작가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게, 백작가의 영지는 수도와 가장 근접해 있는 영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권세로만 따지면 셔벗 백작가는 셀린 백작가와 맞먹고, 소르베 공작가는 훨씬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지만, 두 가문의 영지는 수도와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있는데, 서제국 일행이 묵기에는 아무래도 상위 귀족의 거처라고 해도 타운하우스는 좁으니까.
반면 셀린가는 본가 저택이라 넓고, 그래서 제 3거처로 셀린가가 선택된 것이었다.
같은 저택에 머물며, 2황자를 꾀어내려 했는데 그게 어렵게 되었으니 아쉽겠지.
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결혼이란 몇 번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엄청 중요한 것이니까.
그래도 걱정 마 언니들, 내가 다 우리 저택에 초대해서 모두에게 기회를 줄 거라고.
안 그래도 언니들이 우리 집에 방문해서, 2황자가 딴 곳에는 관심도 안 갖게 해주길 바라고 있다니까 나는.
“드레스 고른 것 좀 보세요. 저런 여리여리한 푸른색은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집에만 있었으니 뭘 알겠어요.”
내 계획을 모르는 그녀들은 내 험담을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헤헷, 내 마음도 모르면서 욕부터 하다니 증말~ 바보들이라니까.
나는 물빛 드레스를 손에 들고 그녀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소르베 공녀님과 셔벗 영애 되시죠?”
“….”
“제가 집에만 있어서 옷을 잘 볼 줄 몰라 그러는데, 이 컬러가 제게 어울릴까요?”
“….”
입을 꽉 다문 둘의 표정은 마치, 등신아 그게 너한테 어울리겠니,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풀었다.
“어머, 혹시 지금 두 분께서 착용하고 계신 의상이 티파티 오실 때 입으실 의상인가요? 너무 멋지네요~”
“티파티요?”
셔벗 영애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내 정신 좀 봐, 제가 서제국 2황자님께서 저택에 머무는 일정에 맞춰 티파티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여러분께 드릴 초대장을 써놓고 아직 보내지도 않았는데 알고 계신 줄 착각하고 물어봤네요. 어멋, 저 바보 같죠? 홓홓홓.”
“아….”
둘은 내 말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 교환을 한 둘이 내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둘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
요 숨김없는 분들 같으니라고.
“셀린 영애, 티파티에서 그 푸른 드레스를 입으실 생각이신가요? 너무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어머 정말요?”
“셀린 영애, 그 푸른 옷이라면 이 구두는 어떠세요. 조화가 잘 될 것 같은데.”
“공녀님께서 추천해주신다면 신어봐야죠.”
“딱이네 딱이에요.”
2황자와 함께 티파티를 즐길 생각에 기분이 상승곡선을 그린 둘은, 방금 전까지 둘이서 신나게 내 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딱히 따질 생각은 없었기에 나도 방싯방싯 웃으며 둘과 대화를 나눴다.
“피비?”
때마침 가게 안쪽에서, 얘기를 끝마친 부티크 주인과 백작 부인이 걸어 나왔다.
영애 둘과 하하호호 얘기 중인 나를 보는 부인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아 어머니! 두 분께서 제가 옷 고르는 걸 도와주시고 계셨어요.”
“아… 그랬군요.”
그때 부인의 입꼬리가 작지만 부드럽게 휘었던 것 같다.
*
‘그 여자다.’
나일은 어느새 여자의 발소리가 제 귀에 익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직접 듣는 소리가 아니라, 복도에서 여자의 방을 거쳐 들려오는 소리이기에 굉장히 희미했음에도 나일은 그것이 여자의 발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방을 나서기 전,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괴로워하던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마 새 드레스를 맞추고 돌아온 것일 테지.
방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발소리가 다른 이들의 발소리와 섞여 있었다.
“부티크에서 아가씨 정말 너무 예뻤다니까.”
“보면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걸? 이제 서제국 2황자님만 오면 돼.”
“꺄아.”
하녀로 추정되는 이들의 대화 주제는 서제국에서 오는 멋진 2황자님과 자신들의 아가씨가 무도회 파트너로 얼마나 잘 어울릴지 기대된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듣는데도 시끄럽네.
서제국 일행이 하필이면 이 저택에서 머문다는 사실은, 이미 여자에게 들어 알고 있던 일이었기에 나일은 관심을 빠르게 접었다.
“아가씨도 설레시죠?”
“야, 안 설레면 이상한 거지.”
“잘생겼다고 정평이 나 있는 2황자님과 같은 저택에~~ 꺄아~~”
하녀들이 동시에 내지르는 괴성에 귀를 꾹 틀어막으려던 나일의 손이 귓가에서 멈췄다.
“어 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일은 벽에 제 귀를 가져다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