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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화 (1/134)

1화

코로나로 밖에 나가질 못하자 밖순이인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집이라고 내가 흔들지 못할 거 같아?

방에서 음악을 틀고 신나게 몸을 흔들던 나는 그만 미끄러져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피가 엉겨 붙어 있어야 할 뒤통수는 멀쩡했고, 머리는 긴 금발이 되어있었다. 어이구 이게 무슨 일이람.

놀란 마음에 거울 앞으로 달려가 보니 하이틴 여주같이 새초롬하게 생긴 녹색 눈의 여자가 서 있었고, 나는 당연하게도 소리를 꽥 내질렀다.

소리를 지르자 메이드 복장의 언니들이 우르르 달려와 내게 우쭈쭈를 시전 해 주는 게 아닌가.

언니들은 괜찮냐며 따듯한 밀크티와 달달한 케이크를 내 입으로 밀어 넣었다.

입속이 풍족해지고 배도 풍족해지자, 입과 배 가운데에 있는 마음도 풍족해졌고, 그제야 나는 가까스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 후, 크게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열려 있는 창가로 다가섰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 뇌세포들이 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럼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 촙촙 츄르릅 촵촵

그러나 다가선 창가 아래에서 들려온 소리는 쭙쭙거리는 의문의 소리였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 아래쪽을 보자, 미남 둘이 서로의 타액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알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아냈다는 기쁨에 나는 그만 또 소리를 질렀고, 이번에는 메이드 언니들의 질타의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내 외침에 놀라 미남 두 분께서 수줍어하시며 하던 일을 끝내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소리를 내다니. 비엘 관객으로서 실격이었기에 나는 메이드 언니들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쏘아주었다.

‘여긴 비엘 소설 안인가보다.’

전생에서 끊임없이 충전을 해가며 소설을 읽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방에 들어왔던 분들은 하녀들인가? 나는 귀족이고?’

나도 진정이 되었고, 창밖의 볼거리도 사라지자 메이드 언니들은 청소나 마저 해야겠다며 대다수가 방을 나가버린 참이었다.

다행히 질문에 대답해 줄 하녀 한 명이 내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있잖아, 나 공... 녀?”

“나 공녀님이란 분은 처음 듣는 분인데요?”

내 신분이 공녀는 아닌가? 이왕이면 고위 귀족이면 좋겠는데. 질문이 너무 불친절했던 모양이었다.

하녀는 그런 공녀님도 계셨나요?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아빠는 어디 계셔?”

“백작님께선 일 때문에 왕궁에 가셨잖아요.”

나이스 드랍 더 백작.

“어머 아가씨!”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백작이란 단어를 내뱉은 하녀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 언니 부끄러움이 많은 타입인가 보네. 그녀가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작 영애가 아닌 건 아쉬웠지만 백작이 어디란 말인가.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다 황녀, 공녀, 귀족 영애여서 그렇지, 일단 귀족 신분이란 것 자체가 엄청 소수인걸?

귀족 딸내미면 놀고먹기 최고다. 백작 영애 만세! 나는 들뜬 기분에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고 싶었지만, 하녀는 그런 내 어깨를 꾹 눌렀다.

“어맛! 아가씨. 어깨에 경련이...! 괜찮으세요?”

“아 네 너무 좋아서. 하핳ㅎ하하.”

“왜 갑자기 존대를.”

“아 그렇지? 미안 미안. 흐하핳핳ㅎ”

비엘 소설 속의 백작 영애라니. 나는 기분이 너무 째졌다.

*

“와 공기 진짜 좋다.”

빙의 후 한 달쯤 지났으려나?

나는 숲속을 걸으며 청량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백작가 저택 뒷문으로 쭉 걸어 나가면 편백 나무숲이 나왔다.

소설 속 세계의 공기는 프레쉬 그 자체였다. 산업화가 되지 않았으니 미세먼지로 인해 시커먼 코딱지가 나오지도 않았고, 비염으로 고생할 일도 없었다. 물론 고로나도 없는 이 러블리한 세상.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아직까지 이 세계가 어떤 소설 속의 세계인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셀린 백작가의 막내딸 피비 셀린.

내가 빙의한 이 인물의 이름은 분명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떤 인물이었는지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원.

‘주연은 아니고, 이름이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완전 엑스트라도 아니고, 조연쯤이려나?’

어떤 소설인지를 알고, 내 역할이 뭔지를 알아야 계획을 세울 텐데. 지내다 보면 정보가 모이고 그럼 알게 되겠지.

나는 뚫린 코로 마음껏 숲속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금은 빙의 전 못했던 노 마스크 산책을 즐기는 게 먼저였다. 

흙냄새, 나무 냄새, 이끼 냄새가 걸음마다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피 냄새?’

희미한 피 냄새가 숲 냄새 사이로 정체를 교묘히 숨기고 있었다.

‘누군가 있어.’

가슴이 조용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저택으로 도망치기에는 숲속으로 이미 많이 걸어 들어온 상태였다. 

숨어있는 자가 발이 빠른 자라면 영락없이 붙잡힐 것이 뻔했다.

이 숲은 백작령의 사유지로 평민들이나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혼자 산책을 나온 것이었는데. 혹시 상처 입은 사슴이나 소동물의 피 냄새는 아닐까?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경계를 풀지는 말아야 했다. 적어도 소동물쯤은 상처 입힐 수 있는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되도록 태연한 척을 하며 계속 앞으로 발을 옮겼다. 옅게 느껴지던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때.

- 바삭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좌측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곳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나무와 약간 거리를 벌려 앞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이 사람?’

나무엔 웬 남자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법한데도 태평한 얼굴로 눈을 감고서.

*

‘이대로 죽을까.’

나무에 기대앉아서, 나일은 상처가 벌어진 자신의 왼쪽 복부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는 울컥울컥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제 피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피의 색이 유난히 검게 보였다.

‘너도 내가 싫은가보다. 그렇지?’

그러니까 그렇게 내 몸 밖으로 나가려고 요동을 치는 거겠지.

저주에 찌든 몸은 싫다 이건가? 하긴, 나도 싫은데 너라고 좋을까.

죽을지 말지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다.

하늘에서 자신을 위한 신이라도 내려준다면 모를까, 적군이 바글거리는 이곳을 부상을 입고 빠져나갈 방도는 없었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나일은 나무 기둥에 몸을 더 바짝 밀착시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그 덕에 정신은 점점 몽롱해졌다. 또각거리는 구두의 굽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차라리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저 사람을 위협해 내가 살아보겠다는 선택지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면 편했을 텐데.

나일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거침없이 걸어오던 조금 전과 달리 발걸음 소리에서 멈칫거림이 느껴졌다.

저쪽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그러면서도 발걸음 소리는 꾸준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구두의 주인이 제 목숨을 거두어갈 사신일까 아니면 목숨줄을 연명해줄 신일까.

이곳에서 동제국군을 신고하면 후한 포상금을 줄 터이니, 아마 전자에 가깝겠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목숨이 그에게 달려 있단 것만은 확실했다.

심한 부상을 입은 탓에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나일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

‘자고 있는 거야?’

나무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곱게 내려앉은 눈꺼풀 위로 그의 까만 앞머리가 바람에 산들거렸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는 다르게, 씻지 못했는지 상앗빛 피부 위로 흙먼지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표정만 보면 산책 나와서 낮잠 자는 얼굴이네.’

그러나 그는 절대 산책 따위를 나온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옷은 피로 얼룩졌고, 군데군데가 찢겨 너덜거리는

‘동제국의 군복이야.’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한 동제국의 군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이곳은 작은 왕국으로, 전쟁 중인 서제국과 동제국에 반씩 점령당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셀린 백작가는 서제국의 영향 아래 있는 상황.

‘왜 홀로 이곳에 있는 거지.’

장교가 입을 법한 군복과는 거리가 먼 일반 병사의 군복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열심히 그를 관찰하는 와중에도 그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내 구두 굽 소리가 숲길 바닥을 탁탁 울려댔을 텐데, 듣지 못한 건가?

‘그냥 이대로 여기 두고 갈까.’

괜히 정체도 모르는 인물을 깨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내 방에 돌아가 씻고 하녀 언니들이 준비해 준 간식이나 먹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이 사람은? 동제국의 병사에게 지금 이 영지는 위험한 곳이었다. 왕국의 서쪽 전역마다 서제국 병사들이 깔렸으니까.

저택 밖으로 요 앞에 과자만 사러 나가도 서제국의 병사와 안녕하세요? 할 수 있는 상황.

종전을 앞두고 있다곤 하나, 서로 칼을 들이댔던 양국 병사들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게다가 이렇게.

‘곱상한 일개 병사라면.’

이곳은 백작가의 시종들이, 백작님 딸내미 방 창가 아래에서 쭙쭙거리는 비엘 세계관 속.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잠든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짜 미인이야.’

흙먼지로 더럽혀진 얼굴은 단정한 얼굴임에도 묘하게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근처에 찍힌 눈물점은 자꾸만 내 시선을 앗아갔다.

‘이 사람이 적국 병사들에게 발견된다면.’

그때 내 머릿속에선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비엘 소설 속에서 보았던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대부분 읍, 으읍, 안 돼...! 이러지 마! 차라리 죽엿! 하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서제국 병사들에게 발견된다면 딱 봐도 병약수 같이 생긴 이 남자의 미래는 뻔했다.

다공일수 병약수가 공들에게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르다 피폐 결말을 맞이하는 소설 한 편이 뚝딱이었다.

이봐, 너! 네 미래를 알고 있어? 그런데 그렇게 태평하게 잠을 잘 때야?

속으로 외쳐봤자 그에게 들릴 리 없었다. 남자의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뭐 어때, 나 그런 소설 좋아하잖아.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그냥 가자. 자기 인생이지 뭐. 나는 그냥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이게 오지랖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험한 일 겪다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 목숨 구하는 게 오지랖이야?

지 인생이지 뭐, 하고 가는 게 쿨한 거고? 너 쿨병 걸렸어?

‘이 남자도 누군가의 가족이겠지.’

문득 떠오른 생각이 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이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제나 남매고, 또 남편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오매불망 이 남자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테지. 예전의 나처럼.

‘일단 깨워보자.’

나는 한 발자국 그에게서 더 멀어졌다. 괜히 가까이서 깨웠다가 갑자기 해코지당하는 건 사양이니까.

주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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