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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4)화 (179/197)

마침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 저를 알아보는 이에게 순이는 다부진 표정으로 다가섰다.

“나리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어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숨을 죽인 아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처음엔 조금 헷갈렸지만 네 번째로 말하는지라 이젠 더 이상 틀리거나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산을 일으켜 해를 지켜야 할 때가 왔다고.”

그러자 순이를 바라보던 이의 눈빛이 결연해지며 표정도 근엄하게 변했다.

“…그래.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이의 등은 꼿꼿하기만 했다. 앞선 세 사람과 꼭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일까. 순이는 도겸이 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조금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전달받은 이에게 확실히 전했다 싶으면서도, 제가 전한 말이 뭔가 엄청난 일을 일으킬 열쇠가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금세 울고 싶어진 아이는 치맛자락을 꼭 쥐어 참을 뿐이었다.

***

도성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역적을 상대로 칼등만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기에 도겸은 거침없이 적들을 베어 나갔다. 다만 전방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이들의 경우 역모에 가담하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단순히 명령에 따르고 있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기에 급소를 찌르거나 베는 대신 당장의 운신만 어렵게끔 만드는 게 전부였다. 진정 급소를 베어 숨통을 끊어야 하는 대상은 후방에서 이 상황을 여유롭게 관망하고 있는 권력자들이기에 힘을 아낄 필요도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라 해도 하나하나가 정예였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세자 쪽에서 도통 밀리지 않자 조익환이 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가했다.

“아직 침전에 누워 계신 전하께서 그리되시기 전 내게 주신 특별 교지일세!”

전투가 주춤한 사이 조익환이 교지를 큰 소리로 읊었다.

“조선의 왕 이찬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조익환에게 조선 팔도의 모든 병권을 위임한다!”

“그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당연히 언이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격분했다. 무섭게 검을 휘둘러 조익환에게 다가가려 함은 당연했다. 조익환은 느긋하게 교지를 더 앞으로 내밀었고, 흥분한 채로 다가가려는 세자를 뒤따른 도겸이 급히 막아 세웠다.

“저하, 아시지 않습니까. 저 자의 특기가 날조입니다. 보나마나 조작된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리 시명지보(施命之寶,임금이 교명, 교서, 교지를 내릴 때 찍는 도장)로 찍은 인장이 있는데.”

버젓이 교지를 흔들어 보이는 조익환을 보며 언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별안간 앞을 가로막은 도겸을 밀어내고 검을 휘두르려 했다.

“두어라. 감히 지존을 욕보이려 하다니, 당장 저놈의 목을 쳐야겠다!”

“고정하십시오!”

문제가 있다면 기어이 분노를 참지 못한 언이 적진 한가운데 들어가 완전히 포위됐다는 점이었다.

“…우릴 말려들게 하려는 수작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세자를 위시하고 지켜야 할 중신들 대부분이 조익환의 편에 서 있는 판국이었다. 세자가 불리한 상황임을 알게 된 익위사와 용호영의 군사들마저 사기가 꺾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도겸이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즈음이었다.

“산을 일으켜 해를 받들어라!”

싸움이 벌어지는 바깥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뭔가 펑펑 터지는 격음이 들리기도 했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도겸이 개량해 만든 투척형 무기인 호리병이었다. 폭음에 놀란 말들이 날뛰느라 타고 있던 사람들이 떨어지거나 애를 먹었다. 조익환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화포라도 쏜 것인가?”

상대가 아무리 다수라 해도 판을 흔들면 위기는 기회가 된다. 다소 혼란해진 와중에 놀란 언이 의아해하며 적들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했고, 도겸은 나지막이 대꾸했다.

“미처 이름을 짓지 못한 시험용 무기입니다만….”

물론 입과 코를 막을 수 있는 수건을 꺼내어 언에게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적들을 상대로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눈이 맵고 호흡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잠시 숨을 아끼시고 시야를 좁히십시오.”

“뭐? 그럼 저들은….”

“아군입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촌각을 다퉈야 합니다. 오래 싸우기는 어렵습니다.”

도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마자 사방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인왕군, 주상 전하를 지키기 위해 당도하였습니다!”

“목멱군,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타락군, 본때를 보여 줄 것입니다!”

“백악군, 성심을 다해 도성의 환란을 끝내겠습니다!”

사방에서 속속들이 도착한 무장 군사들이 어수선한 틈을 타 조익환과 역당 무리를 밀어붙였다. 도성을 둘러싼 산의 이름에서 따온 네 개의 분대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역당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하나같이 복면을 쓴지라 누가 누군지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는지라, 곧 사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목소리가 어찌….”

역도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라 바깥을 보지 못한 언이 재차 눈을 끔벅였다. 이번엔 간신히 말을 다스린 조익환이 대답하는 셈이 되었다.

“어디 감히 계집들이 무기를 들고 설치는 것이냐! 인왕군? 목멱군? 그따위 군명은 들어 본 적도 없다. 하찮은 화적들이 낄 자리가 아니다!”

하찮다는 말에 발끈한 도겸이 소리쳤다.

“그야 전하께서 직접 명하시어 용호영과 동일 선상에 꾸려진 기밀 별산대이니 네놈은 모를 수밖에!”

“별산대?”

“전하께선 도성 안팎의 전력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이가 역적이 될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계셨지.”

도겸은 조익환을 노려보며 설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이 사실을 몰랐을 세자를 바라보며 나머지를 설명했다.

“그 결과 경국대전에서 요구하는 군역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되, 무기를 들어도 병사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훈련시켜 유사시 나라를 구하고 또한 제 목숨도 능히 구할 수 있는 군대를 키워 내신 것이다.”

바로 나이 불문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여군이었다. 나물이나 캐고 냇가에 빨래를 하러 산에 가는 줄 알았던 여인들이 설마 훈련도감에서도 정예만 뽑아 만든 별무사들처럼 조총 훈련을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임금과 도겸이 노린 맹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기다 백면서생처럼 책만 끌어안고 사는 규장각의 직각이 용호영의 별장과 같은 종2품 품계를 받고 군대를 통솔할 것이라 어찌 눈치챌 수 있겠나.

도겸은 품에서 통행부를 꺼내어 조익환에게 내보였다.

“별장의 지위로 특별한 군사의 훈련을 맡고 지휘하도록 명 받은 이가 바로 나다.”

규장각 직각의 자리를 내놓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표면적인 직책에 불과했으니까. 도겸의 진짜 임무는 임금으로부터 또 다른 별장의 지위를 부여받아 왕의 직속 특별 부대를 총괄하는 데 있었다.

다만 밤에만 훈련할 수 있는 제약이 있는지라 임금은 밤에 도성 안팎을 돌아다니다 순라군을 만나도 상관없는 통행부를 발급해 주었다.

“뭐?”

당연히 조익환은 전혀 믿지 않고 코웃음 쳤다.

“허무맹랑한 궤변이군. 그리 은밀히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 줄 아나? 설령 사비로 그 모든 비용을 감수한들 임금의 내탕금이 얼마인지, 그 엽전 개수까지 전부 꿰고 있는 나조차도 모르게 그따위 작당이 가능했을 리 없다. 그저 또 다른 역모를 꾸미고 있던 것임을 내 모를 줄 아느냐!”

“'또 다른'이라는 것을 보니 스스로 짐승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조익환의 군사들이 무장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도겸은 즉시 별산대가 실전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사병화하지 않고 전적으로 임금의 윤허를 받고 나라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별산대의 훈련 비용은 당연히 모두 도겸이 상단을 통해 감당했다. 그러니 조익환이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닥쳐라. 지금 이 거사는 역모가 아니라 반정(反正, 실정하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이다. 누가 진짜로 나라를 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어디서 함부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뜻밖의 지원군에 적잖이 놀라긴 했는지 여유낙락하던 조익환의 언성이 높아졌다. 도겸은 조익환을 보며 결코 자신이 역적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근거를 밝혔다.

“우리 별산대의 발족은 전하께서 직접 금등 문건으로 남겨 놓으셨다. 우리가 누굴 위해 땀을 흘렸고, 피를 흘릴 것인지도.”

“금등 문건?”

“그것이 바로 내가 결코 모반이 아니라는 근거다. 네놈은 전하께서 직접 쓰셨다는 근거가 없지 않나?”

싸우는 와중에 입씨름을 벌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도겸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익환의 편에 서겠다고 나선 이들의 심중을 흔들어 놓는 동시에 시간을 벌어야 했으니까.

“우습구나. 너와 나의 입장은 같지 않나? 그 문건이 있다 한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한 네 논리에 따르면 그것을 전하께서 쓰셨다는 사실을 납득하긴 어려울 터인데.”

완연히 본색을 드러낸 조익환은 자신의 주장이 담긴 교지를 둘둘 말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고작 계집 몇 모아 만든 조총 부대 따위로 충심을 말하려 하다니. 도리어 그리해야 할 정도로 왕권의 위상이 무너졌음을 역설하는 것이지!”

“어찌 감히 주상 전하의 뜻을 왜곡하느냐!”

이번엔 언의 앞에 나선 도겸이 조익환을 향해 피 묻은 검의 끝을 겨누었다.

“전하께선 별산대를 꾸리시면서도 결코 이들이 나서는 일이 없길 바라셨다. 그저 여인들 각자가 유사시에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만 있으면 족한다, 그리 말씀하셨지.”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상황이 상황인 것을 아는 세자는 더 이상 나서지 않고 잠자코 도겸의 등 뒤에 서 주었다.

도겸은 그런 세자를 위해 지존이 아들을 위해 남겨 둔 다른 말도 전했다.

“다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보다 세자 저하를 가장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명령도.”

“…….”

“그리하여 본 별산 대장은 성심을 다해 세자 저하를 모실 것이다!”

도겸이 소리치자 바깥쪽에서 역도들을 견제하던 아군들이 일제히 소리쳐 사기를 드높였다.

“세자 저하를 모셔라!”

또 한 번 전투가 벌어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전과는 달리 창과 방패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채였다. 정예 무사들을 데리고 돌파구를 뚫은 삼득과 호위무사들이 도겸과 언의 편에 서서 싸웠으며, 활을 다루는 화월과 남산댁은 높은 곳에서 그런 중앙의 싸움을 엄호했다.

“오늘 나는 목숨을 걸고 네놈의 목을 잘라 억울하게 가신 혜빈마마께 바칠 것이다!”

멀찍이 있었음에도 울분에 차 내지르는 남산댁의 고함이 어렴풋이 들렸다. 비장하게 쏘아 보낸 화살은 안타깝게도 조익환을 지키는 견고한 방패가 막아 냈다.

“조총이다! 맞대응하라!”

“하, 하지만 아직 세총 중인지라… 으악!”

“서둘러라!”

비록 역도들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단합력이 남다른 별산대는 분대장의 적확한 지시와 충성스러운 분대원들의 민첩함을 보였다. 순식간에 장전하여 발포하는 별산대의 공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역도들이 공황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던 차 이번엔 조익환 쪽의 역당들이 수세에 몰리게 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병법서를 익힌 도겸이 직접 개량한 조총을 쓰는 별산대는 조익환의 조총병보다 빠른 속도로 장전과 발사를 반복할 수 있었으니까.

“좌, 좌상 대감!”

안팎에서 공격을 당하니 역으로 포위된 조익환의 군사들이 기세를 펼 틈이 없었다. 병사들을 이끌던 누군가가 방패를 세워 총알을 막던 조익환에게 소리쳤다. 언과 함께 적들을 베어 나가던 도겸이 마침내 조익환의 근거리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이 싸움을 지켜보는 모든 백성들은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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