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3)화 (178/197)

“그럼 그 소설 속에서 말하는 '연모'의 의미는 무엇이더냐?”

“음… 뭐, 여러 가지던데. 그리워하고 아끼고 평생 같이 있고 싶은 거.”

도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아.”

“그럼?”

“나는… 나는 말이다.”

도겸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단어들 중에 어렵사리 하나를 골라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내가 사랑하는 이가 늘 안녕하길 바라.”

“…너.”

그제야 청이 도겸의 눈물을 알아차렸다. 하얀 손가락이 도겸의 젖은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취했어?”

도겸은 청의 손을 잡아 내리며 미소 지었다.

아마 청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의 마음이 어찌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지.

“아니, 이제 소원을 말할 건데 이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어찌 술을 마시겠느냐.”

“뭐?”

“아,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여기 더 있다간 입이 얼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소원을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막상 긴장이 되어 도겸은 먼저 물 밖으로 나가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곤 물을 털어 내기도 전에 내내 품고 다녔던 머리 장신구를 꺼내어 청의 머리에 다시 꽂아 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청이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소원이 뭔데?”

순간 도겸은 깨끗하게 머리를 비웠다. 담벼락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오늘이 지난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을지에 대한 걱정까지도.

“내 소원은 말이다.”

그리고 저를 믿고 제 손 위에 손을 겹치는 청을 향해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이제는 얼음을 녹일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확신을 입 밖으로 내어야 할 때였다.

“네가 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선명해진 소원을 말하는 순간 아직 몸을 담그고 있는 청의 주변으로 가볍게 찰랑이던 물살이 거칠게 일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그게 소원이라고? 조익환을 찾아 죽이는 게 아니라?”

물살이 달라졌음을 당연히 느꼈을 텐데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청은 도겸을 보며 다시 물었다.

“최도겸. 날 보내는 게 진짜 네 소원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그 목소리마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겸은 대답 대신 잡은 손을 당겨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겨우 입술만 머금는 게 전부인 어수룩한 입맞춤이었지만 더없이 열렬히 제 마음을 담았다.

이런 순간에도 청은 조금도 도겸을 의심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더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이 또한 연모하고, 사모하고, 은애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만 사내가 멋대로 이런 짓을 하면 가차 없이 뺨을 때려 주어야 해.”

“…어째서?”

물론 청이 때리면 목숨을 보장하긴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그 점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도겸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차가운 손을 샘 안으로 밀어 넣으며 느지막이 답했다.

“그건 이 홍진 많은 세상에 더 머무르기엔 네가 너무도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

“그런 너의 물에 더는 피가 섞이게 하고 싶진 않구나.”

이제 사람의 일은 사람이 알아서 해야 한다. 더는 끌어들여선 안 됐다.

그가 하는 대로 물에 버려진 청이 다시 손을 뻗으려다 눈이 약간 커졌다.

“뭐야? 왜“

작고 깊은 샘에 점차 강한 소용돌이가 쳤다. 이런 와중에 놀라운 것은 청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소원의 위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청아.”

도겸은 점차 물에 휩쓸려 빨려 들어가는 청을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부디 안녕하거라.”

이윽고 청을 삼킨 샘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한 샘으로 돌아왔다.

마치 직전에 벌어진 일이 한바탕 꿈이었던 것처럼.

***

이른 아침의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 시각, 창덕궁 돈화문의 앞엔 때아닌 전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범한 것이냐, 어리석은 것이냐. 이른 아침부터 온 백성이 지켜보는 와중에 모반이라니!”

조익환이 정문 안으로 들지 못하게 앞을 지키고 선 언이 노기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어찌 종묘와 사직을 능멸하려 하는가.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이리 야밤을 틈타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직접 걸어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하.”

조익환이 앞으로 나서서 더 큰 소리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더는 백성이 이 땅의 임금을 우러를 수 없고 저 해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닥쳐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언이 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 대역죄인을 포박하지 않고!”

그러나 이미 언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조익환을 겹겹이 둘러싼 상대 병력의 규모에 일찍이 기가 질려 버린 탓이었다.

“저하, 한 번에 사로잡긴 어려울 듯한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좌익위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며 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언의 턱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직접 끌고 들어온 군사에 훈련도감의 군사들까지 합세했으니, 만만치 않기야 하겠군.”

언이 곤란해하는 동안 조익환은 세자를 업신여기며 비웃기 바빴다.

“보아라. 지도력을 잃은 세자를 누가 따른단 말인가!”

“네 이놈!”

기어이 평정심을 잃은 언이 직접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앞서 떠난 세자빈들을 죽게 하였다는 증좌와 증인을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앵속각을 치료가 아닌 살인의 무기로 쓰기 위해 몰래 배 위에서 재배하고 악용하였지. 그것으로 감히 주상 전하까지 시살하려 하였다!”

“그것이 어찌 나의 탓이겠는가?”

언의 분노 앞에 조익환은 뻔뻔한 미소를 잃지 않고 더 큰 목소리를 내었다.

“임금이 실로 강한 태양이었다면 그런 악재들 정도는 범접하지 못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닥쳐라!”

눈이 붉게 달아오른 언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저 천인공노할 역도와 한패인 자가 있다면 숨어 있지 말고 나서라. 저자처럼 본색을 드러내고 내 검에 맞서란 말이다!”

그러자 언의 뒤쪽에 서 있던 중신들이 쭈뼛대며 줄줄이 조익환 쪽에 가 붙었다. 조익환을 제외한 의정부의 나머지 정승들인 영의정과 우의정까지 걸음을 옮겼다. 배신을 선택한 조정의 대신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그 면면들을 똑똑히 눈에 담은 언이 울분을 씹어 삼켰다.

“육조의 판서들에 참판들이며, 승지들까지… 하.”

아버지는 대체 어찌 저리 면종복배한 자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단 말인가. 기가 찬 언은 익위사에게 명령했다.

“저 치들의 낯짝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저승문을 연다면 저자들을 반드시 끌고 갈 것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신이 반드시 저하를 지키고 저들을 처단하겠습니다!”

언이 이를 갈고, 익위사들이 그런 세자를 지키는 틈에 조익환이 소리쳤다.

“그만 궐 문을 열어라! 더는 버티기밖에 되지 않는 것 같구나!”

조익환의 손짓에 무장한 군사들이 점점 문 앞으로 포위망을 좁혀 왔다. 조총을 든 별무사의 조총병들까지 모두 조익환의 편에 서서 총구를 세자에게 겨누었다.

“어찌 역당들을 감히 전하가 계신 궐에 들인단 말인가!”

그때 누군가 세자의 앞으로 뛰어 들어와 검으로 세자를 겨누는 조총 한 자루를 매섭게 쳐 냈다.

“하나뿐인 목숨을 저런 대역죄인에게 바쳐 함께하려는 것이라면 내가 이 자리에서 거두어 주겠다.”

피가 묻은 검을 든 이는 도겸이었다. 옷이며 얼굴까지 짙은 핏방울이 번진 그는 흡사 수라도를 건너온 행색을 하고 있었다.

“죽어 넋이라도 되어 온 것이냐?”

아직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조익환은 당황하지 않고 도겸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굴었다.

“그렇다 한들 말하는 짐승보다야 처지가 나쁘진 않겠군.”

도겸은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도겸의 도발에 조익환이 슬쩍 미간을 구겼다.

“말하는 짐승?”

“일찍이 맹자께서는 사단(四端, 수오지심과 측은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을 일컫는다)을 갖추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 하셨지.”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 낸 도겸이 덧붙였다.

“그러니 당연히 뻔뻔하기 그지없는 역적은 말하는 짐승에 불과하지 않겠나?”

심각한 와중이었지만 언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단코 저리 험한 말을 하는 도겸은 처음 보는 탓이었다.

“또한 짐승은 가죽만 남겨야 하는 법이니.”

겨우 열 명 남짓한 무사를 데리고 온 도겸이 조익환을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건 언의 눈에만 보일 것이었다. 언은 한숨을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지친 듯한데.”

약간의 숫자가 더해진들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조익환의 명령 한 마디면 그대로 밀려 궐을 내어 줄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럼 어디 한번 저물어 가는 태양을 지키기 위해 일백 번 고쳐 죽는 단심가나 한번 들어 볼까.”

이윽고 거짓의 탈을 벗은 조익환이 완연히 본색을 드러내고 자신의 군사들을 향해 손을 높게 들어 보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죽이고 내게 궐문을 열어 보여라!”

“예!”

반역이 성공한다면 공신이 될 수도 있기에 조익환을 따르는 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돌진했다.

바닥으로부터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그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고 사람들이 모두 눈을 찌푸렸다.

언뜻 하늘의 푸른빛이 흐려졌다. 태양 빛조차 탁해지고 말았다.

해가 떠 있음에도 어둠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

순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작은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달려가 도성 안 사방에 사는 사람 넷을 찾아야 했다. 중간중간 복잡한 갈림길을 마주해도 아이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도겸의 당부를 잊지 않고 눈에 띄는 큰길 대신 안전하되 빠른 길을 택하는 결단력은 평소 사대문 안쪽을 집 앞마당처럼 돌아다녀 본 숱한 경험 덕분이었다.

“순이야, 해주에 가지 않고 여기 남겠다면 앞으로 언젠가 나를 위해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사실 오늘 도겸의 부탁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이미 한참 전 오늘을 대비해 순이에게 긴밀히 일러 놓은 바 있었다.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만 이 일을 너보다 잘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도겸의 은밀한 부탁은 순이로 하여금 저도 뭔가 임무를 지닌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게 했다. 하물며 남산댁에게조차 발설하지 말라 하였으니 자긍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시를 내리면 너는 즉시 피맛골, 운종가, 남촌과 이현으로 가야 한다. 중간에 쉬지 않고 곧장. 할 수 있겠느냐?”

짧은 시간 내에 도성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촉박하다면 모두를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꼭 찾아서 비상 상황임을 전해야 한다.”

“걱정 마셔유. 단숨에 전부 돌 수 있어유!”

자신하는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도겸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슬퍼 보였다.

“너에게까지 이런 일을 하게 하여 미안하구나.”

“아니어유, 나리.”

내달리던 순이는 과거 제게 미안해하던 도겸에게 말했다.

“지는 나리께 도움이 된다면야 똥물에 튀겨질 수도 있구먼유!”

그리고 도겸이 기대한 이상을 보여 주기 위해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려 결국 네 번째 사람을 찾아갔다.

“어, 순이 아니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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