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90)화 (175/197)

“근데 이젠 인간에겐 애초에 은혜를 입을 생각도 없어졌어. 함부로 은혜를 갚기엔 인간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얼어 버린 샘을 내려다보며 덧붙이는 이무기의 말에 도겸은 짐짓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걔한테 인간 세상을 알려 준 인간이 너였다면 적어도, 그 지경까진 안 됐을 거야.”

언젠가 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여인은 알지 못했다. 저 또한 그리 옳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그럼 조익환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힐 생각은 없나?”

“그러려면 또다시 조설아의 몸을 먹고 조설아인 척해야 하잖아.”

“그…렇기야 하다만, 네가 멋모르고 저지른 과오들을 돌이키기 위해서라면 고려해 봄 직할 것 같은데.”

“난 이미 아버지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킨 뒤 조설아의 몸을 받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모두 묻어 주었어. 그리고 나도… 그 옆에서 잠들 거야.”

꼬리로 얼어붙은 샘의 수면을 가볍게 두드린 이무기는 안타깝게도 도겸의 뜻에 따라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겸 역시 이미 결연하게 모든 것을 정한 이무기를 더 설득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은혜를 갚는 방법이 잘못되어 먼 길을 돌아오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제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이무기에게 그 책임을 전부 물을 수는 없는 탓이었다.

“더는 그 어떤 인간의 도구도 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승천할 수 없을 만큼 부정 타 버린 몸이니,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은 여의주는 용에게 주고 싶어서 온 거고.”

“여의주를 청이에게 주겠다니, 그럼 너는?”

“내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이무기는 자신의 혀 아래에 고이 넣어 두었던 작은 여의주를 꺼냈다.

“내 결정이니까 넌 더 이상 토 달지 마.”

이무기는 끝까지 도겸에게 날 선 투로 말했다. 아무리 청을 돕겠다지만 도겸이라 하여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지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게 청이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이냐? 청이는 이미….”

도겸은 어렵사리, 힘겹게 털어놓았다.

“심장이 없어져 있었다.”

상성이 맞지 않는 신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 번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심장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 청이 얼음이 되어 버린 이후로 시간이 흐를수록 도겸의 마음엔 절망만 쌓여 가고 있었다.

“폭주하는 힘까지도 제어해가며 비를 내리는 데 쓸 만큼 강한 용이었어. 심장이 터졌는데도 그 힘을 몸에 가두고 움직였다고.”

그러나 이무기는 청이 얼마나 대단한 용인지 열변을 토하기 바빴다.

죽이겠다, 힘도 못 쓰는 용이지 않느냐며 청을 비난하던 모습과는 엽전을 뒤집듯 전혀 다른 태도였다.

도겸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꼬리 끝으로 얼어붙은 샘의 표면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이무기에게 물었다.

“그럼… 청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냐?”

그러자 이무기가 혀를 날름거리며 도겸을 바라보았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난 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

“그! …그렇긴 하지.”

한심하다는 듯 매끈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꼴에 울화가 치밀었다. 동시에 불과 일 각도 안 된 틈에 들은 이야기도 잊을 만큼 내몰려 있음을 실감했다.

“여기가 그나마 제일 약한 것 같은데.”

도겸을 업신여기던 이무기가 샘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어쩌려는 것이냐?”

“뭘 어쩌긴. 이걸 전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순간 여의주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이무기가 짚은 지점에 정확히 벼락이 떨어졌다. 급히 옷소매로 눈을 가렸던 도겸은 느닷없이 공격하는 이무기에게 따져 물으려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를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샘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조금도 상하지 않고 고요히 얼어 있을 뿐이었다.

“물러나. 한 번으론 안 될 모양이니까.”

“아니, 그만 하거라. 흠집조차 내지 못한 공격이 두 번이라고 통하겠느냐? 격이 다르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고 있었다면 소란을 피웠다며 청이 짜증을 냈을 것이다. 도겸은 이무기가 부수려고 한 자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직접 보여 주었다.

“보거라, 네가 내린 벼락은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하지 않느냐?”

“…너!”

갑자기 손목을 꼬리로 감는 이무기 때문에 하마터면 도겸은 그대로 손목을 잃을 뻔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무기가 놓아주지 않고 얼음에 대고 있게끔 했다. 어찌나 기운이 센지 벗어나기는커녕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도리어 힘을 가할수록 스스로 상처를 내는 꼴이었다.

“봐, 녹고 있잖아!”

“뭐?”

이무기가 소리치고 나서야 도겸은 비로소 손이 닿은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제 손바닥에 닿은 얼음이 녹고 있었다.

“그야… 얼음이 녹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그리 묻긴 했지만 저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분명 처음 차갑게 얼어붙었을 즈음엔 아무리 만져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소리.”

도겸의 손을 놓아준 이무기가 주변에 있던 돌을 집어다 얼음을 힘껏 내리쳤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충격음이 일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물리적인 힘을 가했음에도 얼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온기에만 녹는 것인가?”

“답답한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 온기에만 녹는 것이라면 이 샘도 진작에 녹았겠지. 경강의 얼음이 전부 녹은 지가 언젠데!”

제 공격이나 물리력은 전혀 먹히지 않는 탓에 이무기는 바짝 약이 오른 채였다. 아마도 청의 격을 인정하는 것과 제 힘의 수준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인 모양이었다.

“너만 허락하는 거야.”

그때 이무기가 돌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며 말했다.

“이 재수 없는 용이 너만 허락하는 거라고.”

도겸이 조심스레 손을 떼자 샘은 금세 얼어붙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한참을 만져도 손이 얼얼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꼭 제게는 한없이 무르고 너그럽던 청을 보는 듯했다.

“그러니까 빨리 뚫어 봐. 이걸 묻을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이무기가 여의주를 흔들며 도겸을 재촉했다. 도겸은 별수 없이 엉거주춤 앉아 샘의 표면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의 열기에 얼음은 다시 사르르 녹아들었다. 이무기가 요구하는 깊이까지 녹이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다만 물 전부가 얼어붙기라도 했는지 한 뼘 깊이까지 녹여도 여전히 단단한 얼음이었다.

“이걸 넣어.”

가만 지켜보던 이무기가 도겸이 만들어 놓은 틈 안으로 여의주를 떨어트렸다. 도겸은 작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여의주를 두고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의 온기가 멀어지자마자 구덩이는 얼음으로 빼곡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얼음이 여의주를 툭 뱉어냈다.

“뭐야?”

“…그러게나 말이다.”

도겸이 보기엔 정말 뱉어 내는 것 같았다. 차오르는 얼음이 여의주를 품지 않고 그대로 밀어낸 탓이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이번엔 알았다. 도겸은 여의주를 집어 이무기에게 돌려주었다.

“청이는 물에 불순물이 섞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지.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하는데.”

“…뭐?”

“한 번 더 해 보겠느냐?”

약이 바싹 오른 이무기가 이번엔 샘이 아닌 저에게 벼락을 내릴까 싶어 내심 긴장 했지만 이무기는 의외로 샘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오기가 생긴 이무기는 재차 도겸에게 얼음을 녹이도록 요구했고, 도겸은 순순히 따랐다. 결과는 같았다.

“이 재수 없는 용이!”

결국 성이 난 이무기가 꼬리로 얼음을 내리쳤다. 물론 샘은 고요하게 형태를 유지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네 여의주는 받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구나.”

처음엔 청을 살리려는 이기심에 이무기가 자신의 여의주를 내놓도록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청이 눈앞에 있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냥 올려 두기만 해도….”

그러나 이무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무방비하게도 여의주를 표면 위에 덩그러니 놓아두려 했다.

도겸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더욱 싫어할 것이다. 내가 이 집에 남아 있는 이유도 이 위에 쌓이는 나뭇잎이나 꽃잎 같은 것들을 시시때때로 치워 주기 위함이니 말이다.”

“다 죽어 가는 용 주제에!”

꽤 긴 시간을 조설아로 산 탓일까. 이무기는 갑작스레 분기탱천하며 열을 올렸다. 도겸은 귓등으로 넘기며 샘의 주변을 정리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너그러운 것이다. 어린아이에겐 울면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던 청이가 그저 여의주를 밀어내기만 하는 걸 보면 말이지.”

청을 감싸고 있는 물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필시 이는 청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거나, 청을 보호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너는 어쩌다 조 낭자를 만난 것이냐? 낭자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한 것은 알고 있다만. 혹, 피접을 갔을 때 만났던 것인가?”

한편으로는 은혜를 갚겠다며 스스로 조설아가 되고자 했던 이무기의 사정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넌지시 묻는 도겸을 흘겨보던 이무기는 여의주를 도로 삼키고 얼음을 내리친 꼬리를 살랑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다 죽어 가던 인간이긴 했지.”

“네게 어떤 은혜를 입힌 것이냐?”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게?”

여전히 이무기는 도겸을 향해 날을 세웠지만, 말하자면 칼등으로 겨누는 느낌이었다.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흥….”

간단하게 의문을 물리는 도겸을 마뜩잖게 바라보던 이무기가 긴 몸을 구부려 똬리를 틀었다. 그리곤 아닌 척 슬쩍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여의주에 산의 정기를 담기 위해 깊은 숲에 들어갔다가 인간 사냥꾼들을 만난 적이 있어.”

샘의 가장자리에 앉은 도겸은 이무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내심 눈을 피하고 싶던 구렁이의 거대한 외관도 보다 보니 차츰 적응이 되어 갔다.

“정기를 담는 동안엔 무방비해지는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살을 맞았지…. 여기, 보여?”

똬리 튼 몸을 살짝 푼 이무기가 몸통의 어디쯤을 가리켰다. 과연 뱀 비늘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야 할 곳에 흉측하게 어그러진 모양의 흉터가 보였다.

0