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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화 (8/134)

8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

“….”

그럴 리가요. 잘 모르는 사람을 쉽게 친절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쉽게 믿지도 말고요.

간단히 믿어버린 만큼, 간단히 배신당하게 될 테니까.

물론 영악한 당신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

백작이 저택에 돌아온 뒤로 서제국에서 오는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각지에서 귀하다는 식재료들이 저택으로 운송되고 있었고, 서관도 정리정돈을 지나 단장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꿀 숙소도 준비하고 꿀 식사도 준비 중이니 다 끝났군.’ 생각했지만, 아직 준비되지 못한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거기 더 묶어!”

“잘 좀 잡아봐!”

모닥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식인종들처럼 하녀들은 나를 한 가운데 두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가운데 인형처럼 서서 조여지고 벗겨지고 다시 입혀지는 일은 내 몫이었다.

옷 갈아입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것이었던가.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어머 아가씨 배는 신기하네요.”

“맞아요. 배꼽을 기준으로 위는 판판한데 아래부터 곡선이 시작되네요?”

“이런 뱃살은 처음 봐요.”

“너무 귀엽다! 아가 배 같아요!”

나는 일직선으로 곧게 서서, 내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아랫배 이눔시키가 내 트인 시야를 좀 방해하긴 하네.

하녀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사람이라면 응당 이 정도 뱃살은 있어 줘야 하는 거라며.

또 언냐들, 요 정도는 응가 한번 쏴주면 없어질 배라며 받아쳤겠지만.

나는 입도 벙끗 못하고 서서 거울 속에 울고 있는 나만을 바라보았다.

이씨, 작은 방 안에 황자 있다고.

제발 그가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게 해주십시오.

황자 쟤는 어땠지, 뱃살은커녕 복근이 있었지.

강하고 빡센 복근은 아니었지만 은은하고 기분을 좋게 하는 정도의 복근은 되었던 거 같다.

저런 복근이 있는 인간은 이런 뱃살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됐어 이해 못 하면 또 어쩔 거야. 그러든가 말든가.

지금 내 뱃살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의 자살시도를 유도해 낼 수 있는 자극적인 멘트들을 던져야 하는데.

요 며칠간 나는 점차 회복되어가는 그를 보며 별다른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느새 하녀들은 내게 입혔던 열네 번째 옷을 다시 벗기고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하녀와 하녀의 사이로 빠져나가려는데, 헙.

언니들이 나를 붙잡았다.

“아직…? 충분히 입어 본 것 같은데.”

날 둘러싼 하녀들의 손엔 열다섯 번째 의상이 들려있었다.

나는 이미 세 벌째 갈아입었을 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언니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없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그녀들의 손에 들린 살구색 드레스가 불어온 바람에 나부꼈지만, 그녀들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닥치고 입어욧! 하는 듯한 메시지가 느껴졌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백작 부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애 춥겠다. 창문 닫으렴.”

“어머니 저 지금까지 입어본 드레스들도 충분히 예뻐서….”

“…충분?”

우물쭈물 이제 그만 입고 싶다는 내 의견을 토로했지만, 부인의 얼굴은 한겨울이었다.

나는 그 찬 기운에 바닥으로 눈을 깔았다.

“안 되겠다. 나갈 준비를 하자꾸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작 부인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새 드레스가 있어야겠어.”

“네? 하, 하지만 옷이 다 충분히 예쁘고 전 충분히 입어보았는데….”

“피비야.”

백작 부인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내 딸, 내 딸에게 이런 것들로 충분이란 말을 할 순 없지.”

아뇨, 어머니 전 충분히 힘든데.

“이건 어찌할까요?”

하녀가 열다섯 번째 입을 예정이었던 살구색 드레스를 가리켰다.

“버려.”

그러자 하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하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백작 부인도 당연하다는 얼굴빛이었다.

‘거의 새 옷이던데, 아깝다.’

버리기를 잘하지만, 사기도 잘하면 미니멀리즘은 실천할 수 없는데.

이 상황에서 비움의 즐거움을 찬양하고 미니멀리즘을 설파하면 분위기를 망치겠지.

“뭘 입어도 우리 피비는 빛나지만, 이 옷장 속 드레스들은 다 유행에 너무 뒤떨어진 것들 뿐이구나.”

내게 외출준비를 시킨 하녀들과 백작 부인이 방을 나서는 것을 보며 나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

마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길거리 풍경은 예상보다 대단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활기차고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을 한 인영들이 창밖으로 휙휙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확연히 눈에 띄게 생기 있는 표정들이었다.

“얼굴들이 좋지? 신랑감들이 넘쳐나서 그래.”

백작 부인이 말한 신랑감들이란 길거리에 하나 둘 보이는 푸른 제복을 입은 서제국의 장교들이었다.

말 위에 올라타, 우리가 탄 마차를 가로질러가는 장교도 있었고, 여성들과 나란히 발맞추어 거리를 걷는 자들도 보였다.

서제국과 동제국 사이에 낀 작은 약소국인 빌론 왕국은 오래전부터 국제결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고 있었다.

그건 백작이 말한 빌론의 생존방법 중 하나였다.

양 제국과의 혼인으로 쌓아 올린 관계가 빌론을 제국에게서 지켜내고 있었다.

물론 백성들은 원치 않는데 국가에서만 장려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작은 왕국이지만, 양 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왕국의 재정 사정은 꽤 넉넉했고 분명 살만한 나라였다.

그러나 두 제국과 비교한다면 음.

작위가 같은 백작이라 해도 빌론의 백작과 제국의 백작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혼기가 찬 여성들이 이왕이면 서제국이나 동제국의 신랑감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 제국의 군대가 들어와 있는 지금, 당연히 그들을 이끌고 온 장교들의 수도 넘쳐났다.

보통 장교들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귀족가의 자식들이 맡는 자리였기에, 빌론은 지금 왕국 전체가 훌륭한 신랑감들로 넘쳐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표정들이 좋구나.’

초겨울 바람이 이리 매서운데, 굳이 밖에 나와 분수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한 커플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차창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서 둘이 앉아 있는 곳이 되게 가까운데?

바람에다가 물까지 튈 텐데 춥지 않나.

그러나 커플은, 자신들의 등이 젖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는지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 좋네요. 좋을 때다.”

도대체 저분들의 등이 얼마나 젖었을까를 상상하느라, 커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맞은편 좌석에서 나를 보던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좋아 보이지?”

“네, 저렇게 역경 따위 이겨내는 게 연애죠. 물방울 따위야.”

“풋.”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백작 부인은 가벼운 콧소리로 시작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연애, 이제 우리 딸도 하면 되겠네?”

“저런 연애를요?”

“응.”

엄마로서 딸내미의 꽁냥거리는 연애를 상상하셨는지, 부인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부인과 스스럼없이 친밀한 사이였다면 ‘엄마 미쳤어?’가 바로 튀어나왔을 텐데, 아직은 부인과 내외를 하고 있는 중이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연애는요 어머니, 쟤들이 할 때 좋은 거예요.

저는 발바닥 뜨끈하고 등 따신 곳에서 편하게 하는 연애 할 거예요.

힘든 게 무슨 연애랍니까.

나 같으면 저렇게 춥고 물 튀기는 곳에서 대화하자는 놈이랑은 절대 안 만나지 암.

“그래서 생각해둔 연애 상대는 있고?”

백작 부인은 꽤나 흥미로운 대화 주제를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부응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나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원래의 피비라면 곧 동제국 황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겠지만, 나는 걔가 아니니까.

지금은 연애에 쏟을 정신이 없거든요, 사는 게 먼저입니다.

“이미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없다면 새 사람 만나기 딱 좋은 때구나. 응?”

부인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저렇게 리드미컬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시는 걸까.

“마침 끝내주는 신랑감이 곧 당도할 예정이니까.”

“아….”

끝내주는 신랑감이란 서제국 일행을 이끌고 올 2황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주워들은 말에 따르면 그는 끝내주는 세 가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끝내주는 외모, 끝내주는 신분, 끝내주는 성품까지.

그에겐 아직 정혼자가 없었고, 그런 그가 지금 셀린 백작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그분의 마음에 들길 바라세요?”

그래서 이렇게 새 옷에 새 구두, 새 장신구까지 맞추러 가는 건가, 싶어진 나는 슬그머니 부인에게 질문했다.

“젊은이들끼리 서로 마음이 맞으면 좋지. 하지만 꼭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단다.”

어머니는 황자 신분이 뭐라고, 그거 없으면 우리가 죽기라도 한대니? 잘만 살 텐데~ 호호호, 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왜 저는 14번이나 옷을 갈아입고서도 모자라서 새 옷을 사러 가는 걸까요, 어머니.

알 듯 말 듯 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부인이 슥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겨야 돼.”

“누구를요?”

그때, 말 울음소리와 함께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고급스런 부티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가였다.

시종이 연 문 너머로, 어머니가 한 곳을 가리켰다.

“쟤들.”

어머니가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고급 부티크 중에서도 가장 돈을 많이 바른 듯한 인테리어의 상점이 하나 보였고.

그 앞은, 오.

화려하게 치장한 내 또래의 여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남자의 사랑은 필요 없지만, 쟤들은 이겨야 한단다, 내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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