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나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해쳐야 된다는 생각조차 못 했어. 그래서 그냥 피하기만 했지. 그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탓이라 여기면서.”
도겸은 차마 어느 편도 들 수가 없었다. 그저 귀를 열어 두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근데 화살촉이 너무 깊게 파고든 탓에, 혼자 빼낼 수가 없었어. 그길로 도망쳐서 간신히 물가로 내려가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그때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던 유약한 인간 아이를 만난 거야.”
“…….”
“그곳도 인간의 영역인 줄 알고 도망치려는데 조설아가 다친 나를 보고는 맨발로 뛰어와서 치료해 주겠다고 했어. 난 사실 그 아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도 몰랐는데, 적어도 날 공격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상처를 보여 줬고.”
이무기는 제 흉터에서 한참 동안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조설아는 나를 치료해 준 이후에도 산에 자주 올라와서 나와 시간을 보냈어. 내게 인간의 말을 알려 주고, 바위에 물로 글자를 적어 가며 글자도 가르쳐 줬어.”
마치 도겸이 기왓장에 글씨를 적어 가며 청을 가르쳤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도겸은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때라 나는 그냥 듣기만 했고, 조설아는 인간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어. 그러다 아버지에게 하등 쓸모가 없는 자신에 대한 한탄도 들었던 거고.”
“…….”
“조설아는 내게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되고 싶다고 했어. 몸이 낫기만 하면 그 소망을 꼭 이룰 것이라고도 했고.”
이무기는 그래서 은혜도 갚을 겸, 한참이나 산을 돌아다니며 이무기의 눈으로 보기에도 영험해 보이는 약초들을 찾았다고 했다.
“백 년 묵은 산삼을 찾아 놓고 그 아이를 기다렸는데… 갑자기 오지 않았어. 꽃잎이 푸른 잎이 되고, 그 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져 냇물을 떠내려가고, 그 냇물이 얼어붙을 때까지도.”
더 이상 이무기의 꼬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잠잠하게 바닥으로 내려앉을 뿐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그 아이가 흘려 놓은 머리카락을 먹고 모습을 바꾸어 인간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가 봤어. 그리고 알게 됐지. 조설아가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한 해 내내 호되게 앓다가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는 걸.”
그리고 순수한 영물의 앞에 조익환이 나타났다.
“마침 상을 치르고 있는 집 안을 몰래 들여다보다가 그 아이가 늘 이야기하던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나게 됐어.”
“…….”
“그 순간 나는 결심했지. 그 아이가 이루지 못한 소망을 대신 이루어 주자고. 아버지에게 쓸모없는 딸이 아닌… 인정받고 사랑받는 딸이 되어 주는 거지. 그 아이 대신….”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았다는 골자를 가진 이야기였다. 짐승이 은혜를 갚는 일은 설화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이무기의 입을 통해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한 짐승이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수없이 선택의 기로에 섰을지를 아는 도겸으로서는 침통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용이 여의주를 받아 주지 않으면 그냥 갈래.”
생각에 잠겨 있던 이무기가 갑자기 몸을 움직여 담벼락 쪽으로 향했다. 벌떡 일어난 도겸은 얼결에 이무기를 배웅했다.
“이리 가 버리는 것이냐?”
“기껏 여의주 주려고 왔는데 헛수고잖아. 그럼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지.”
“…….”
있어야 할 곳. 그 말이 어쩐지 훅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도겸이 무어라 답하지 못하는 동안 담벼락 위로 느긋하게 기어 올라간 이무기는 물끄러미 도겸을 바라보다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다 할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였다.
이무기가 사라진 뒤로도 가만 샘 옆에 서 있던 도겸은 사실 번민하고 있었다.
샘에 다시 손을 담가 볼까, 말까. 한참을 서성였지만 차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아니, 용기를 내기 싫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었다. 도겸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
“우, 우리 나리께 가는 것이 아니어유?”
서촌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삼득을 따르던 순이가 우뚝 멈춰 섰다.
“어제까지는 집에 간다구 혔잖어유. 나리께, 아씨께 간다구 혔잖어유!”
순이는 청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저 집을 공사하느라 지난번처럼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들은 탓이었다. 어른들이 서로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던 차, 남산댁이 나서서 조심스레 타일렀다.
“행수님의 객주에 일손이 부족해서 우리더러 와 달라고 하시잖니. 어차피 집 고치는 데 시간 걸려서 나리께서도 허락하셨다는데 왜 이러는 것이냐?”
물론 거짓말이었다. 도겸은 화월의 객주로 피신을 명령했다. 곧 도성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청이 안마당의 샘과 함께 꽁꽁 얼어 버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줄 수가 없기도 했다.
그리고 남산댁은 마지막으로 본 도겸의 눈에서 그의 뜻을 읽어 냈다.
고집스럽게 서촌에 남겠다는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파란 꽃밭은… 나리랑 같이 보고 싶었단 말이어유.”
“파란 꽃밭?”
순이가 울먹이며 하는 말에 삼득이 헛기침을 하며 아주 곤란해했다.
“그, 제가 바다를 구경시켜 주겠다 하였더니 순이가 나리와 함께 가고 싶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는 왜 쓸데없는 소릴… 비켜!”
삼득을 밀어내며 순이의 앞으로 나온 화월이 일행 모두에게 호통을 쳤다.
“갈 길도 먼데 지금 애 하나 어쩌질 못해 이리 서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서두르시지요.”
남산댁이 서둘러 순이를 제 뒤로 숨기며 고개를 숙일 즈음이었다.
“여덟 살이면 물정을 모를 나이도 아닌데.”
“예?”
“해… 행수.”
남산댁이 자세를 바로하기도 전, 그리고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삼득이 화월을 말릴 즈음이었다.
“이쯤 되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이라니유?”
남산댁의 치맛자락을 붙든 순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화월은 즉시 모두가 쉬쉬하던 진실을 일러 주었다.
“나리께선 곧 도성으로 들이닥칠 반역도들과 싸우실 작정으로 우릴 먼저 피신시키시고 홀로 남으신 것이다.”
“…예?”
순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아이와 화월을 제외한 모두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행수님.”
남산댁이 다급히 조심스레 화월의 입을 단속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떠나면 다신 나리를 뵐 수 없을지도 모르지. 우리조차 피신시키셔야 할 만큼 우리 쪽이 열세이기 때문이다.”
“행수님!”
남산댁이 드물게도 언성을 높이기까지 하였으나 화월은 한 술 더 뜨기만 했다.
“게다가 아씨는 납치된 우릴 구하다 힘을 다하시는 바람에 샘물 속에 가라앉아 꽁꽁 얼어 계신 참이지.”
“아, 아씨가요?”
연이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순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우, 우리 아씨 우째유. 우짠대유!”
“이런 상황인데, 너는 나리를 이 위험한 곳에 두고 나를 따라 멀리 가겠느냐?”
그럼에도 화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순이를 몰아세웠다.
제대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끅끅 울음을 참던 순이가 이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못 가유. 안 가유. 지는 평생 나리와 아씨를 모시기루 혔구먼유!”
아이는 남산댁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먼저 서촌을 향해 뛰어가 버렸다. 난감한 듯 입을 달싹이던 삼득이 아이를 뒤쫓았다.
“부러 그러신 것이지요.”
그리고 남산댁은 드디어 화월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화월은 머리에 무겁게 올려 둔 가채를 고정하고 있던 비녀를 뽑아내며 답했다.
“나리께선 아이들에게 퍽 무르신 분이니 저 아이가 우리에게 좋은 핑계이자 명분이 될 테지.”
그리곤 값비싼 가채를 미련 없이 땅에 내던지며 남산댁을 도발했다.
“상궁 출신이시라 웃전의 명령에 반하는 법을 모르시나 보군?”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무력하게 납치를 당한 탓에 아씨께서 결국 어찌 되셨는지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럼 자넨 착실히 나리의 명에 따라 도성을 떠나게.”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들을 모두 빼내어 다른 하인에게 떠넘긴 화월이 치맛자락을 잡아 들었다.
“나는 저 아이 핑계를 대서라도 나리의 곁에 남아 그분의 또 다른 목숨이 될 것이니.”
또 다른 목숨이 된다. 곧 도겸을 구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곁을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곤 한쪽에 서 있던 행랑아범까지 굳은 얼굴로 짐 가방을 내던졌다.
“저도 이곳에 남겠습니다. 한 번 나리의 뜻에 반하여 도성을 떠나지 않은 죄인인데, 두 번 죄를 지은들 어차피 죽은 목숨인 건 매한가지지 않습니까?”
화월의 말이 맞았다. 무조건 웃전의 명령에 복종해 온 남산댁으로서는 도겸의 명령에 반하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세자 저하께서 보내셨으니까.”
하지만 이리 주어진 명분을 거스르고 명령에만 따른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혜빈마마께서 어찌 그리되신 것인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덮어 두고 홀로 목숨을 부지한다는 건 일찍이 혜빈의 죽음 이후 저도 목을 맬 때 다 내던지지 않았나.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남산댁은 드디어 서촌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자네들에겐 강요하지 않겠네.”
다만 우두머리를 잃고 당황하는 일행들을 수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래 살고 싶거든 가던 길을 따라 먼저 가서 행수님을 기다리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나를 따르게.”
남산댁은 화월처럼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 서촌을 향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당장 오늘 죽어 혜빈을 만나더라도 상관없다 생각할 만큼 가벼워진 채였다.
***
의관을 갖춘 도겸은 이른 아침부터 사당에 가 신알례를 드렸다. 정성스레 향을 올리고 절을 두 번 올리는 과정은 단정하기만 했다.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차분한 공기가 도겸의 주변을 맴돌았다.
“소자, 두 분께 문안 올립니다.”
늘 공손했지만 오늘 도겸은 유난히 행동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다. 평소와 또 다른 게 있다면 꼼꼼하면서도 다소 굼뜨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문안은 직접 뵙고 여쭙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겸은 한쪽에 내려 두었던 보검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소자는 이제 옳은 것을 지키러 가고자 합니다.”
부모 앞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검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게 하고 어머니의 배속에 있던 제 형제가 빛을 볼 수도 없게 만든 자를 베겠습니다.”
조익환은 이미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을 내며 보란 듯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자칫 어느 정도의 군사만 데리고 한양에 들어 오다가 중앙에서 요청한 지원군이 뒤늦게 도착할 경우 독 안에 든 쥐가 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한 듯했다.
“그날 이 집이 왜 불에 타야 했을까… 대체 어떤 연유로 소자는 가족을 잃어야 했던 것인지를 수도 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도겸은 검집이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아버지께서 알아차리신 것이겠지요. 세자빈 마마들이 어찌 연이어 훙서하신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