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통제는 효과가 좋았다.
마약성 진통제였던 건지, 그가 약을 먹고 정신이 나가 갑자기 반말을 지껄이긴 했으나, 헛소리를 내뱉는 그의 머리를 베개까지 손으로 꾹 누르자 남자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기절 베개인가?
그리고 아침이 된 지금까지도 깨지 않고 자는 중이었다.
‘잘 자는군.’
잠든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작은 방을 빠져나오는데,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똑똑
“아가씨. 식사 아직 다 안 하셨죠?”
“어, 그럼. 방금 가져다줬잖아.”
“백작님께서 돌아오셔서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는데 따로 드셔서 섭섭하시데요.”
“아….”
백작은 한 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어젯밤 돌아온 상태였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와 인사도 나누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찾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따로 먹어서 섭섭하다라.
이건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완전 사랑받는 딸이거나, 아빠가 군기반장이거나.
“지금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주겠니?”
“네, 아가씨.”
나는 닫혀있는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어제 도둑질로 해고된 하녀를 예시로 들며, 당분간 내가 없을 때 내 방에 출입하는 자는 다 도둑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안심하고 가도 되겠지?
가족들을 만나고 올 테니 부디 얌전히 있으라구요.
*
식당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사랑받는 딸이 아니면?’
한 달을 살아본 결과, 이 집의 사용인들은 모두 내게 깍듯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아무래도 이전의 나는 무난한 백작 영애였던 모양이다.
바보처럼 무시를 당하는 캐릭터도 아니요, 악질 영애도 아닌 거 같고.
‘그럼 가족들과의 관계도 비슷하려나.’
이 세계 속에 들어왔을 때,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저택을 떠나 있어서 만난 적이 없었다.
즉, 지금 식당으로 내려가서 가족들을 만나는 게 그들과의 첫 대면이라는 것.
‘은근 떨리네.’
이 집의 자식은 둘이었다. 위로 오빠 하나 나 하나.
보통 막내딸은 개차반 망나니가 아닌 이상 집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닌가.
맞겠지? 나도 이 집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그런….
아니, 잠깐만.
근데 왜 나를 안 데려간 거지. 나만 안 데려간 거잖아.
막 빙의한 시점에서, 가족들이 다들 저택을 떠나 여행 중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나는 팔다리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고 멀쩡한데 왜 나만 두고 간 거지?
식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나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굴려 봐도 정보부족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혹시 모르니까 일단 저자세로 가자.
지금 내 상태 깔끔하겠지?
아, 여기는 식당 입구에 거울이 없네.
나는 대충 차림새라도 깔끔하게 하려고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탁탁 폈다.
“피비?”
헙, 내 이름.
내 인기척을 느꼈나 보다. 식당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니?”
같이 밥 먹는 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지. 나는 입구로 빼꼼 얼굴만 내밀었다.
웃자, 웃자.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눈꼬리를 최대한 접었다.
“다녀오셨어요. 헤헤.”
“…피비?”
“(왜 또 부르지) 헤헤헤.”
“피비야?”
“….”
이게 아닌가 봐.
방실방실 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도록 노력하고 있음에도 가족들은 연신 내 이름만 불렀다.
나는 웃는 얼굴로 입구로 들어섰다.
“여기가 제 자린가 봐요?”
가족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긴 식탁의 끝부분에 빈 접시와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왜 내 자리만 여기에?’
아무래도 나 이곳에서 따돌림받는 앤가 봐.
아니 같이 젓가락 부딪히며 밥 먹어야지 정드는 거 아냐?
이렇게 따로 차려 놓을 거면 왜 같이 먹자고 부른 거래.
“제 자리만 떨어져 있네요. 참 자리가 쓸쓸해 보이네. 헤헤.”
외로운 대사를 날리며 사용인이 빼준 의자에 앉는데, 가족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지금 쓸쓸하다고 했니?”
*
“네?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냥 닥치고 먹을게요.
“아냐, 분명히 들었어. 피비 너 지금 자리가 멀어서 쓸쓸하다고 했잖아.”
아, 이번엔 오빠 놈이 물고 늘어졌다.
말실수한 기분이 음습했다.
소설 속에서 피비의 가족에 관한 내용은 일절 없었다.
누가 악역의 가족 관계 따위를 궁금해 하겠는가.
“정말이니?”
엄마까지 가세해서 질문을 보탰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숟가락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긴장 때문에 입술이 바짝 탔다.
나는 수프를 뜨다 말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자리가 멀면, 아빠 엄마 오빠 얼굴도 잘 안 보이고 목소리도 작게 들리고… 그럼 안 좋은 거 같아서요오….”
“….”
“….”
“….”
제발 그냥 밥을 먹어요, 날 보지 말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까 뜨다 말았던 수프를 한 입 먹었다.
맛있네 이거. 양송이가 텐션이 살아있네.
수프도 맛나겠다.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퍼먹었다.
하도 고개를 숙여서 양송이 조각이 입으로 들어가서 코로 슬라이딩해 나올 것 같았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수리가 매우 따가웠으니까.
“지금 피비가 우리랑 가까이서 밥을 먹고 싶다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맞소? 여보??”
“네, 여보.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래빌?”
“네, 아버지. 저도요.”
그럼 안 되는 거였나요.
도무지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 수프도 다 먹었는데.
“피비.”
백작이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너가 감히 우리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다고? 뭐 이런 대사와 함께 마늘빵 싸대기를 맞는 건가.
흥, 호락호락 맞을 줄 알아? 던지면 입으로 받아 버릴 거야.
“네.”
그러나 백작에게서 들려온 대사는 너무나 의외의 것이었다.
“그럼 우리가 곁에서 밥을 먹어도 되겠니?”
“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자, 식탁 끝에 앉은 세 인물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나는 뚫릴 것만 같은 내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되죠.”
왜 글썽거리세요?
“…왜 안 되겠어요.”
“세상에, 여보…!”
“크흡.”
백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백작 부인은 그런 백작의 팔 위에 부드럽게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아버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빌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셋은 기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깐만, 정리를 해보자.
옆에서 밥을 먹어도 되겠냐고 분명히 나한테 물어봤다.
그렇다는 건 이렇게 멀찍이서 먹자고 한 게 나란 소리인가?
나는 내 앞에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식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간단한 샐러드나 핑거 푸드는 식탁에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이제 보니 양쪽에 있는 음식의 종류는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나 혼자 먹는 쪽인데 양이 같은 게, 날 더 챙긴 느낌이기도 하고?
진짜 내가 따로 먹자고 한 건가? 왜?
“피비야, 이제라도 받아줘서 정말 고맙다. 아버지도 정말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오빠가 날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이제 아빠 먹을 때 소리 안 나지 우리 딸?”
“네에??”
“피비가 음식 쩝쩝거리는 소리 듣기 싫다고 멀리서 먹겠다고 했을 때부터 아빠 많이 노력했다.”
“얘가요????”
“???”
“아.”
아, 이제 얘가 나지.
“하하, 제가… 네… 그랬죠… 그랬었죠.”
그때부터 얘기를 들어보니, 백작 음식 먹을 때 쩝쩝거리는 소리 못 듣겠다며 따로 먹겠다는 거를, 가족들이 그럼 멀리서라도 같이 먹자고 부탁한 거였단다.
그리고 이렇게 멀리서 먹은 게 어느덧 3년.
와, 얘 완전 나쁜 딸내미네.
그래서 그렇게 입을 앙 다물고 드셨구나 밥을.
물론 바른 식사예절을 지키는 건 중요하지만….
나는 어쩐지 내 아빠이자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좀 안쓰러운 눈빛을 담아서. 볼이 토실토실한 그가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아빠가 오늘 정말 기분이 좋구나.”
아무래도 빙의 전의 나는 오냐오냐 길러서 막자란 막내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식기를 가족들 쪽으로 옮겨서 마저 밥을 먹었다.
왜 사랑을 퍼붓기만 하면 오히려 망나니가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였다.
“누가 온다구요?”
이미 식사를 마친 백작은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에 먼저 디저트가 올라왔다.
“서제국에서 올 거야.”
“….”
“정확히는 서제국의 2황자와 장교들이지. 셀린 백작가가 서제국 일행의 제3 거처로 정해졌단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루고 미뤄져 왔던 종전 협상이 드디어 이루어질 것이라 했다.
양국은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쳤고, 아마 이번에 종전선언이 되고 나면 당분간 두 제국 모두 전쟁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어느 한쪽의 큰 승리로 끝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동제국이 황자를 잃은 건 안타깝지만.”
“황자요?”
“응, 동제국은 이번 전쟁에서 첫째 황자를 잃었어.”
대답이 들려온 건 오빠 래빌 쪽이었다.
서제국의 승기가 꺾인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동제국의 황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황자가 실종되었고, 그 때문에 종전 협상이 오래 미뤄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죽은 건가요?”
“음, 그건 아무도 몰라.”
모르긴요, 우리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
서제국에서 잡아갔다는 썰, 아니다 서제국도 지금 황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썰도 있고.
결국 동제국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있다는 얘기까지 온통 소문들뿐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얘기는.”
“죽었거나 그 비슷한 상태라고 봐야겠죠.”
아빠와 오빠는 말을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대부분 황자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면 내겐 잘된 이야기였다.
완전범죄를 꿈꿀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왜 종전 협상을 우리나라에서 해요?”
내 질문에 백작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게 우리 빌론의 생존방법이란다. 우리 왕국으로서는 양국의 힘이 비등비등한 게 이득이지.”
내가 속해 있는 빌론 왕국은 동제국과 서제국 중간에 끼어 있는 작은 왕국이었다.
두 제국에 비해 코딱지만 한 왕국이 어느 한쪽에 먹히지 않고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양쪽의 줄을 다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백작이 입가를 닦으며 미소지었다.
지금은 두 제국의 세력싸움으로 왕국을 내어준 상태지만, 전쟁만 끝나면 두 제국 모두 각자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저택이 당분간 시끄럽겠어요.”
백작 부인의 말에 백작은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표정이었다.
“밤낮으로 정신없겠죠.”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슬그머니 말을 꺼내자, 백작 부인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음, 그때가 되면 아마 우리 피비는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 놓일 테니, 체력을 길러두면 되겠구나.”
“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곧 알 수 있었다.
*
‘서제국 일행에게 동제국 황자가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게 되면….’
나는 하녀를 앞장세워 서관으로 향했다.
“백작님께서 서제국 2황자님이 지내실 방을 정비하라고 하셨다는데 위치가 어디니?”
하녀가 안내한 곳은 서관 1층에 있는 방이었다.
귀빈을 맞이할 방답게 크고 호화스러운 방이었지만, 이제 막 정리를 시작한 방은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더 컸다.
“아가씨, 들어가지 마세요. 먼지가 가득한데.”
내가 방으로 들어서려 하자, 하녀는 재빨리 날 만류했다.
그럴만한 게,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발아래서 풍성한 잿빛 먼지가 일어났다.
언니야, 미세먼지로 단련된 K걸에겐 이 정도는 청정이야.
나는 바닥에 놓인 물건들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걸어가 커다란 창 앞에 섰다.
‘역시나.’
셀린 백작가는 가운데가 본관, 서쪽에 서관, 동쪽에 동관으로 이루어진 ㄷ자형 건물이었다.
안보이길 바랐는데, 서관 1층에 있는 이 방에서는 동관 3층에 있는 내 방 창문 안쪽이 훤하게 보였다.
‘서제국 2황자가 동관을 찾을 일은 없을 테니 창문으로 보이는 것만 조심하면 되겠다.’
만약, 서제국 2황자가 머무는 동안, 그에게 동제국 황자가 내 방에 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그리고 이 가족은?
살벌한 생각을 떠올리자 속이 안 좋아져 창가에 털썩 걸터앉았는데.
1층 창문에서 올려다본 내 방 창가엔, 인상을 팍 쓴 동제국 황자가 방 안을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저 자식 빨리 묻어버리든가 해야지….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