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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5)화 (180/197)

조익환이 소리쳐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메아리처럼 백성들에게까지 제 말이 들리게끔 했다.

“너희들의 고통을 줄여 주고 잠시나마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끼도록 도와준 약을 제공한 자가 바로 나다!”

스스로 사실을 털어놓는 조익환 때문에 도겸도, 언도 검을 물리고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나라가 환란과 도탄에 빠질 때 저 궐 안의 임금이 한 일이 무어 있느냐? 없다. 그리하여 내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한다. 너희들이 돕는다면 이 땅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현혹되지 마라. 약에 중독될수록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이다!”

즉각 도겸이 사람들을 밀치며 나가 백성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금단에 허덕이던 몇몇 백성들이 비틀거리며 싸움이 벌어지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약… 약을 주시오!”

“그래. 나를 돕겠다면 낫이든 곡괭이든 들고 나와 썩어 빠진 왕실을 지키려는 자들을 베어라. 머리를 가장 많이 가져오는 자에게 평생 쓸 약을 아낌없이 내어 주겠다!”

호언장담하는 조익환의 약속을 기다렸다는 듯이 역당들이 뛰어나가 집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백성들에게까지 전했다. 덕분에 일대는 더없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졌다. 도겸과 아군들은 상대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한 명이라도 더 제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달리는 말보다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랐다.

“반역도의 감언이설에 속아선 아니 된다! 중독된 자들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언이 목청 터져라 소리쳤지만 기어이 술수에 넘어간 사람 몇몇이 정말 낫 따위를 하나씩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나랏님의 햇볕이 구석구석 들지 않는 것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나는, 나는 당장 약이 없어 썩어 들어가는데!”

“아… 안 돼, 용식 아버지!”

애석하게도 그들은 대부분 도성 안에 기거하는 별산 대원의 가족이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별산대의 병사 하나가 결국 복면을 벗어 던지며 달려 나갔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닥쳐, 이년아! 나는 약이 필요해. 약이 있어야 한다고!”

아내를 사납게 밀치는 남편은 더 이상 지아비라, 용식이라는 자의 아비라 볼 수 없었다. 그저 약에 중독되어 환장한 광인에 불과했다.

“칠성아! 안 된다. 나오지 마라!”

창졸간에 도겸의 견고한 수비가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서 변수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나라를 구하고 자신을 지키려던 별산 대원들은 각자의 가족들 앞에 속수무책이 됐다.

아주 곤란했다. 적어도 토벌군이 오기 전까지는 버텨야만 했다.

“이탈해선 안 된다!”

“용식 아버지, 안 돼… 안 돼!”

“목멱군, 위치로! 분산되어선 안 돼. 전열을 바로 해야 한다!”

“하지만 제 지아비가 죽습니다!”

약에 눈이 먼 자들은 이내 자신의 가족까지 해치려 했다. 어떤 병사는 별수 없이 총신으로 지아비를 강하게 후려쳐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결국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일찍이 별산대에 주의할 것을 알리긴 했지만 그 가족들이 약에 물드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전투 중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질책하기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하. 서둘러 조익환을 잡아야 합니다!”

일찍이 조익환의 집에서 도겸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더 열심인 삼득이 곁을 지키며 염려했다.

“나리, 아직 적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조익환의 주변엔 인간 방패막만 어림잡아 수십은 되었고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별산대는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기동성은 훌륭했지만 육탄전으로 간다면 순수 무력으론 역부족이었다. 가능한 한 단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저하!”

아비규환이 된 상황에 더는 끌어 올 지원군이 없었다. 도겸은 뭔가를 결정하기 이전에 주군의 의사를 먼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역도들을 벨 때는 단호하던 언도 이 순간만큼은 망설이는 듯했다. 상심한 눈빛이 역력했다.

“충분히 대비치 못했던 것은 모자란 국본이다. 그대의 충심은 결단코 숭고하였으니 더는 죄책감 갖지 말게.”

언의 말을 듣자마자 도겸이 예감한 것은 하나였다.

“…저하.”

“백성들이 이대로 인질이 되어 죽어 나가게 둘 순 없다. 더는 약에 찌들어 스스로 불길에 뛰어들게 해선 안 돼.”

거기까지 말한 언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조익환을 향해 소리쳤다.

“궐문을 열겠다!”

언의 외침에 드디어 조익환의 시선이 언을 향했고, 도겸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검을 버린 세자가 도겸의 어깨를 짚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재차 조익환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다만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면 더는 백성들을 약에 의존하게 두어서는 아니 된다. 어찌 중차대한 거사를 치른다는 자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단 말인가!”

“적당히 피우면 일의 능률을 높이고 긍정적인 기분을 늘 만끽할 수 있다. 나는 그리 말했건만 사람들이 말을 듣질 않은 게지. 무어… 중독되어 버린다면 나는 새로운 사람을 구하면 그만 아니겠나? 적당히 취해 적당히 효율을 다할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어찌 사람을 물건 쓰고 버리듯 한단 말인가!”

지친 금군과 익위사들, 그리고 도겸과 별산대를 뒤로하고 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익위사는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라. 백성들이 다치게 두어선 아니 된다!”

“저하, 그러면 저하의 호위가…!”

“가거라!”

“저하, 익위사는 끝까지 곁에 두십시오. 제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도겸이 삼득에게 눈짓하자 삼득이 즉각 무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다시금 승세를 잡은 조익환은 총알과 화살을 막아 낸 방패를 든 채로 웃어 보였다.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하물며 이미 저물어 가는 세자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내뱉은 말은 말해 무엇하랴? 그런 조건을 걸고자 했다면 더 일찍 했어야지. 나는 이대로 밀고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조익환은 다소 흐트러진 병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온 내 힘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확인할 때가 온 것이다. 무엇 하느냐, 당장 세자의 곁에 붙어 귀찮게 하는 최도겸 저놈부터 죽이지 않고!”

“예!”

도겸은 저를 향해 겨누어지는 무기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세자 저하를 모셔라!”

익위사들이 언을 둘러쌌다. 그러나 언이 자리를 피하지 않고 버티며 도겸과 함께 싸우려 했다.

“저하, 피하십시오.”

“너를 죽게 두진 않을 것이다.”

“저하가 우선입니다!”

“너 또한 내 백성이다!”

언이 도겸이 건넨 수건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고집을 부렸다.

“궐을, 그리고 벗 하나조차 지키지 못하는 국본이 어찌 진정 국본이라 할 수 있겠느냐.”

“…….”

“그런 나의 곁을 끝까지 지켜 주어 고맙다, 도겸아.”

언은 그렇게 말하며 도겸에게 달려드는 적을 베어 냈다. 도겸은 검을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아군의 현황을 파악했다.

“궐문을 열어라!”

적군의 총공세가 벌어졌다. 느리긴 해도 장전을 마친 조총병들이 총을 겨누었고 화약을 채운 조총 앞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든 검은 무력하기만 했다. 미리 만들어 가져온 호리병이며 각종 개량 무기들마저 바닥난 것인지 폭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저하!”

주변을 둘러보고 온 금군이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별산대 바깥쪽에서 조익환의 군사들이 더 밀려들고 있습니다.”

조익환이 병권을 최우선으로 가져가려 함은 당연했다. 도성의 안팎을 수비하는 훈련도감의 병력을 차지하면 보다 수월하게 반란을 이룩할 수 있을 테니까.

“토벌군은?”

이미 조익환이 병조판서와 내통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던 도겸과 언은 일찍이 왕실에 충성하는 무신들에게 토벌군 지원을 요청해 둔 바 있었다. 그리고 도성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수어청의 수어사가 토벌군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정찰을 맡은 이의 낯빛이 어두웠다.

“…아직입니다.”

별수 없었다. 도겸은 언에게 차선책을 내보였다.

“문이 뚫리기 전에 먼저 들어가 내금위와 합류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궐 안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임금을 지키기 위해 내금위 30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금위를 제외한 용호영의 겸사복과 우림위 400명과 도겸의 별산대 200여명으로도 턱없는 와중에 내금위를 포함한들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다. 훈련도감의 병력은 정예를 포함해 수천 명이었으니까.

“내금위까지 이 전투에 끌어들이게 된다면… 저들을 상대하는 동안 필시 전하의 호위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왕좌왕하는 아군들을 추스르는 동안 언이 고민에 빠졌다. 도겸은 평정심을 잃은 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전부 무너지면 안에 남은 내금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하를 내어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도겸이 언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던 차, 무심히 둘러본 시선에 정확히 언을 겨눈 화살촉이 보였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몸이 먼저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니…!”

반사적으로 언을 감싸고 서자마자 날카로운 화살이 등을 꿰뚫었다. 충격적인 고통이 느껴진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도겸아!”

뒤늦게 도겸이 대신 화살을 맞은 사실을 안 언이 기함했다. 그럼에도 도겸은 검을 놓지 않고 스스로 어깻죽지에 꽂힌 화살을 부러트렸다.

“염려 마십시오. 다행히 급소는 피했습니다.”

“하지만….”

“혹 조익환이 궐 안에 이미 자객을 보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문제가 커질 것입니다. 들어가는 게 낫습니다.”

사실 도겸이 보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저 또한 흑매향의 무사들을 끌어 모아 임한 상태였지만 역부족이었으니까. 충분할 것이라 예상했건만 막판에 조익환에게 합류한 세력의 규모가 예상보다 컸고, 약에 중독된 민가의 백성들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조익환의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자를 죽이면 좌상 대감이 만 냥을 주신다네!”

“저 목은 반드시 내가 쳐 내고 말겠다!”

거기다 번번이 도겸을 죽이는 데 실패한 조익환이 사람들에게 목숨값을 걸어 놓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너는 그만 피하거라. 여긴 내가…!”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치 물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군이 쓰러지고, 적군이 코앞까지 닥쳐왔다. 와중에 조익환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게 원통했다. 그러나 도겸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러니 내 벗이지.”

결국 명령을 철회한 언이 피식 웃고 말았다. 도겸과 언은 상의를 나눌 틈도 없이 궐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서로 등 뒤를 봐 주며 적을 베어 나갔다.

“죽여라!”

“장전!”

수습된 별산대가 다시금 기동했지만 조익환의 조총병들이 도겸과 언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게 더 빨랐다.

화살 한 발은 우스웠다. 다음 순간이면 벌집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이윽고 지휘관이 발사를 외칠 즈음이었다.

“…뭐야?”

갑자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사!”

“부, 불이 꺼졌습니다!”

“재장전! 재장전이 필요하다!”

쏟아지는 빗방울은 조총에 붙인 불을 꺼트려 절묘한 순간에 발포를 막았다.

매서운 빗줄기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도겸은 똑똑히 보았다.

“아….”

창연한 하늘을 물결 가르듯 여유로이 헤엄쳐 날아오는 생명체를. 일순 파도 같기도, 바람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름다운 그것은 바로 푸른빛을 띤 용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도겸은 바로 알았다.

파랑이 불어오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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