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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2)화 (177/197)

직제학들은 도승지가 조익환에게 약점을 잡혔거나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약방 일지를 날조했으리라 보고 있었다. 설마 그림 한 점 받자고 그런 짓을 했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제학들과 도겸은 조익환이 자신의 사람임을 인정하는 증표로써 그 그림을 주었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승지가 구태여 죽기 전에 그 그림을 송현익에게 보여 주려 했을 리 없다.

그리고 조익환은 이 관계를 눈치챈 대사헌을 제거하고, 혹시 모를 증거의 인멸을 위해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살인을 마다하지 않고 증인과 증거를 없애는 조익환이 아니고서야 의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도승지가 그토록 방어적이었던 것도 도겸의 아버지가 죽임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일 터.

“소자, 결코 두 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물론 제 목숨까지도 마냥 헛되게 쓸 생각은 없었다. 늘 그랬듯이.

조익환을 마중하러 가기 위해 도겸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소자 다시 문안 여쭙겠습니다.”

사당을 나온 도겸은 안채 쪽으로 향했다. 청이 잠겨 있는 샘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탓이었다.

“나리, 조익환이 흥인문(오늘날의 동대문)을 넘어왔답니다!”

기다리고 있던 무사가 상황을 알리며 도겸을 재촉했다.

“조익환이 이끄는 반란군은 곧장 궐로 갈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부지런하기도 하군.”

예상보다 빨라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도겸은 별수 없이 샘을 보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아무리 급해도 신알례를 드리다 말고 허둥지둥 나간 불효자 꼴을 내보일 순 없지.”

대신 방으로 가 심의와 복건을 벗고 도포와 갓을 챙겼다. 다른 무기는 필요 없었다. 오직 가장 순수한 검 한 자루면 되었다.

“나리!”

그리고 막 방을 나섰을 때, 도겸은 얼결에 품으로 뛰어드는 아이를 안아 주어야 했다.

“…순이야. 아니, 여기엔 어찌….”

“싫어유. 안 가유. 아니, 못 가유!”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 했건만, 그 많은 어른들이 아이 하나를 잡아 두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겸은 슬쩍 검을 뒤로 숨기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응?”

“가족이라구 허셨으니께유!”

어찌 설득하며 아이를 떼어 놓을까 고민하던 차, 순이가 반박할 수 없게 했다.

“몸종이었으면 얌전히 나리 말씀 따랐쥬. 허지만… 가족이라구 말씀허셨잖아유!”

“…….”

“그러니께 지는 나리랑 있을 거구먼유. 죽어두 상관 없슈! 나리와 지는 가족이잖아유!”

“결코 너를 죽게 두지 않는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도겸은 아이의 어깨를 잡아떼어 내며 덧붙였다.

“그저, 가족에겐 좋은 것만 보게 해 주고팠을 뿐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 도성 안에서 벌어질 일은 그다지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가족이 같이 살면서 뭐 허구헌 날 좋은 꼴만 보겄슈? 같이 꽃도 보구, 똥도 보구 허는 것이쥬!”

그러나 순이는 고집만큼이나 완강했다.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는지라 도겸이 애를 먹을 때였다.

“나리, 소인도 나리 곁을 지키겠습니다.”

뒤따라온 화월은 가채도 없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자존심만큼이나 높고 크게 올리던 머리를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여인은 머리가 가벼워진 대신 몸을 더 곧고 바르게 펴고 서 있었다.

“화월아, 어찌 너까지 이러느냐? 이럴 시간이 없다. 너라도 아이를 데리고 어서 가거라.”

제 명령에 누구보다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삼득이 이렇게 필요할 때가 또 있을까.

“나리!”

그때 마침 삼득이 뛰어 들어왔다. 도겸은 한시름 놓으며 찰떡처럼 붙어 있는 순이와 화월을 가리켰다.

“삼득아, 어서 화월이와 순이를 데리고….”

“저도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삼득마저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게 아닌가.

“대체… 어찌 이러는가?”

“나리께선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어제를 돌보고 내일을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작 나리 스스로는 전혀 돌보지 않으시고요.”

화월이 앞으로 나설 때였다.

“그리하여 소인들이 나리를 지키고자 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남산댁이 말을 이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닙니까, 나리?”

“그…!”

무어라 말하려던 도겸은 일제히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차마 모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는 아끼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어린아이 같은 소릴 어찌 하겠는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낯부끄러운 짓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길을 택했다.

“…그럼 각자 할 일을 하거라.”

“예?”

“우선 신 상궁.”

평소와 다른 호칭에 호명된 남산댁의 눈이 약간 커졌다.

“…예.”

“자네는….”

“나리!”

도겸이 남산댁을 비롯해 모여 있는 이들에게 각자 할 일을 전해 줄 때였다. 누군가 대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 조익환이 궐로 진격하는 와중에 군사를 나누어 이곳으로 보냈다 합니다!”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 한들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순이를 밀어내고 검을 고쳐 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내가 말한 곳으로 가 할 일을 하거라!”

그러자 퍼뜩 놀란 순이가 주춤거리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무리 각오한들 눈앞에 닥치면 겁이 나기 마련이었다. 도겸은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며 당부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만, 마음이 급하다고 큰길로 가진 말거라. 알겠느냐?”

“지, 지만 믿으셔유!”

“다른 이들도.”

순이를 밖으로 내보낸 도겸이 부탁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거라. 감정이 앞서 무기를 휘두르지도 말거라. 나는 너희들이 그저 어디 한 곳이라도 상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알겠느냐?”

“예!”

사람들이 흩어진 이후 도겸은 바삐 나가려다, 별안간 안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리?”

“나리, 조익환이 금방 들이닥칠 것입니다!”

도겸과 함께 움직이려 기다리던 무사들이 서둘러야 한다 했지만 그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들러야 하니 너희들은 나가서 되도록 큰 소리로 사람들을 집 밖에 나오도록 하여라. 누가 역모를 일으켰는지 똑똑히 볼 수 있게 말이다.”

“아… 예!”

무사들까지 뛰어나간 뒤 도겸은 서둘러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전히 꽁꽁 얼어 있는 샘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 손에만 녹는 얼음이라… 어쩌면 나는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몸을 낮춘 그는 얼어붙은 샘의 표면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었다. 분명 하얗고 불투명하게 얼어 버린 물이었으나, 어쩐지 도겸의 손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 찰랑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제 예감이 맞는 듯했다.

“내 차례라는 뜻이겠지.”

처음엔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거나 녹지 않았다. 그러다 이무기가 여의주를 넘기려고 했을 땐 닿는 부위만 녹아들었고, 이제는 닿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물이 되었다. 이런 변화의 흐름과 비슷하게 변한 것은 딱 하나였다.

“…내 결심. 숭고한 희생을 치른 네게 걸맞도록 내 소원이 분명해져야 하는 모양이구나.”

갓과 신을 벗은 도겸은 샘에 몸을 담그고 들어갔다. 그의 몸이 닿자마자 녹아 버린 샘물은 언제 얼어 있었냐는 듯이 그를 품어 주었다. 얼음이 순식간에 물로 변한 덕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직전까지 얼음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뼛속을 찌르는 냉기가 대단했다. 도겸은 추위를 꾹 참고 눈을 떴다.

바닥엔 눈을 감은 청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 처음 보았던 그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물 아래로 천천히 스며드는 햇살에 비친 청의 심장 부근이 채워져 있음을 본 도겸은 울컥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남은 숨을 한 움큼이나 뿜어내고 말았다. 하얀 얼음 조각 같기만 했던 여인의 몸은 마치 간택을 보내기 위해 배웅하던 그날의 아침처럼 청초하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을 보자마자 심장이 마구 뛰고 굳어 가던 몸의 움직임이 편해지는 것이 또한 신비했다.

이윽고 그의 손끝이 청의 몸에 닿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가장 필요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때엔 건드리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도겸을 밀어내던 여인이 여전히 평온한 잠에 든 듯 눈을 뜨지 않은 탓이었다.

가만 깨어나지 않는 여인을 바라보다 숨이 가파 올 즈음, 도겸은 이끌리듯 청의 뺨을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꼭 인형에 혼을 불어넣듯 조심스럽고도 애틋했다.

“…….”

“…….”

그리고 드디어 청이 눈을 떴다. 감격한 나머지 물속인 것도 잊고 무어라 말하려던 도겸은 남은 숨이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러자 청이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도겸을 위로 올려 보냈다.

“…푸하!”

“물속에서 숨도 못 쉬면서 무슨 객기야?”

간신히 참던 숨을 들이쉬는 도겸에게 청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입씨름을 할 겨를은 없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잠들어있다 깨어나 저를 바라보는 여인에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무어라 입을 여는 대신 그저 청을 힘껏 끌어안았다.

“…혼내려던 거 아니었어?”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럼?”

“그저… 좋아서.”

도겸은 청을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같은 말만 읊조렸다.

“이젠 너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

도겸을 밀어내며 유리구슬 같은 눈을 굴린 청이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딱히 나를 싫어할 이유도 없지 않아?”

얼굴이 물에 젖어 다행이었다. 도겸은 어쩐지 툴툴대는 청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긴 하다만… 내가 말하는 감정과 네가 말하는 감정은 의미가 조금 다를 듯한데.”

“어떻게 다른데?”

당장 바깥의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여기서 청에게 감정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도겸은 어쩐지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해서, 차마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게… 실은 부끄럽다만 나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늘에 아무렇게나 쏟아 놓은 것 같은 별도 하나씩 다 헤던 네가 고작 이런 걸 모른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연모한다는 걸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마음을 먹었지만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도겸이 머뭇거리던 와중에 청이 먼저 사랑을 정의했다.

“연모한다는 말도 모른다니, 너 정말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무어?”

“맨날 인의예지 타령만 하는 책이나 읽으니 모르지. 저자에 널린 염정 소설 속에 있는 게 연모잖아.”

붉어진 눈을 하는 도겸은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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