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6)화 (181/197)

“저하!”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적군도, 아군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와중에 언은 더없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수선한 와중에 익위사들이 세자를 지키고자 둘러쌌지만 정작 언은 아무런 행동도, 명령도 취할 수가 없었다.

“눈이….”

마치 빗물이 눈에 낀 검은 막을 씻어 내는 것 같았다. 계절이 바뀌고 매일 해가 뜨고 지는 동안에도 늘 검은 먹으로 그린 그림 속에 갇혀 지내던 언의 눈에 드디어 무채색 이상의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언의 눈에 저 멀리 파란 하늘이 일렁였다. 마치 붓을 하늘에 담가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보여.”

꿈일까. 악몽이 선몽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인가. 희미하게나마 어떤 형상이 보였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의 푸른색을 인식할 수 있어 어지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느끼던 차, 때려 붓는 빗물 사이로 사람들이 내지르는 말들이 귀로 스며들었다.

“용식 아버지!”

“이, 이게 어찌… 머리가 맑아졌어!”

“칠성아!”

“어머니!”

약을 달라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친 사람처럼 조익환의 편에 섰던 백성들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제 손에 왜 무기가 들려 있는지 그 자체를 의아해하며 내던지거나 울음을 터트리며 말리던 가족을 얼싸안았다. 상처 입은 가족을 붙잡고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언은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금세 손바닥에 차고 넘치는 빗물은 투명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른 때에 내리던 빗물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머리가 맑아졌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겉만 젖는 게 아니라 뼛속까지 깨끗하게 씻겨지는 기분이었다.

“끄… 끄아아악!”

반면 적군들이 포진해 있는 쪽에선 심상치 않게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 내리는 비 덕분에 패색이 짙던 아군에게 잠시나마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홀린 듯 손바닥에 넘쳐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던 언은 별안간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주변을 둘러보던 언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두 손에 올려놓고 빗물에 흠뻑 적셨다.

“저하, 이 틈에!”

“궐문을 열어라.”

“예?”

“서둘러. 너희들 모두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빗물을 받아라. 우린 즉시 전하가 계신 침전으로 간다!”

“아니, 어찌…!”

“저하의 명을 받들어라!”

익위사들이 갑작스러운 명령에 어리둥절해하던 와중에 도겸이 소리쳤다.

“이 빗물은 아마도 정화의 효능이 있는 듯하니 서둘러라. 비가 그치기 전에 어서!”

도겸이 전보다 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확연히 늘어난 탓이었다.

“…기, 길을 내겠습니다!”

“저하, 모시겠습니다!”

언은 길을 내며 사방을 호위하는 익위사들과 함께 정신없이 궐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의 명령에 안쪽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묵직한 문을 열었고, 문이 전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는지라 언은 틈이 보이자마자 거의 제 몸을 구겨 넣듯이 비집고 안으로 향했다.

“저하!”

그러곤 익위사들이 사방을 지키기도 전에 침전을 향해 전력 질주 했다. 역시나 조익환이 자객을 보내 놓은 것인지 안쪽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내금위 군사들과 내관들, 궁녀들이 눈에 밟혔다.

“제발, 제발…!”

이윽고 침전 앞에 다다른 언은 비를 맞고 바닥을 구르는 침입자들 앞에 의아한 듯 서 있는 내금위장과 눈이 마주쳤다.

“…저하.”

침입자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는지 피 칠갑을 한 채였지만 아직 내금위장이 입구에 있었다. 침전 안쪽이 안전하다는 의미인지라 언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졌다.

“아바마마는!”

“무사하십니다.”

그 말에 안도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언은 신발을 벗을 틈도 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은 두 손 안엔 제법 고인 빗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세자!”

마침내 침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땐 혹시 모를 상황에도 도망치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왕비가 여전히 누워 있는 임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킬 여유가 없었다. 언은 임금의 곁으로 가 무릎을 꿇으며 내관에게 소리쳤다.

“당장 창을 열고 대야에 빗물을 받게!”

“예?”

“어서!”

“…예!”

제 눈을 씻겨 준 비가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어 최대한 모아 둘 필요가 있었다. 언은 간곡한 마음을 담아 소중히 품어 온 빗물을 아버지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한 방울이 아까운 빗물은 얼마간 창백한 용안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다행히 벌어진 입 안으로도 스며들었다.

“아바마마, 제발….”

“돕겠습니다.”

세자가 무얼 하는지 비록 영문은 모르지만 반대편에 앉은 왕비가 침착하게 다가와 임금의 턱을 강하지 않게 잡고 벌어지게 했다. 덕분에 언은 남은 빗물을 모두 흘려 내고 손수건을 적신 물을 모두 짜 넣을 수 있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세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물을 짜낸 언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임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동안 여전히 얼떨떨해하던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좋지 않습니다.”

“…….”

낙담했는지 어머니는 대답 대신 언의 차가운 손을 잡아 주었다.

언은 곧 그 작은 두 손을 강하게 마주 잡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왠지 모든 것이 나아질 듯합니다, 어머니.”

“예? 그게 무슨….”

“아니, 좋아질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리될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모든 것이 씻겨 나간 언의 마음속엔 더 이상 절망이나 좌절 따위의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형용할 수 없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쪽에 치우친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언…이냐.”

순간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언을 깨웠다. 어머니를 바라보던 언이 멈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바마마.”

그곳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임금이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없이 내리는 비는 도통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반역을 일으킨 자들 중 상당수가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통에 세자를 지키고 궐의 입구를 막던 도겸을 비롯한 아군들은 벙찐 채로 그 아비규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손대지 않고도 코를 푸는 모양새인 탓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곁으로 뛰어 들어온 삼득이 도겸을 붙들고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궐의 문 쪽으로 이끌었다.

“나, 나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리고 아마도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도겸만 그 이유를 아는 듯했다.

“…청이다.”

소원을 빌어 원래 살던 세계로 돌려보낸 청이 돌아온 것이다. 날아오던 용이 어디쯤 있는 것인지 살피고 싶었지만 마치 폭포처럼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대지를 채울 듯한 기세인지라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마치 격이 다른 존재를 향해 감히 고개를 들지 말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예? 무어라 하셨습니까?”

온갖 소음에 제대로 듣지 못한 삼득이 재차 물었다. 멍하게 이끌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도겸은 비로소 퍼뜩 깨어났다. 명료해진 머릿속엔 기다렸다는 듯이 직후부터 해야 할 일들이 차올랐다.

“비가 그쳐 전투가 재개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역당들을 최대한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적들을 제압해라!”

피 묻은 도겸의 검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긴 채였다. 도겸은 순결하게 씻긴 검을 높게 치켜든 채로 조익환이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조익환!”

어깨 근처에 맞은 화살로 인해 한쪽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차올랐으니까. 도겸은 조익환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창졸간에 기진맥진한 적군들을 밀치고 조익환을 벨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끄, 끄아아…!”

그런데 허무하게도, 조익환은 이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화살을 맞지도, 총알이 몸에 박히거나 사소하게나마 검에 베인 상처 하나 없음에도 조익환은 근방의 그 어떤 부상자보다 괴로워했다.

“그, 끄, 크흑, 컥!”

“…….”

허무하다 못해 맥이 빠질 정도였다. 도겸은 힘껏 들었던 검을 내려 조익환의 목에 겨누었다.

“…이승에서의 죗값은 이승에서 치러야겠지.”

아마도 벌써 청이 그 벌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도겸은 차츰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가운데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역의 수괴가 바닥을 구르고 있으니 따르는 이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당연했다.

“역도들은 즉각 항복하라!”

도겸은 조익환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물론 모두가 쓰러진 것은 아닌지라 몇몇은 아직 조익환을 지키고 있었고 당연히 도겸에게 검을 겨누었다. 대책 없이 뛰어든 탓에 조익환의 목에 겨눈 검은 단 한 자루였지만 제 목에 드리워진 검은 한눈에 세어지지도 않았다.

“나리!”

허둥지둥 따라온 삼득이 어쩔 줄을 몰랐다. 뒤쪽에서 한차례 싸움이 일었다.

“하, 아직도 설마 만 냥의 대가를 바라는 것인가.”

기가 찼다. 그렇다면 차라리 부모님의 위패 앞에서 다짐한 대로 조익환을 베어 죽이고 저 또한 저승길에 동행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도겸은 제 목에 검이 겨누어진 것도 모르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조익환을 향해 칼날을 더 가까이 했다.

적어도 스스로 숨이 끊어지기 전에 제 손으로 끊어 놔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주상 전하 납시오!”

그때 언을 들이기 위해 잠시 열렸던 궐문이 활짝 열렸다. 그 틈으로 붉은 용포를 걸친 임금이 걸어 나왔다.

도겸은 지존의 곁을 따르는 언과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법은 간단했으나 그 틈에 오고 간 감격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역당들은 모두 무기를 내리고 항복하라!”

왕은 곧 승하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소문이 단박에 날아갈 만큼 크게 호령했다. 임금의 뒤로 쏟아져 나온 내금위군들이 일제히 절도 있게 무기를 꺼내 들고 우왕좌왕하는 반역도들을 제압해 나갔다.

그동안 임금은 가장 큰 오해부터 풀고자 했다.

“조익환이 내세운 교지는 날조된 것이다. 과인은 그런 교지를 쓴 적도, 거기에 옥새를 찍어 준 일도 없다. 조익환은 과인이 따로 조사하고 있던 위조된 옥새를 멋대로 가져가 교지를 꾸며 쓰고 인장을 찍은 대역 죄인일뿐더러, 감히 과인을 음해하려 했을 뿐!”

깜짝 놀라 젖은 바닥에 엎드리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임금의 눈빛엔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엔 분노가 그득했다.

“그런 죄인과 뜻을 함께하며 아직도 과인에게 반기를 들 자가 있다면 지금 내 앞에 나서라. 내 친히 그 목을 베고 삼족을 멸하여 줄 테니!”

감히 무섭게 포효하는 임금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지존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항복하는 이들이 무기를 떨어트리는 소음이 일었다. 도겸의 목에 겨누어진 무기들까지 모두 물러갔다.

용호영의 군사들에게 제압당한 반역도들을 눈으로 훑던 임금이 친히 걸음을 옮겨 이젠 혼절하기 직전의 조익환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도겸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별산대를 이끌며 세자의 곁을 지켜 줄 자네가 있어 과인은 누워 있는 동안에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 그 검을 내려놓아도 좋네.”

내금위군이 주변을 빙 둘러싼 틈에 임금은 친히 도겸의 손에서 묵직한 검을 가져갔다. 그러곤 거침없이 조익환의 다리에 찔러 넣었다.

“끄, 끄흑, 끄아악…!”

“그리고 드디어 모든 죄상이 드러난 네놈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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