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괴로워하던 조익환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경악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임금은 무표정하게 검을 뽑아낼 뿐이었다.
“그리도 많은 기회를 주었건만 기어이 과인의 등에 칼을 꽂았구나!”
피에 젖은 검이 잘게 떨렸다. 외상에 몸부림치는 자는 조익환이었지만 어쩐지 이를 악문 임금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크기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늘 과인은 충심 어린 이들 덕에 자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다만 또 하나의 오랜 벗을 잃겠구나.”
“…….”
“하나 더 오래전에 잃은 벗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것들을 모조리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임금이 오래전에 잃은 벗이 누군지 모르지 않았다. 도겸의 눈시울이 뜨거워질 즈음, 쓸쓸하게 중얼거린 임금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별산대의 장 최도겸, 과인은 그대에게 이번 모반 사건을 비롯하여 조익환이 저지른 모든 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데 필요한 모든 권한을 줄 것이다.”
“…예?”
임금의 결정에 도겸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임금이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정부의 모든 정승이며 육조의 중신들까지 역모에 가담한 유례없는 대형 모반 사건이 아닌가? 난 이참에 적당히가 아니라 속속들이 파헤쳐 바닥까지 뒤집어 조사해 줄, 그 누구보다 청렴하고 성실한 이가 필요하네. 그리고 그 조건에 딱 맞는 자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같아 말이지. 부디 과인을 도와줄 수 있겠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임금은 도겸으로 하여금 조익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으니까.
“소신,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도겸을 보며 비로소 임금의 용안에 지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모든 것이 무너졌다 한들 한 걸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만. 황무지라 하여도 새로운 싹이 틀 테니.”
그즈음 세상을 수몰시킬 듯 쏟아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 가운데 다시 떠오른 해가 밝게 타올라 세상을 환히 비추었다. 투명한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도겸은 마침내 오래도록 얽매여 있던 고통에서 해방됨을 느꼈다.
***
아직 어깨에 화살촉이 박힌 채였지만 도겸은 먼저 치료를 받으라는 세자의 걱정과 만류도 뒤로하고 무작정 서촌으로 뛰었다. 다른 누굴 챙길 틈도, 여유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비와 함께 이 땅에 찾아온 용이 비가 그치며 보이지 않게 된 것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너였는데. 분명히…!”
처음 보는 형상이었지만 청이 확실했다. 머리가 생각하기에 앞서 마음이 먼저 답을 내린 상태이기도 했다.
그 여인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수습된 이후엔 자취를 감춰 버린 터라 도겸은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뛰어오는 동안 누군가는 뒤를 따랐던 것도 같은데 집에 가까워질 즈음엔 결국 모두 떨어져 나갔는지 그는 혼자였다.
“청아, 청아!”
난데없이 내린 비로 인해 길가는 고요하기만 했다. 간혹 물웅덩이를 밟는 도겸의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번져 갈 뿐이었다.
“어디 있느냐, 청아!”
이미 한바탕 전투를 치르느라 서촌의 집 근처는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체들을 보고 놀란 사람들, 그리고 상황을 수습하려는 병사들을 모른 척 지나친 도겸은 거의 부서지다시피 한 대문을 뛰어넘고 집 안으로 향했다. 안마당까지 단숨에 뛰어간 그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터지기 직전, 드디어 샘 앞에 앉아 하얀 손가락으로 수면 위를 떠다니는 꽃잎을 건드리는 여인의 뒷모습과 마주했다.
“귀청 떨어지겠어.”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하얀 여인이 여상한 목소리로 먼저 불평했다. 무섭게 뛰어와 놓고 정작 지척에 둔 여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선 도겸은 그 자리에 서서 석상이 되고 말았다.
“네가 멋대로 소원을 빌고 날 이 물에 밀어 넣어 버리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
말은 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소원을 빈 네가 망각한 게 있다면 소원을 빈다고 거기서 전부 끝인 게 아니라는 거야. 그 이후엔 이 반지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는 거라 나는 원한다면 언제든….”
수면을 떠다니던 꽃잎을 톡톡 두드리던 청이 흥미를 잃고 그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곳으로 올 수도 있게 되는 거지.”
마침내 여인이 돌아섰을 때, 도겸은 부끄럽게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청은 그런 도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근데 생각보다 다루는 게 까다로워서 시간이 좀 걸렸어.”
“…….”
“이 반지, 내가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게 해 주는 대신에 정확하진 않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거든. 이 세계의 이 시간대에 사는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세상에 가서 허탕 쳤는지 너는 모른다고.”
“…너도.”
도겸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청에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도 모른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각오하며 그 소원을 빈 것인지를.”
멈추고 싶었지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임금을 앞에 두고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힘겹게 결심하며 보냈건만 어찌 이리 다시 와 버린 것이냐 배은망덕하게 따지고 싶었다. 이렇게 왔다가 또 가 버릴 것이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나서 차마 묻지 못했다. 청이 무표정하게 되돌아갈 것이라 답하며 정말 매정하게 가 버린다면 또다시 홀로 남을 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 세계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어.”
늘 그랬듯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거나, 어린 순이와 비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청은 뜻밖에도 말없이 손을 뻗어 도겸의 젖은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내 광활한 바다도 여전했어. 바닷속에 쌓인 수많은 보물들조차도.”
무심히 자신의 재력과 위력을 과시한 청이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변해 있었어.”
가만 듣던 도겸의 눈이 설핏 커졌다. 청은 말간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고요한 게 재미없고 파랗기만 한 나의 하늘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까 그랬어. 그래서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고. 결국 그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으니까. 나를 부정하는 꼴이 됐으니까.”
“…….”
“그래서 날 이곳에 적응시켜 변하게 만든 괘씸한 녀석을 가져야만 내 기분이 풀릴 것 같아서 수많은 세계를 건너 다시 여기까지 온 거야.”
순간 도겸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반 걸음쯤 더 다가와 밀착하다시피 선 청이 도겸을 올려다보며 손을 뒤로 뻗었다. 차가운 손길이 닿은 곳은 여전히 화살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는 부위였다.
“…큭!”
예고도 없이 화살촉을 뽑아낸 탓에 도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를 바라보는 청은 서늘한 눈동자를 번득였다.
“결국 네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해 줬으니까 너는 널 내게 줘.”
불에 덴 듯 뜨겁게 욱신대던 상처 위에 차가운 청의 손이 닿으니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열기가 잦아들었다. 머지않아 통증까지 멎어 갔다. 그때까지 반지를 다룰 수 있게 됐다는 청의 말을 실감하지 못하던 도겸은 이후에 제 다친 어깨를 경대에 비춰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네 남은 생을 내게 줘. 다른 사람은 안 돼. 나만 널 가질 거야. 내 허락 없이는 이리 날붙이를 몸에 꽂거나 다쳐서 피를 내는 것도 안 돼.”
단지 청이 차가운 손으로 열기만 식힌 게 아니라 아예 상처를 치유시켰다는 것을.
“그런 말을….”
도겸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비를 맞고 머리가 씻기다 못해 텅 비어 버린 것일까. 지존의 앞에서도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어쩐지 불능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는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고집스럽게 저를 요구하는 청에게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보통 연모한다 혹은 은애한다고들 표현하지.”
“하지만 너는 나를 연모한다면서 보내 버렸잖아?”
“어? 아니 그, 그건….”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전히 청은 그에게 가장 까다로운 제자였다.
도겸이 시선을 피하자 청이 과격하게 그의 턱을 붙잡아 저를 똑바로 보게 했다.
“좋다면서 보내 버리는 게 연모고 은애라면 나는 그런 거 싫으니까 그거 말고, 서로를 가져 곁에 있고 싶을 때 하는 말이 필요해.”
“하지만 이 땅에서는 용이라 하여도 여느 살아 숨 쉬는 것들처럼 늙어 간다,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텅 빈 심장이 차오르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지만 도겸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정 하나만 말하기에 앞서 청은 사람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으니까.
“그게 뭐?”
그러나 정작 그런 문제를 마주한 청이 지나치게 담백하게 굴었다.
“그런 사소한 것보단 난 네가 여기까지 오는 데 쓴 내 수고로움을 더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네가 여행이라 생각하라며.”
청은 도겸의 모든 우려를 물로 씻어 내듯 시원시원하게 불식시켰다.
“이곳에서 여행하는 동안 내가 기념품으로 삼고 싶은 건 앞으로 널 갖고 살아갈 기억뿐이라고.”
어쩐지 조금은 두려워지면서도, 그래서 더욱 심장이 떨리는 말이었다. 도겸은 새삼 깨달았다.
아마도 처음엔 정말 청이 두려웠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그 한 끗 차이를 넘은 모양이라고.
“그리 말해 주니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 것 같구나.”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깨끗한 눈을 바라보던 도겸은 드디어 머릿속에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고 청을 올려다보았다.
“…해로. 이런 때엔 해로하고 싶다 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러곤 하얀 손끝을 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그대와 함께 죽는 그 날까지 해로하고 싶은데, 그리해 줄 수 있겠소?”
비록 행색은 물론 집 안 꼴도 말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순간이어야만 했다.
“그것이 파랑으로 나타나 내게서 청이 되어 준 그대에게 간곡히 바라는 바요.”
갑자기 정중해지기까지 한 도겸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본 것인지, 청은 도겸의 형편없는 외관이 아닌 오롯이 눈만 바라보며 답했다.
“네, 당신과 해로하겠습니다.”
그게 사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사는 용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도겸은 미처 다 알지 못했다.
아니, 다른 한편으론 아무리 같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 감정의 색이나 크기는 정확하게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니 종의 경계를 뛰어넘은 청과 도겸에겐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서로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청의 손을 잡고 일어난 도겸은 그대로 청의 입술을 머금었다.
“나의 아내가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청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을 텐데도 괜찮겠느냐?”
“어차피 네 멋대로 지은 이름이었잖아?”
“…그렇기야 한데.”
겸연쩍어하는 도겸에게 이번엔 청이 먼저 입술을 마주 대었다.
“이건 보내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거지?”
그리고 다시금 도겸의 마음을 확인하려 했다.
도겸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래. 당연히 냉기를 빼내기 위해서만도 아니고.”
“흠….”
부쩍 인간의 소유욕을 궁금해하는 청에게 우선 도겸은 입술을 통해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감정부터 모두 전해 주었다.
그 위로 둘을 축복하듯 옆에 선 꽃나무가 올해 틔워 낸 꽃잎을 모두 털어 흩뿌려 주었다. 물론 내년에 또다시 피어날 꽃이지만 지금 바람과 만나 떨어지는 꽃잎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한 첫 번째 봄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